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나눔

오늘의 말씀묵상 8/5/2021 목요일 [사사기 1장 22-36절]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8-05 09:39
조회
326

8. 5. 목요일. 오늘의 말씀묵상

찬양링크 “물 위를 걸어오라”: https://youtu.be/2uVOd_CZtwk

[본문: 사사기 1:22-36]
22.요셉 가문도 벧엘을 치러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23.요셉 가문이 벧엘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루스라
24.정탐꾼들이 그 성읍에서 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청하노니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보이라 그리하면 우리가 네게 선대하리라 하매
25.그 사람이 성읍의 입구를 가리킨지라 이에 그들이 칼날로 그 성읍을 쳤으되 오직 그 사람과 그의 가족을 놓아 보내매
26.그 사람이 헷 사람들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 그것의 이름을 루스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 곳의 이름이 되니라
27.므낫세가 벧스안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다아낙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돌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이블르암과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과 므깃도와 그에 딸린 마을들의 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
28.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29.에브라임이 게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족속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주하였더라
30.스불론은 기드론 주민과 나할롤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그들 중에 거주하면서 노역을 하였더라
31.아셀이 악고 주민과 시돈 주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32.아셀 족속이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니 이는 그들을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33.납달리는 벧세메스 주민과 벧아낫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나 벧세메스와 벧아낫 주민들이 그들에게 노역을 하였더라
34.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35.결심하고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주하였더니 요셉의 가문의 힘이 강성하매 아모리 족속이 마침내는 노역을 하였으며
36.아모리 족속의 경계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위쪽이었더라

[본문이해]
[22-26, 요셉 족속의 벧엘 정복]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요셉 가문이 원래 이름이 루스인 벧엘을 치러 올라가기 전에 먼저 정탐꾼을 파견합니다. 정탐꾼이 한 벧엘 사람에게 선대할 것을 약속하고 벧엘 성읍의 통로를 알려 달라고 합니다. 요셉 족속이 그 성읍의 통로를 통해 벧엘을 쳐서 정복하고 오직 통로를 알려 준 사람과 그의 가족만을 놓아줍니다. 살아남은 그 사람은 헷 사람의 땅으로 이주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벧엘의 이름을 따서 루스라고 명명합니다.

22절, “요셉 가문”: “가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트”는 ‘집, 가문’이라는 의미로서 요셉 지파는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지파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자손, 아들(히, 벤)”이나 “지파(히, 맛테)”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남쪽을 분배받은 유다, 시므온, 베냐민 지파의 뒤를 이어 북쪽 지역을 받은 지파 중 중심 지파인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즉 요셉 가문이 정복전쟁을 수행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22절, “벧엘”: 집을 의미하는 “베트”와 하나님을 의미하는 “엘”의 합성어로 “하나님의 집”이란 뜻입니다. 야곱이 밧단 아름으로 가는 도중 꿈에 하나님을 만난 곳을 ‘벧엘’로 이름 지은 데서 유래된 지명입니다(창 28:17-19). 예루살렘 북쪽 약 20km, 여리고에서 서쪽으로 약 25km 지점으로 해발 약 1000m에 달하는 고지대의 전략상 요충지입니다. 고고학적으로 볼 때에 벧엘은 BC 23세기 이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한 흔적이 발견되는 유서 깊은 성읍으로 매우 융성하고 견고한 성읍이었으므로 요셉 가문이 정탐꾼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벧엘을 치러”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히브리 성경에는 “치러”라는 말은 없고, “올라가다”라는 말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는 고지대이므로 벧엘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히브리 성경에 ‘올라가다’라는 단어로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22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시니라”: 히브리 성경은 “그와”로 표현되어 있지 않고 복수인 “그들”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는 요셉 가문이 므낫세와 에브라인 두 지파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전투에 앞서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다”라는 말이 표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벧엘 전투를 제외하고 많은 전투에서 여러 지파들이 만족스럽지 못하거나, 실패하거나, 가나안 사람들과 함께 거주하는 결과로 그칩니다. 당연히 승리이어야 함에도 이렇게 끝나는 의문점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과 죄악상에 대해 2장에 기사를 통해 해명됩니다.

23절, “루스”: 이 단어의 의미는 ‘편도나무’라는 뜻이 있으므로 루스에는 이런 나무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루스라는 이름을 야곱이 벧엘로 바꾸어 부른 것이지만, 원래 이 지역에 사는 원주민들은 야곱이 명명한 이름 ‘벧엘’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리라 추측됩니다. 그 이유는 본문에 나오는 가나안 사람이 헷 사람의 땅으로 이주하여 성읍을 짓고 ‘루스’라고 명명한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24절, “성읍의 입구…네게 선대하리라”: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출입하는 성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읍으로 몰래 들어갈 수 있는 길”, 즉 비밀통로와 같은 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현대어 성경은 이를 “성읍으로 몰래 들어갈 수 있는 길”이라고 의역하고 있습니다. 성읍의 입구를 가르쳐 준 사람에게 선대하는 경우는 여리고 성이 무너지기 전에 정탐꾼들을 도운 라합과 비슷한 면이 있지만, 중요한 차이점은 기생 라합은 여호수아 2:11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고백한 여인이었지만, 본문의 벧엘 성읍의 사람은 그런 고백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섞여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성읍을 재건하고 자기 부족이 사용한 ‘루스’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다른 신앙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대한 것은 약속을 지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가나안 족속을 완전히 멸하거나 쫓아 내라고 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의 측면이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25절, “그의 가족”: 가족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파호토”의 원형 “미쉬파하”는 한 명의 가장을 중심으로 하는 일반적인 가족이 아니라, 가족 보다는 범위가 큰 ‘씨족(clan)’ 혹은 ‘종족(extended family)’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부모와 아내, 그리고 자녀들로 구성된 소수의 인원만이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규모를 가진 씨족이 살아남았다는 의미가 됩니다.

26절, “헷 사람들의 땅에 가서 성읍을 건축하고…루스라 하였더니”: 정확한 지역은 알 수 없지만 헷 사람들의 땅은 갈릴리 호수 서북쪽 수리아 지역입니다. 자기 고향을 떠나 헷 사람의 땅으로 가서 그곳 어느 한 지역에 성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자신이 이전에 살던 곳이 ‘루스’란 지명을 따라 그대로 부른 것은 자기 고향의 정체성을 계속 이어 나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7-36, 여러 지파들이 분배 받은 땅에서 정복에 실패함]
요셉 가문의 므낫세 지파가 분배 받은 땅에서 가나안인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못합니다. 스블론 지파, 아셀지파, 납달리 지파가 가나안 주민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못했으며, 그들과 함께 거하거나 가나안인들이 각 지파에 거하면서 노역을 하게 됩니다. 단 지파는 오히려 아모리 족속에 의해 산지로 쫓겨나기까지 하였으며, 요셉 가문이 강해지자 비로소 노역을 하게 되었으나 아모리 족속은 단 지파와 경계를 두고 거주하게 됩니다.

사사기 1장 21-36절까지에 이스라엘이 가나안 거민들을 완전히 진멸하거나 쫓아내지 못함으로써 그 가나안 거민들이 이스라엘 틈에 계속 거주하게 되었다는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게 된 원인은 물론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가나안 주민들을 완전히 제압할 정도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 약속에 대한 굳은 믿음과 진멸하라는 신명기 20:16-18의 명령을 지키려는 열의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지파들의 힘이 강성해졌을 때에는 가나안 부족들이 생존을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한 노역을 자처함으로 어려운 일들에 대한 편안함에 도취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과 같이 거주하게 됨을 스스로 용납하게 된 점도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가나안 사람들을 진멸하지 못한 결과 결국 죄의 유혹과 우상숭배에 빠져서 여호와를 떠나게 되었으며 그들 자손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상태까지 떨어져 이후 길고도 지루한 약 350년 동안의 영적 암흑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28절,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노역”이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마쓰”의 의미는 ‘정복당한 사람에게 부과된 특별히 무거운 강제 노동이나 징병’을 뜻합니다. 따라서 가나안 족속에게 강제 노동을 시켰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서 하나님의 명령, 즉 가나안 사람들을 완전히 추방하라는 명령을 지키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충분히 쫓아 낼 수 있을 만큼 강해진 후에도 그들을 쫓아내지 않았다는 점은 엄밀하게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33절, “벧세메스 주민과 벧아낫 주민”: ‘집’을 뜻하는 “벧”과 ‘태양’을 뜻하는 “세메스”가 결합된 지명으로 “태양의 집”이란 의미입니다. 이곳은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던 태양신의 신전이 있던 도시로 추정되며 갈릴리 호수 남쪽 약 3km 지점으로 추정됩니다. “벧아낫”은 “아낫의 집”이란 뜻으로 아낫의 신전이 있는 우상 숭배의 본산지이며 벧세메스와 더불어 이스라엘이 반드시 파괴했어야 할 성읍들입니다. 그러나 납달리 지파는 이러한 우상 숭배의 주요 거점 도시를 진멸하지 않음으로써 가나안의 타락한 종교가 그들 안에 들어오게 되는 단초를 남기게 된 것입니다.

35절, “요셉의 가문의 힘이 강성하매”: 아모리 족속에게 밀려 자신들이 분배 받은 지경에 정착하지 못하고 산지로 밀려난 단 지파의 비참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갑자기 요셉 가문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 이유는 단 지파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기업을 지킬 수도 없고 누릴 수도 없기 때문에 그 기업의 정복 사역이 다른 지파인 요셉 족속에게 넘어가게 된 비참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비참한 것은 요셉의 힘이 아무리 강성해졌다고 할지라도 노역을 시켰을 정도이며, 아모리 족속을 완전히 쫓아내기에는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35절에서는 단 지파는 물론 강성한 요셉 가문도 결국 성공하지 못한채 타협하며 현실에 안주하게 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묵상 및 적용]
우리 말에 ‘저미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 뜻은 ‘마음이 칼로 도려내듯이 몹시 아프고 고통스럽다’라는 의미입니다. 일상생활에서는 잘 쓰이지 않지만 글 속에서는 종종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가슴이 저미어 오는 상황의 언급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의 완전 정복에 실패하고 결국 사사 시대라는 영적 암흑기를 맞이하는 그 원인을 알 수 있는 내용들이 나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암흑기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본문의 중심으로 신앙적 “안일함과 불신앙”의 측면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신앙적 “안일함”을 묵상하려고 하니 코로나로 인하여 팬데믹이 지속된 이후 우리들이 처해 있는 상황과 매우 비슷한 면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 상황, 그리고 그에 관한 수많은 뉴스와 매스컴의 보도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음으로, 또는 양으로 지쳐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점점 마스크 쓰기, 손 씻기, 스스로 사회적 거리 두기, 스스로 주의하기 등등이 포기되거나 부주의하게 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더욱이 확진자는 다시 늘어 간다는 뉴스를 접하면서도 사망자와 사망률은 줄어든다는 보고에 더더욱 느슨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느슨해지고 부주의해지는 경향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대하는 사회의 모습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 가운데에도 비슷한 경향 생기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들의 상황을 설문 조사했더니 ‘예배 참석률이 현저하게 줄었다’, ‘참석률이 75%에서 점점 떨어지고 있다’, ‘교회를 떠나거나 신앙을 떠난 사람들이 몇 십%에 이른다’ 등등으로 미국 및 한국에서 조사 결과가 속속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보고가 나타나는 결과를 분석하여 원인을 말하는 글들 속에서 간과할 수 없는 하나의 이유가 바로 “편안함과 안일함” 입니다. 집에서 온라인 예배에 접속했더니 ‘편안했다’는 것이며, 때로는 예배를 드리지 않고 지나쳐도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는 것에 대한 신앙적 ‘안일함’이 원인들 가운데 이유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고려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의 주민들과 생명을 건 전쟁을 치루어야 했으며, 그들을 모두 쫓아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상태를 알 수 있는 표현을 성경은 기록하기를 “쫓아내지 못했고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다”라는 말씀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의 표현이 담고 있는 것은 그들의 “편안함과 안일함” 입니다. 전쟁을 치룬다는 것은 피를 흘려야 하며, 생명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편안함’과는 전혀 가까워질 수 없는 삶의 상태입니다. 더욱이 고대 사회에 있어서 전쟁은 오늘날의 전쟁과는 인간 존엄성이나 잔혹성에 있어서 훨씬 더 심했습니다. 그러므로 전쟁이 담고 있는 상황의 심각함이나 그 무거움이 얼마나 엄중한지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은 뼈에 새겨질 정도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직접 겪지 않았던 세대들도 결코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전쟁을 치루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거나 상황과 타협하고 맙니다. 결국 “편안함”을 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또한 거주지를 잃고 쫓겨나야 했던 가나안 사람들이 고단하고 힘든 ‘노역’을 해 준다고 했을 때 그들을 용납하여 함께 사는 것을 허용하는 것도 결국은 “편안함”을 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편안함”을 택한 이스라엘의 신앙적 모습은 사사시대를 거치면서 “신앙적 안일함”으로 점점 뒤바뀌게 되고 결국에 가서는 “불신앙”이라는 완전히 다른 색깔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바뀌어진 그 신앙의 색깔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가나안 땅의 정복 전쟁 초기에는 여호수아와 함께 성공하였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의 사후에 치루어진 각 지파의 정복 전쟁들은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점점 실패하게 됩니다. 사람은 실패가 왔을 때 그냥 좌절하거나, 아니면 다시 도전 의지를 갖거나, 또 다른 반응은 자신의 상황에 맞게 ‘자기 합리화’를 하곤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실패를 합리화하여 “타협을 통한 생활의 안주함”으로 탈바꿈시키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절대 신앙으로 불경건한 이방 민족들을 전도하여 감화 시키리라’라고 확신했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불신자와 결혼을 하는 청년이 “결혼하게 되면 전도하리라”라고 다짐하지만 많은 경우 그 일에 실패하는 사례들이 다반사인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쫓아내지 않고 적당히 노역을 시키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게 하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일은 철저하게 실패하고 맙니다. 결국 사사시대를 통해서 보여주는 영적인 암흑기는 “육신의 편안함과 신앙적 안일함,” 그리고 결과적으로 도달하게 된 불신앙이 만들어낸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생명을 거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은 현세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세를 바라보면서 현세를 살아 갑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거는 단호한 결심이 없으면 우리 안에 세속화되려는 경향이 있는 죄를 제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29-30에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라고까지 매우 단호하고 두렵게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편안함과 안일함을 추구하고, 탐욕에 취하면 믿음의 선한 싸움의 현장에서 우리의 발목이 잡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와 타협하는 것은 결국 죄의 지배를 받는 첩경, 지름길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적당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고, 세상과 타협하여 신앙생활을 하려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은 가나안 주민들을 선대한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신앙적 편안함과 안일함은 불신앙으로 이어지고 영적 암흑기에 이르게 되는 참담한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사시대의 기록을 통해서 주고 있는 교훈은 우리 시대에도 변함없이 똑같이 적용됩니다. 사사시대 이스라엘의 실패를 거울 삼아 신앙적 편안함과 안일함을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적극적으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신앙의 영적 전투 현장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기 위하여 무엇을 버려야 할지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승리를 이루신 예수님!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일에 비범한 군사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인간은 나약하나 주를 의지하는 사람은 강하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경험하게 하옵소서. 영적 교만함을 떨쳐 버리고 이기적인 신앙을 벗어 던지고 겸손으로 세상을 이기신 주의 도를 따르는 제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주를 믿는 것이 나를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희생하신 주의 도를 따라 우리들도 희생과 헌신으로 무장된 십자가의 군사들이 될 수 있도록 성령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영전 전투 현장에 가장 앞서서 달려 가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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