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나눔

오늘의 말씀묵상 8/10/2021 화요일 [사사기 4장 1-10절]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8-10 09:33
조회
826

8. 10. 화요일. 오늘의 말씀묵상

찬양링크 “순종 by 송정미”:

[본문: 사사기 4:1-10]
1.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2.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3.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4.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5.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6.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7.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셨느니라
8.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
9.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10.바락이 스불론과 납달리를 게데스로 부르니 만 명이 그를 따라 올라가고 드보라도 그와 함께 올라가니라

[본문이해]
사사기 3:7-31이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공한 사사들의 사역이라면, 4-5장은 북부 지역의 사사들의 활동상에 관한 내용입니다.

[1-3, 다시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을 가나안 왕 야빈의 학대함]
에훗이 죽은 후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니 여호와께서 하솔에 도읍이 있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붙이십니다. 철병거 900대를 가진 강력한 군주 야빈 왕이 이스라엘을 이십 년 동안 심히 학대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학대로 인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1절, “에훗이 죽으니…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본절의 의미를 이해하는데는 문제가 없으나 어떤 내용을 강조하는가?에 따른 강조점을 주목해 본다면, 히브리 성경은 그 강조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에 있습니다. 히브리 성경의 순서를 따라 직역하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 에훗이 죽었다.”의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그 뉘앙스는 악을 행하게 된 것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모압 왕 에글론을 죽이고 이방 족속을 모두 몰아내면서 80년이라는 시간을 태평성대를 이루게 했던 사사 에훗이 무덤에 묻히자마자, 이스라엘은 또다시 우상을 숭배하는 악을 저지렀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2절, “그들을 파셨으니”: “팔다”라는 뜻의 “마카르”는 매매의 행위를 타나내는 일반적인 동사이지만,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불순종하고 범죄한 이스라엘을 주변 이방 나라들에게 넘기워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낼 때에 종종 사용되었습니다(신 32:30, 삿 2;14, 3:8, 사 50:1, 겔 30;12).

2절,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 “하솔”은 ‘둘레, 울타리’라는 뜻으로 갈릴리 바다와 그 북쪽에 있는 훌레(Huleh) 호수 사이에 위치한 성읍으로서 북부 가나안 땅의 수도 역할을 했던 도시입니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때 정복되었고(수 11:1-11), 이후 납달리 지파에게 주어졌으나 본문의 기록된 내용으로 보아 사사시대에는 다시 가나안의 손에 넘어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후에 왕상 9:15에 솔로몬이 하솔에 성읍을 재건하기도 했고, 앗수르의 다글랏빌레셀에 의해 멸망됩니다(왕하 15:29). 야빈은 ‘총명함, 지식있는 자’란 뜻으로 여호수아 11장에 등장하는 하솔의 왕의 이름과 동일합니다. 학자들은 ‘아비멜렉’이 블레셋의 왕을 지칭하고(창 26:8), ‘바로’가 애굽의 왕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호칭이었던 것처럼 ‘야빈’도 하솔을 수도로 해서 다시리는 가나안 왕의 상투적인 칭호라고 주장합니다.

2절,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 “하로셋”은 ‘숙련된 기술자, 공교한 장인’이란 의미로 그 이름 자체가 시스라의 철병거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로셋’은 철이 생산되는 곳이었으며, 동시에 여기에서 생산되는 철을 가지고 숙련된 기술자들이 여러 철로 된 제품들을 만들었기 때문이비다. 이 지역은 오늘날의 ‘하이파(Haifa)’의 남동쪽에 위치한 ‘텔 엘하바리(Tell el-Habari)’ 또는 므깃도의 북서쪽에 위치한 ‘텔 아므르(Tell Amr)’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학고임”은 ‘이방’이란 뜻의 ‘고이’의 복수형으로 성경에서는 ‘열방, 열국, 민족’이란 뜻으로도 사용되곤 합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시스라가 거주했던 ‘하로셋’을 수식하는 말이기 때문에 이방의 여러 나라들을 지칭하는 말로 보기는 어렵습니다(옛 한글성경은 “이방”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학고임’을 이방으로 번역하지 않고 지명을 의미하는 특정한 지역으로 주장합니다. 그래서 NIV 성경은 히브리어를 음역하여 ‘Haggoyim’으로 번역하고, RSV, LB 영어성경은 ‘Ha-goiim’으로 번역합니다. 또한 당시 가나안은 도시 국가들의 동맹체제였으므로 시스라는 동맹국의 왕 야빈의 통치하에 있던 ‘고임의 하로셋’을 위임 통치하던 방백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즉 북부 가나안 지역에 야빈은 가장 강력한 도시 국가 하솔의 왕이며 동맥국들을 대표하는 왕이었고, 시스라는 동맹국들 중에서 강력한 군대를 소유한 지도자로 생각되어집니다.

3절,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한글 성경의 번역은 원문을 번역하는 학자들의 생각과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을 직역하면 “그에게 속한 칠병거 구백대가 있기 때문이다” 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주어가 “야빈”으로 되어 있지 않고 인칭대명사 “그에게”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칭대명사는 앞에 나오는 사람을 받아서 남성,여성이나 격을 표현하게 됩니다. 그런데 2절에 나오는 사람은 먼저 야빈이 나오고, 다음에 시스라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3절에 앞에 나오는 사람을 받는 ‘그 남자”라는 3인칭 남성 인칭대면사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야빈보다 시스라가 더 가까이 있기 때문에 3절을 번역할 때에 ‘야빈의 철병거 구백대’보다는 ‘시스라의 철병거 구백대’가 더 접합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본장의 7절, 13절의 기록을 참조할 때에도 야빈 보다는 시스라의 철병거라고 보는 것이 더 근거가 있으며, 시스라가 있던 ‘하로셋 학고임’이 철이 생산되고 가공했던 도시이기에 시스라의 철병거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4-10, 여선지자 드보라와 바락]
여호와께서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 사사로 세우시니 그녀가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에 거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재판함으로 사사의 직무를 수행합니다. 드보라 선지자가 납달리 게데스에 있는 바락을 불러 납달리와 스불론 지파 일만 명을 이끌고 다볼산으로 출전하라고 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야빈 왕의 군대 장관 시스라의 군대를 기손강으로 유인에 바락의 손에 붙여 멸하실 것이라고 계획을 알립니다. 바락이 드보라의 동행을 조건으로 출전을 수락하지만, 바락은 영광을 얻지 못하고 그 영광이 한 영인에게 돌아갈 것임을 드보라가 예언합니다. 드보라가 바락, 그리고 일만명의 군사들이 기손강의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 게데스로 모입니다.

4절,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 “랍비돗”이란 말은 ‘횃불, 번개’란 뜻으로 학자들마다 사람의 이름으로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고, 지명으로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으며, 6절에 등장하는 “바락”이란 인물의 이름 뜻이 “랍비돗”과 같은 ‘번개’라는 뜻이 있으므로 “랍비돗과 바락”을 동일 인물로 보거나, 또는 좀 더 심하게 진보적인 학자는 랍비돗은 지명이고 바락을 드보라의 아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주장들이 근거가 충분히 뒷받침되지 못하므로 그냥 일반적으로 본문의 해석처럼 “랍비돗의 아내 드보라”라고 번역하는 경향이 가장 많은 해석입니다. “드보라”의 이름의 뜻은 ‘꿀벌’ 이라는 의미로 여자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으로 볼 수 있겠지만, 구약에서 미리람(출 15:20), 훌다(왕하 22;14)와 같이 여성들이 국가의 공식적인 지도자의 반열에 올라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던 사례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드물지만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일입니다.

5절, “에브라임 산지 라마”: ‘높은 곳’이란 의미를 지난 “라마”는 구약 성경에 각기 다른 지역의 동일한 이름으로 6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베냐민 지파의 성읍(수 18:25)으로 예루살렘 북쪽 8km 지점으로 현재의 에르람(er-Ramieh)으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둘째는 아셀 지파의 경재에 있던 성읍(수 19:29)으로 두로에서 동남쪽으로 20km 지점에 위치한 현재의 에르라미에(er-Ramieh)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셋째는 납달리 지파의 성읍(수 19:36)으로 갈릴리 바다 서북쪽에서 약 18km 떨어진 현재의 에르라메(er-Rameh)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넷째는 남방에 있는 시므온 지파의 성읍(수 19:8)으로 ‘라못’(삼상 30:27)과 동일한 곳입니다. 다섯째는 길르앗에 있는 성읍(왕하 8:29)으로 길르앗라못(왕상 4;13)과 동일한 곳입니다. 마지막으로는 본문의 ‘라마’는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성읍으로 사무엘의 고향인 ‘라마다임소빕’(삼상 1:1)과 동일 지역입니다. 이곳은 사무엘과 그의 부모가 살았고, 그가 제단을 쌓았으며, 현재의 렌티스(Rentis) 지역으로 추정되는 지역입니다.

5절, “벧엘”: ‘하나님의 집’이란 뜻으로 원래 이름은 ‘루스’(창 28;19, 수 18:13) 입니다. 가나안 정복 후 벧엘은 베냐민 지파에 할당되었으며, 베냐민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의 경계가 되었습니다(수 16:1-4, 18:11-13). 후에 사무엘 선지자의 활동 중심지가 되며,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관된 곳입니다(삼상 7:16, 10:3). 드보라가 거했던 라마와 벧엘 사이의 지역은 사사 시대 이후에 이스라엘의 영적, 행정적 중심지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5절,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한글성경 “거주하였고”로 번역된 히브리어 “요쉐베트”는 ‘거주하다, 살다’라는 의미보다는 ‘앉다(sit down)’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에 집을 짓고 살았다기 보다는 그곳에 사사로서 일할 공적인 장소를 설치하여 의자에 앉아 사법과 행정의 직무를 행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히브리 용법은 잠시 앉아 있어서 직무를 행한 뉘앙스가 아니라, 계속 앉아서 직무를 수행함을 나타내므로 “드보라의 종려나무”는 나무를 드보라가 심었다고 보거나, 집을 짓고 살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나무 아래 앉아서 재판하는 사사의 직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붙여진 표현이라 볼 수 있습니다.

6절,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납달리 지파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은 가나안 북부의 갈리리 서부 지역입니다. “게데스”(히, 케데쉬)는 ‘성소’란 뜻을 지닌 지명으로 이스라엘 땅에는 3곳의 동일 지명이 나옵니다. 본문의 지명은 북부 갈리릴의 구릉 지대에 위치한 가나안의 성읍이었으나(수 12:22), 여호수아가 점령한 후 납달리 자손에게 분배된 곳으로(수 19:32) 도피성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수 20:7). 현재의 훌레 호수(Lake Huleh) 북서쪽에 위치한 ‘텔 카데스’(Tell Qades)’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드보라가 위치한 곳은 가나안 땅 중남부에 위치한 에브라임 지파의 지경이며 납달리 지파의 거주지와는 상당히 먼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드보라가 바락을 부른 것은 야빈과 시스라에 의해서 가장 직접적이고 심하게 학대를 받았던 지파가 납달리와 스불론 지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드보라는 두 지파의 자손 가운데 일명 명을 뽑아 싸우라고 한 것입니다. 에브라임을 중심으로 활동한 드보라가 납달리 지경의 사람을 부른 것으로 보아 당시 그녀는 이스라엘 전체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던 큰 영향력을 가진 사사라고 생각됩니다.

6절, “다볼산으로 가라”: “다볼산”은 ‘채석장, 산당’이라는 의미가 있으면 해발 약 500m 정도의 산입니다. 드보라가 다볼산으로 가라고 명한 이유는 이러한 산지에서는 시스라의 철병거가 아무래 두려운 당시의 전략적 무기라 할지라도 그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고대의 병거는 평지에서 강력한 전략적 효과를 발휘하는 무기이며, 평지가 아닌 곳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더우기 다볼산의 뜻이 ‘채석장’이라는 뜻이 있은 것으로 보아 마차 스타일의 병거가 마음껏 달리기에는 힘겨운 돌들이 많은 거친 땅으로 추정되는바 다볼산을 전쟁터의 거점으로 활용하는 것은 매우 지혜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군인 일만명이 집결해 있어도 야빈과 시스라의 철병거가 공격할 수 없는 전략적 거점이기 때문입니다.

7절, “기손강”: “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할”은 ‘골짜기, 시내’라는 말로도 번역되어 사용되곤 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 물이 풍부하여 계속적으로 흐르는 강을 뜻하는 말은 주로 “나하르, 에호르”가 사용되는 반면, 본문의 “나할”은 주로 우기에만 급류의 강을 형성하고 건기에는 마른 강바닥을 드러내는 팔레스타인 지역 특유의 ‘와디(wadi)’를 가리키는 강을 뜻합니다. 기손강은 갈멜산과 다볼산에서 발원하여 이스르엘 골짜기와 에스드렐론 평야, 악고 평원을 거쳐 지중해로 흘러들어가는 강이지만, 강물은 거의 우기때만 보이기에 건기에는 마른 골짜기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기손강을 전투지역으로 삼았습니다. 기손강의 하류는 넓은 평원을 이루었기 때문에 건기에는 철병거를 배치하는데 최고의 적당한 지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히려 그러한 지형을 이용하여 시스라가 철병거를 운용하는 전투 지형으로 택할 수밖에 없게 하셨고, 그 후에 비를 내리어 그 철병거가 강바닥에 빠져 움직히지 못하여 마음대로 운용할 수 없도록 무력화시킨 것입니다(삿 5:4, 21).

6절과 10절, “만 명”: 이 단어의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일만 남자 사람”이란 뜻입니다. 히브리어 “이쉬”는 여자와 비교할 때 사용되는 ‘남자’라는 뜻과 짐승과 비교할 때 사용되는 ‘사람’이라는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즉 “남자 사람”이란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사기에는 잘 훈련되었으며 전쟁과 훈련에 익숙한 군인을 가리킬 때에 “용사(히, 낍보르)”라는 말이 종종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시스라의 철병거와 군대를 “용사”(삿 5:13)라고 지칭하고 있으며, 기드온의 300명의 사람들도 “용사”라고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납달리와 스불로의 일만명에 대해서는 ‘용사’라는 말이 붙여져 있지 않습니다. 즉 그들은 일만명이지만, 오합지졸의 남자 사람들로 군사력도 형편 없고, 훈련되지 못하고 준비되지 못한 숫자에 불과한 동원된 사람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람들을 통해서 승리로 이끌어 가심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묵상 및 적용]
하솔 왕 야빈이 누구입니까? 그는 이스라엘을 20년 동안이나 압제한 자이며 고대 시대에 가장 강력한 무기라 할 수 있는 철병거 900대를 보유하고 있는 절대 군주였습니다. 철병거란 오늘날의 중무장 탱크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에 국군이 수도 서울을 빼앗기고 전장에서 한없이 후퇴할 수 밖에 없었던 전략적 무기가 바로 북한군이 소유한 탱크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강력한 무기를 소유한 하솔 왕 야빈의 상대자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사는 바로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이나,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의 기대와 상상을 초월한 방법으로 나타날 때가 있음을 종종 보게 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바로 그 한 예가 됩니다.

강력한 압제자를 물리쳐 달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었는데 하나님의 응답은 겨우 한 명의 여선지자를 사사로 내세우신 것입니다. 그것도 한 남편의 아내를 말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어찌 실망스럽지 않겠습니까? 연약하기 짝이 없는 한 명의 여성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에 이것이 어찌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응답을 받았다면 과연 하나님의 응답에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응답하시는 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살펴 보면,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왕 바로의 폭정에 견딜 수 없어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에 백만 대군을 이끄는 군대와 용맹한 장군을 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팔십 세 되는 노인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그것도 달랑 지팡이 하나만 들려서 말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공중 권세를 잡고 세상을 움직이려는 야욕을 가진 사탄으로 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 예수님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세상적 기준이나, 일반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 분은 정말 보잘 것 없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말구유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었던 보잘 것 없는 집안의 아기로 오셨습니다. 집안은 저 북쪽 지방 변두리에서 자란 목수의 아들이요 주목받지 못할 수밖에 얺는 환경에서 자란 청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노인과 평범한 목수의 아들을 통해서 출애굽을 일으키셨고, 역사상 유례없는 이적과 기적으로 온 인류를 죄와 사망으로 부터 구원하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역사에는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뚜렷한 사실이 보여지고 있는데, 바로 그 역사의 주체자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속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가 등장합니다. 본문 7절에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 등장하는 “내가”로 등장하는 분은 바로 드로바를 사사로 세우시고, 바락으로 하여금 일만 명을 이끌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입니다.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그 전쟁에 개입하실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만 명의 사람들을 이끄는 바락이라는 인물은 무언가 자신이 없어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는 드보라 여선지자에게 요구하기를 8절에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이라고 동행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 신속하고 적극적인 순종을 보이지 못하고 주저함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야빈 왕과 시스라의 군사력을 고려해 볼 때에 이러한 주저함과 연약함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일만 명의 사람들은 “용사”로 구분되는 야빈과 시스라의 군대와 비교해 볼 때 무기로 보나, 군사력으로 보나 수준 차이가 너무나 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 인간적인 눈으로 상황을 판단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삼상 17:47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라고 다윗이 고백했듯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열세인 상황이나 어려운 고비라 할지라도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러한 바락의 부족한 믿음과 주저함은 삿 4:9, 22, 삿 5:24에 기록되어 있듯이 모든 승리의 영광을 ‘야엘’이라고 하는 한 여인에게 빼앗기는 결과로 이어지고 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본문 7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이끌어” 가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관하시는 은혜에 의해 상황을 움직이시며 바꾸시는 분입니다. 다볼 산에 일만 명이 집결했습니다. 하지만 결코 놓지 않은 500m 정도의 다볼 산은 아무리 강력한 철병거 900대가 있어도 공격할 수 없는 곳입니다. 당시의 철병거는 고지대를 공격하기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일만 명이 기손 강으로 내려 옵니다. 아마 그 때에 시스라는 ‘바로 이때다!’라고 무릎을 치며 공격할 찬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에 최고의 찬스가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심으로 최악의 때가 되고 맙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상황을 “이끌어” 가시는 주관자이십니다.

전쟁과 훈련에 익숙한 시스라의 군대, 용사들을 바락의 믿음의 연약함과 주저함에도 불구하고 승리하게 만드십니다. 즉 전쟁을 주관하시며 친히 싸우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용사는 아니지만 깨지고 부서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 연약한 자를 통해서 위대한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씀처럼 구원은 사람의 힘에 달여 있지 않고 오직 여호와께 달려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응답이나 역사가 우리 수준의 상식과 기대를 훨씬 초월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순종과 믿음” 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지만 오랫동안 방주를 만드는 “믿음의 순종함”을 보여 주어야 방주를 통해 구원을 이루는 역사의 산 증거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모든 구약의 믿음의 선조들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따라 때로는 고난의 길을, 때로는 힘든 길을 걸어야 했지만 구원의 길을 이루기 위해 그에 합당한 “순종의 행위”를 보여야만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야빈의 압제를 제압하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하에 여선지자 드보라의 명을 따라 “믿음과 순종”으로 행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를지라도, 역사의 변혁이 일어나 세상이 경천동지할 일들이 몇번이나 일어 났어도, 그리고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몰려 온다 할지라도 변함없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손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순종함”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전형적인 모습이며, 변함없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믿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고 행하는 “순종”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지켜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로 인하여 여전히 힘들어 하는 가난한 자들과 고아와 세상의 연약한 자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는 미국 땅에 있어서 백신을 맞는데 아쉬움이 없지만, 백신접종을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지구촌 곳곳에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리라’ 믿음으로 다짐하며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님들을 지켜 주옵소서. 믿음으로 헌신하고, 순종으로 따라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지켜 주시며, 가나안의 야빈과 시스라를 물리치셨듯이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들이 승리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먼저 생명을 바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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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왜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짓게 하셨을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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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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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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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6
소금의 세가지 기능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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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의 세 가지 기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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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4
소금의 세 가지 기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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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3
소금의 세 가지 기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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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소제(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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