목장나눔

오늘의 말씀 묵상 2/3/2021 수요일 [본문: 마태복음 9장 14~26절]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2-03 10:28
조회
829

2. 3. 수요일. 오늘의 말씀묵상

찬양 "믿음과 삶" 링크: " target="_blank" rel="noopener">

[본문: 마태복음 9:27-38]
  1.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2.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3.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4.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5.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6. 그들이 나갈 때에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7.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8.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9.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10.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11.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12.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생명의 삶 온라인 링크]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edit_all=2021-02-03

[본문이해]

[27-31절]

두 맹인을 고치시는 사건은 다른 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는 독특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두 소경의 입에서 나온 외침, “다윗의 자손”이란 예수님의 칭호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이 용어는 예수님의 족보가 시작되는 1장 1절에 등장한 이후에 오늘의 본문에 처음으로 나오는 호칭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경에 약속된 메시야를 부를 경우에 사용하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 예수님을 인식하고 있음을 마태가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육적인 눈은 멀었지만 영안이 열려있는 두 맹인의 고백을 통해서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며, 주님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묘사하며 선포하고 있는 마태의 기록은 구약적 배경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 이사야서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종 메시야의 사역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맹인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의 눈을 열어주는 사역으로 이사야 28:18, 35:5, 42:7, 18-19절 등에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마태는 마가, 누가, 요한의 복음서 보다 맹인의 눈을 뜨게하는 사건을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마 11:5, 12:22, 15;30-31, 20:30, 21;14). 동시에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향해서 ‘눈먼 지도자’라고 호되게 질책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기도 합니다(마 15;14, 23:16-17, 19, 24, 26).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묘하게 마태복음에서 대조되고 있습니다. 즉 육의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치료하심으로 육의 눈을 뜰 뿐마 아니라, 영안이 열려 구원자를 보게 되는 사람들과 육의 눈은 볼 수 있으나 영안이 어두어 맹인과 같이 눈이 가리워진 종교지도자들이 묘하게 비교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서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단지 개인적인 치유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영적인 눈이 어두워져서 보지못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치유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임을 묘사하며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32-24절]

귀신 들려 벙어리 된 자를 치료하는 사건으로 위의 두 맹인을 치유하는 사건과 같이 오직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사건입니다. 마태의 사건 서술의 초점은 귀신 들렸다가 치유함을 받은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저자의 관심은 오히려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사람들에 반응에 더 관심이 있어 보입니다. 이러한 강조는 사탄의 영향력 아래 있는 귀신 들린 자를 치유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영적 전쟁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반응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는 사건에서도 위의 맹인의 고치신 사건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발견됩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사건은 사단의 세력을 점진적으로 무너뜨리는 하나님 나라의 영적 전쟁의 승리를 나타냅니다. 마태는 이 영적 전쟁에서 영안이 어두워진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눈이 어두워져서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승리를 전혀 보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한 맹인과 같은 자들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조롱하며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서 그들 스스로는 꿈에도 인식하지 못하겠지만 자신들도 모르게 사탄의 편에 서서 일조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35-38]

끝으로 본 단락은 예수님의 사역을 요약하면서 참 목자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8-9장에서 예수께서 갈릴리 지방에서 행하신 9가지의 기적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의 폭풍을 잠잠케 하시는 사건을 제외하고 8가지 주님의 사역을 35절에서 짧게 요약하고 있는데 “가르치시며, 전파하시며, 고치시는” 사역입니다. 그런데 이 요약에서 독특한 마태의 표현이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8가지 등장하는 기적들은 모두 치유를 중심으로 한 고치시는 사역입니다. 하지만 마태는 고치시는 사역보다 가르침(teaching)과 복음전파(preaching) 사역을 먼저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마태의 관심은 11장 이후에는 치유 사역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지 않은 채 가르치는 사역과 복음 전파 사역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마태의 의도적인 언급을 통해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마태의 관점은 단순히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그런 능력을 가진 에수님이 누구이며 궁극적으로 구원의 복음의 주체자가 누구인지를 알리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36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참 목자로서의 주님의 마음을 그리고 있습니다. 바로 앞 단락에 등장하는 종교지도자들, 특히 바리새인들의 영적인 무지를 통해서 주님이 내릴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심정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지도자들이 백성들보다 더 영적으로 어두울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서 긍정하고 인정할 수 있는 부분도 의도적으로 부정하고 반대하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주님은 목자 없는 양같은 백성들을 불쌍히 여길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백성을 이끌어야 할 지도자들의 부재는 37-38절로 이어져서 추수할 일꾼에 대한 새로운 사역으로 방향전환을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방향전환은 제자들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사명의 뱡향을 제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묵상 및 적용]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 맹인의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고백은 믿음에 대해서 여러가지를 묵상하게 합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본 이 두 맹인의 고백으로 부터 훗날 믿는 자들에게 믿음의 중요성을 교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학으로 도저히 치유할 수 없었던 상태에서, 또한 과학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조건에서 ‘치유’라는 ‘변화’가 나타난 이 사건의 강조점은 분명이 “너희 믿음대로 되라”라고 말씀하신 주의 선언 속에서 발견됩니다. 바로 치유받는 자의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저자 마태의 강조점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에 있다 할지라도 이 두 맹인의 믿음의 고백을 ‘거짓’이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냥 “눈아 떠져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 믿음대로 되라”라고 명령하신 것은 두 맹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눈이 떠질 것을 확실하게 믿었기 때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믿음이란 모든 기적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동인(動因),’ 즉 동기가 되는 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믿는 자에게 더 놀라운 것은 예수 그리스가 누구인지 알게 된 이후의 변화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여인을 주님이 메시야임을 알게 된 이후의 변화를 28-29절에 “여자가 물동이르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참 구원자 예수를 만난 자는 결코 잠잠히 침묵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치유받은 두 맹인에게 예수님은 엄하게 경고하여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행하신 이들의 눈을 뜨게 하시는 기적은 고침받은 자들에 의해 금방 사람들에게 퍼져 나갑니다.

이 기록에서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불순종에 대해서 책망하기 위해 기록했다라고 보기 보다는 구원자 예수를 만나고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한 자들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손길, 그 분의 치유를 경험한 사람은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여인처럼 도저히 그 사실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명!” 종종 믿는 자들의 의무이며, 사명으로 도전되어지는 이 슬로건의 근원은 신자로서의 의무감이기 전에, 그리스도인의 양적 증가를 위한 전략적 계획에 의해 행해져야 할 행위이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분의 사랑하심을 알게 되면 ‘불가항력적’으로 삶 속에서 행할 수 밖에 없는 자발적 행위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예레미야 20:9에서 뜨겁게 자신의 열정을 고백합니다. 주의 은혜를 체험한 자들은 도저히 잠잠하고 숨길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 생명의 능력이 스스로를 가만히 침묵하고 앉아 있게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예언하지 않으려고 결심해 보기도 하지만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렘 20:7)’ 도저히 답답하여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좋은 보석이나 멋있는 물건이나 행운을 얻은 사람은 자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 안달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이 세상 최고의 보물인 영생의 은혜를 받고 침묵할 성도가 있겠습니까? 아니 오히려 침묵하고 있는 사람이 비정상일 것입니다. 더우기 가족이나, 친척, 친구, 또는 사랑하는 사람이 영원토록 지옥의 고통의 형벌을 받게 될 죽음의 위기에 처했다면 결코 가만히 있을 수 없어야 하는 것이 믿는 자들의 사람된 도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행한 기적에 대해서 반박할 수 없게 되자 능력의 원천을 ‘귀신의 힘’이라고 비방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변화’와 ‘치유’를 경험한 믿는 자들의 모습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반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믿는 자들의 모습과 불신자들의 모습은 의외로 단순한 면에서 그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가 누구인가를 전하는 자들은 믿는 자이며, 비방하거나 반대하는 자들은 불신자입니다.

그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믿음과 불신의 중간에 있는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기본적인 방향은 믿음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경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 각성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객관적인 경험은 예배에 참석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찬송을 부르거나, 성경을 읽거나 공부를 하거나, 선교를 가거나, 봉사를 하는 등등의 경건의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경건의 훈련이나 모습들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있는가?’라는 도전적인 질문이 영적각성의 첫 질문입니다.

오늘의 묵상을 마치면서 두 맹인이 보여 준 삶의 변화, 그들의 영적인 눈이 밝아짐으로 보인 행동이 우리들의 신앙 속에 도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현 상황을 역전시키고 일어나는 믿음의 종결자들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기도하기를 바라며, 끝으로 히브리서 기자의 고백이 움츠러들거나 위축되는 코로나 시대 속에서 믿음으로 인한 기쁨을 회복하는 은헤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8-39)

[기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 오늘의 말씀 속에서 좋은 스승, 두 맹인을 만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깨달은 것에서 멈추어 서지 않게 하시고, 삶 속에서 믿음의 교훈이 실천되고 경험되어지며 나타나게 역사하여 주옵소서. 물러서거나 멈추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의 이름을 부를 때에 더하여 주옵소서.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전 세계의 3분의 2의 사람들 중에 내 가족, 내 친척, 내 친구, 내 이웃이 있사오니 그들에게 예수의 소문을 전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나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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