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나눔

오늘의 말씀 묵상 2/2/2021 화요일 [본문: 마태복음 9장 14~26절]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2-02 09:11
조회
837

2. 2. 화요일. 오늘의 말씀묵상

찬양 "주님여 이 손을 꼭잡고 가소서" 링크: " target="_blank" rel="noopener">

[본문: 마태복음 9:14-26]
14.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6.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18.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19.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20.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21.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2.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23.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24.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25.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26.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생명의 삶 온라인 링크]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edit_all=2021-02-02

[본문이해]
첫째 단락에 해당되는 14-17절은 금식에 관한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에 관한 내용입니다. 세례 요한 제자들의 질문은 악의적으로 예수님을 시험하기 보다는 실제로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금식이나 율법 준수에 대한 것에 대해서 주님의 답변은 율법의 근본 정신을 깨우치는 것이며, 구약 성경을 인본주의적으로 해석하여 왜곡된 율법 해석을 바로잡는 것이었습니다.

“금식”에 대해서 예수님은 세가지 예화를 통해서 답변하는데 각각 신랑 예화, 생베 조각 예화, 새 포도주 예화입니다. 주님의 답변은 외관상으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 요한이나 바리새인의 제자들과 같이 금식을 하지는 않지만 신랑이 없어지면 금식하게 될 것을 말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님의 답변은 메시야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마태는 22장, 25장에서 메시야 왕국의 도래에 대해서 혼인 잔치로 비유하곤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16-17절의 답변을 좀 더 깊게 묵상해 보면 주님의 진의는 다른데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즉 앞단락에서 부터 계속 이어지는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나누는 식탁교제는 신랑 메시야가 결혼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베푸는 축하만찬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가 상징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이 땅에 오신 메시야를 기뻐해야 하는 것이지 슬퍼하며 금식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진의는 유대인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으므로 질문했던 자들도 반문하지 못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바리새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을 금식의 날로 지켰으며, 유대인들은 금식기간이라 할지라도 그 날이 결혼 예식 기간 중이면 슬퍼하거나 애곡하지 않고 기뻐하였기 때문입니다(훗날 AD 100년경의 기독교인들은 금식일자를 수요일과 금요일로 변경하여 지킵니다. 이때의 기독교 자료의 ‘사도의 교훈집’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이 금식일에 슬퍼하고 애곡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잃어버린 인간적 슬픔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은 인간의 죄악을 슬퍼하는 금식이며, 자신의 삶이 변화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확장되는 금식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성도의 금식은 메시야의 도래를 지금도 기다리는 유대 공동체와의 금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의미인 것입니다.).

또한 구약 성경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관계 회복을 결혼의 은유를 통해서 예언하곤 했습니다. 호세아 2:19-20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 이사야 61:1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 이사야 62:5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이 예언들은 결국 메시야, 곧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완성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약적 배경은 곧 예수님과 함께 식탁교제를 나누는 자들이 메시야에게 돌아옴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나누는 것은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예수님께 돌아옴으로 회복되었음을 가시적으로 확증하는 사건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에게 베푸는 죄의 용서, 하나님 자녀의 신분, 구원의 실재를 표현하는 예수님과의 식탁교제(혼인잔치)는 구원에 대한 새로운 발상의 전환(Paradigm Shift)을 요구합니다. 이 모든 구원의 은총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메시야의 죽음의 결과가 금식과 같이 애곡의 분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풍성한 식탁과 함께 제공되는 만찬을 즐기는 축제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구원받은 자들 모두에게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님의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는 가르침이 기존에 유대인들이 믿고 지켜왔던 율법의 가르침과 충돌하여 무가치하게 폐지하도록 전락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의문을 갖게 되거나, 또는 율법이 휴지 조각처럼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주님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라는 의문입니다. 신축성이 있는 새 가죽 부대는 새 포도주의 숙성시 발생하는 팽창력을 견딜 수 있지만 헌 가죽 부대는 탄력성과 신축성이 없기 때문에 새 포도주의 팽창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지게 됩니다. 주님은 본문에서 자신의 가르침을 새 포도주로, 유대교의 왜곡된 사상을 낡은 가죽 부대로 비유하시면서 유대교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결코 수용할 수 없으므로 구태의연한 과거의 가르침에 얽매여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변화를 모색하여 받아들여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의문들에 대해서 본 단락이나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5장에서 주님은 과거의 가르침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가르침의 근본 정신을 밝히고 이를 형식적, 외식적으로 따라 하는 차원이 아니라, 삶을 역동적으로 변화시키게 함으로써 온전하게 완성시키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7절의 말씀처럼 주님은 율법의 폐지자가 아니라 율법의 완성자이십니다.

둘째 단락인 18-26절은 혈루병에 걸린 여인의 치유와 소녀의 다시 살아남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두가지 사건을 치유와 살아남이라는 표면적인 관점으로 보거나, 혈루병에 걸렸던 여인과 죽은 소녀의 아버지의 믿음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다른 관점으로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믿음이 얼마나 굳센가, 또는 그들의 행동이나 신앙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저자 마태의 문학적 표현을 통해서 초점을 예수님 자신에게로 맞추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태의 문학적 표현법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중요한 통찰력의 메세지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앞 단락에 있는 ‘새 포도주와 새 부대’에 관한 말씀을 본 단락과 긴밀하게 연결하고 있으며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신랑 메시야가 그의 제자들에게서 빼앗길 날들이 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5절). 제자들이 신랑 예수님을 빼앗기는 구체적인 방법은 죽음입니다. 하지만 마태는 본 단락의 두 가지 사건을 통해서 주님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곧 혈루병의 여인이 치료되는 것과 소녀가 다시 살아는 것을 통해서 명확하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연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이 본 단락을 주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초점에 맞추어 해석을 하게 하는 근거는 19절에 표현된 “일어나”라는 헬라어 단어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19절에서는 헬라어 단어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다’라고 표현할 때에 사용하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예수님의 부활을 묘사할 때 집중적으로 사용하는 “일어나다(egeiro, 에게이로)”라는 단어를 독특하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18절에서 ‘소녀가 죽었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죽음을 말했다면, 19절에서는 ‘일어났다’라는 표현으로 부활에 대해서 복선을 깔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저자 마태가 본문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여인의 믿음도, 소녀의 아버지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부정하다라고 여기는 질병(레 15:25-27)도 치유하시며, 죽은 자도 살리는 생사를 주관하시는 메시야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태의 문학적 증거의 의도는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나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여인의 행동에 대한 부분이나, 소녀를 살릴때 ‘달리다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생략하여 기록하므로 구원을 선포하는 예수님께만 관심을 집중하도록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묵상 및 적용]
한 유명한 문화 평론가가 사람들이 문학작품, 드라마, 영화에 몰입하게 되는 주된 이유는 등장하는 주인공이나 등장인물들에게 공감하거나 감정을 공유하게 되는 ‘감정이입’ 때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내가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글이나 드라마, 영화를 통해서 마치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느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유명한 두 가지 사건이 등장합니다. 12년을 혈루병으로 고생한 여인이 치료받은 사건과 다른 복음서에는 회당장 야이로로 이름이 밝혀진 관리의 죽은 딸을 고치는 사건입니다. 이 두 가지 기적의 사건이 마음 속에 다가오는 것은 병에서 치료될 수 있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으며, 적용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기록된 사건이 문학평론가가 말하는 감정이입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문학평론가의 평론처럼 단순하게 성경에 기록된 사건을 나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감정이입의 측면으로 받아 들여서 나 자신에게는 절대로 일어나거나 발생하지는 않지만 대리만족하는 것으로만 국한시킨다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14절에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라고 말한 것처럼 믿음은 허망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마태는 본문의 사건을 3인칭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서 기록하고 있지만,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을 만지는 행위를 자신의 병이 나을 것으로 생각하는 미신적인 믿음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22절에서 에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은 이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주님을 하나님으로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는 인격적인 믿음을 가진 여인이었음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우리의 관심이 주님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 입으셨던 겉옷에 관심의 초점이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여인을 고친 것은 “믿음”이지 겉옷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겉옷은 병든 자를 고치는 신비한 능력이 있는 미신적 도구가 아닙니다. 저자 마태의 강조는 여인의 혈루증과 예수님의 겉옷을 통해서 ‘인간의 부정함(uncleanness of human)’과 ‘하나님의 거룩함(holiness of God)’을 상징하면서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조를 통해서 인간의 부정함이나 죄를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만을 통해서 해결될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혈루병을 앓았던 여인, 그녀 자신에게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겉옷이 아닌 예수님의 손을 직접 만졌다고 할지라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을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당장 자신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교회에 나가지만 그들에게 변화가 없는 이유를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들 중에 분명한 한 가지는 그들 자신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참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이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또는 생명의 위기에 처한 사람의 심정을 담고 있는 말로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 위기의 시간에 순간적으로 잡을 수 밖에 없는 지푸라기에 국한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위한 도구나, 나의 어려움이나 문제 해결을 위한 지푸라기에 결코 국한되지 않습니다.

마태가 본문에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내가 필요에 의해서 주님을 찾기 전에 오히려 거꾸로 나에게 찾아 오시는 분입니다. 당시의 율법적인 배경에 의하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이 주님의 겉옷을 만지기 위해 가지 않았냐구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약간 전환해 보면 ‘만약, 그 때에 주님이 지나가지 않았다면 여인이 주님을 만날 수 있었을까?’라고 생각해 보면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주님이 여인에게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혈루병의 여인 뿐만 아니라, 죽은 소녀에게로 주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역시 그 소녀도 살아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만나러 찾아 오신 분입니다. 나 스스로가 깨끗하고 거룩해야만 내게로 오시는 분이 아니라, 부정하고 죄 많은 나에게 친히 찾아 오시는 분입니다. 혈루병의 여인과 접촉한 주님, 또한 죽은 시체의 손을 만지면서 일으키신 주님의 행위는 당시의 율법의 정결 규례로 볼 때 부정한 일입니다. 하지만 마태는 하필 규례를 어기는 이 사건을 통해서 부정하고 죄인인 우리에게 찾아 오시고 손을 내미시는 에수님의 행적을 기록하므로 주님이 어떤 분인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손을 내밀어 주님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기도]
내게 찾아 오셔서 내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시는 주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내가 주께로 찾아 가기 전에 이미 내 옆에 와 계시며, 내 마음에 들어오시고자 노크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나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주님,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주를 영접하여 주와 더불어 먹고 주와 더불어 동행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내 눈을 열어 주셔서 환경과 상황, 어려움과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혈루병의 여인을 치료하고, 죽은 사람을 일으키신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나타나게 하옵소서. 나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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