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나눔

오늘의 말씀묵상 8/6/2021 금요일 [사사기 2장 1-10절]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8-06 09:18
조회
789

8. 6. 금요일. 오늘의 말씀묵상

찬양링크 “영원한 사귐으로”:

[본문: 사사기 2:1-10]
1.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2.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3.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4.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5.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6.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들의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
7.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8.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9.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10.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본문이해]
[1-5,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한 책망과 통곡]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일들과 언약과 명령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린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책망하면서 그들에게 임할 화를 선포합니다. 여호와의 사자의 책망과 임하게 될 징계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울며 회개하며 보김에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립니다.

1절,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에 첫발을 내디딜 때 처음 언급되었던 지역(수 5:10)으로 요단강 하류 지역이며 해수면보다 낮은 지역입니다. 보김은 유대의 산악 지역에 위치한 고지대의 성읍으로 ‘울다, 통곡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에서 유래된 말로 “통곡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지명입니다.

1절, “여호와의 사자가…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들어가게 하였으며…어기지 아니하리리”: 본절에 주어로 등장하는 “여호와의 사자”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하신 제2위 성자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원래 “사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말르아크”는 “대리로 파견된 자, 심부름꾼, 전령, 천사” 등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가 전령으로서의 천사라면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라는 식의 직접화법으로 표현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너희를…”라고 표현하여 하나님을 주어로 표현하고, 자신은 전령으로서 역할만 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출애굽 사건이나 가나안 땅 입성이나 언약을 지키는 일에 주어를 “내가”라고 표현하므로 자신이 그 일의 주체가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본문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사자가 성자 하나님임을 보여줍니다(참고로 구약 성경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하여 나타나신 제2위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성경에 종종 표현되어 있습니다).

1절,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히브리어의 부정 금지 명령에는 두 가지 단어가 사용됩니다. 하나는 “로”의 금지 명령이고, 다른 하나는 “알”이라는 금지 명령입니다. 본 문구에서 “언약”과 관련되어 사용된 말에는 “로”의 부정 금지명령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로”의 금지 명령은 “알”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욱 절대적이고 영구적인 성격의 금지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어기지 않겠다는 맹세의 약속을 하면서 강력한 금지 명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 “단들을 헐라”: “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즈뻬호테헴”은 ‘동물을 살륙하여 제물로 드리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자바흐”에서 유래된 말로 제물을 드리는 단입니다. 즉 가나안 사람들이 그들의 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단으로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의 문화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염되지 않도록 단을 헐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들과 언약을 맺고 그들과 교류하면서 지내게 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어렵게 될 것이며, 결국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 앞에 나아가 절하며 섬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절,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니리”: 본 문구의 히브리 성경은 하나님의 감정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쫓아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까라쉬”는 문법적으로 강의 능동형인데 이는 말하는 주체자의 강력한 결의와 의지를 나타내며, 발음할 때에도 격하게 발음하도록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거친 호흡으로 마치 귀에 들리도록 말씀하심을 표현하며, 동시에 절대적 부정을 나타내는 “로”의 부정 금지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직역하면 “결코 내가 그들을 쫓아내지 않을 것이다”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단호한 결의가 들어 있는 선언적 문구입니다.

3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원문 히브리어 성경에는 “가시”에 해당하는 의미는 없습니다. 직역하면 “그들이 너희에게 옆구리(또는 옆을)를 향하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의 뉘앙스는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사실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영어 성경이나 번역성경들은 “가시”라는 말을 삽입하여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민수기 33:35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라는 표현과 여호수아 23:13 “너희의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의 눈에 가시가 되어서”라는 표현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옆구리에 ~가 된다”라는 표현이 주로 해가 되는 내용으로 연관되어 경고 되어진 바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옆(또는 옆구리)에 ~이 될 것이다”라는 말만 들어도 가시와 같은 해가 되는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으로 추정하여 ‘가시’라는 표현을 추가하게 된 것입니다. (영어성경 RSV는 히브리 사본들 중에 한 사본을 채택하여 이를 ‘가시’로 의역하여 번역하지 않고 ‘대적자’로 보아서 ‘they shall become adversaries to you 그들이 너희에게 대적들이 될 것이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3절, “올무”: 이는 사냥꾼이 새를 잡기 위해 놓은 미끼를 달고 있는 덫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이와 같이 가나안 주민들이 섬기는 신들이 이스라엘에게 덫이 되어 그들을 옴싹달싹 못하게 붙잡는 덫이 되어 멸망하게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5절,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백성들이 여호와의 사자의 말을 듣고 통곡하여 울고,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완전한 회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통곡과 제사가 일시적인 회개를 동반하여 하나님께 드린 제사로 보여 지는 이유는 11절 이하에 우상숭배의 빠지고 마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6-10, 여호수아의 죽음 전후의 이스라엘의 상황 변화]
여호수아가 생존했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각 지파에게 할당된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여호수아의 생존시와 여호와의 큰 역사를 보고 경험한 장로들은 여호화를 섬겼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그의 지도를 받던 세대들이 죽은 이후, 다음 세대들은 여호와와 그 분이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여호수아 23, 24장의 여호수아의 고별 설교의 내용을 정리하면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끝까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가나안 정복을 완수하여 그 땅에 정착하라는 것이며, 둘째는 그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 만을 섬기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둘 중 어느 것에서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를 본문은 표현하기를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6-9절의 내용은 여호수아 24:28-31절의 내용과 약간의 사소한 차이점만 있을 뿐 대부분의 내용이 비슷합니다. 이는 저자가 여호수아서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한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미 삿 1:1에서 여호수아의 죽음을 언급했는데 다시 삿 2:6-9에 언급한 이유는 여호수아서와의 연결을 시도하는 것이며, 또한 사사기의 시대적 배경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8절, “여호와의 종”: 이 단어의 히브리어 “에베드 예흐와”는 구약 성경에 총 19번 사용되는데 그 중에 17번은 모세를 칭할 때 사용되었고, 나머지 두번은 여호수아를 칭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명칭은 주로 모세나 여호수아가 살아 있었을 때에는 사용되지 않고 죽은 후에 성경에 언급되었습니다.

9절, “딤낫 헤레스”: “딤낫”은 ‘부분’이라는 뜻이며, “헤레스”는 ‘태양’이라는 뜻으로 “태양의 부분(portion of the sun)”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곳은 세겜의 남서쪽 14km 쯤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으로 수 19:50, 24:30의 내용을 참조하면 여호수아가 자신의 특별 기업으로 구해 성읍을 세우고 자신의 소명을 다하고 죽은 후 장사 지낸 장소인 ‘딤낫 세라’와 동일한 곳으로 추정됩니다.

10절,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본 절의 “조상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보타이우”는 원래 ‘아버지’를 의미하는 ‘아브’의 복수형으로 직역하면 “아버지들”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돌아갔고”에 해당하는 “네에쓰푸”는 ‘모으다(gather)’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직역하면 “그들은 자신의 아버지들에게로 모였다” 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사후 세계에 대한 이런 관용적 표현은 사람이 죽은 후에 죽은 조상들과 다시 만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10절, “다른 세대”: 여기에 표현된 ‘다른’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헤르”는 질적인 차이를 반영하지 않는 ‘또 다른(another)’이란 의미가 아닙니다. 즉 히브리어 “아헤르”는 질적인 차이를 나타내는 ‘다른(different)’라는 뉘앙스가 있는 것입니다. 즉 새롭게 일어난 세대는 전세대와 시간적으로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본질적인 부분에서도 차이를 나타내는 전혀 다른 세대임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 차이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10절,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1절의 해설에서 히브리 단어의 부정에 대해서 설명했듯이 10절의 본문에 절대 부정을 표현하는 “로”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뉘앙스를 표현하면 “여호와를 절대로 알지 못한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런 절대 부정을 사용하므로 저자는 이스라엘의 다음 세대들이 여호와에 대한 그들의 무지가 얼마나 크고 깊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자녀 교육에 의하여 아마 그들은 부모의 지식적인 가르침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지식은 머리로만 들은 것으로 다음 세대의 생활 가운데서 경험하거나, 하나님을 철저히 알고 가슴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앙 교육의 실패의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묵상 및 적용]
이 시대는 ‘영적 전쟁의 시대’입니다. 인본주의를 근간에 두고 보일듯 말듯 진행되는 영적 전쟁은 문화의 영역에서 전쟁터의 전선을 형성하여 전개되곤 합니다. 그런데 사사기를 묵상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동일한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심각한 도전과 공격을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은 실질적인 물리적 전투였지만, 가나안 사람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못하고 함께 살면서 겪는 일들은 바로 영적 전쟁인 문화의 영역에서의 싸움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했다는 것은 결국 그들과 함께 살면서 문화적으로 교류하게 되어 동화되는 것이며, 그리고 그 속도는 가나안 사람들과 통혼하므로 더더욱 가속화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화에 “동화”된다는 것은 영적 전쟁의 측면에서 보면 전투가 가장 치열하게 이루어지는 최전선의 마지노선이 무너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현대 사회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고 상호 수용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다문화주의 사회입니다. 그러나 타문화에 대한 수용과 관용의 자세는 반드시 타종교에 대한 타협과 관용, 혹은 종교 혼합의 단계로 발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의 증거들은 역사의 여러 시대별 다문화 사회의 혼합의 사례들을 통해서 충분히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시대의 문화를 옳게 분별하고 그 문화를 변혁시켜 나가야 하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대의 문화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바르게 수용하지 못하거나, 또는 개혁이나 변혁을 일으키지 않으면 가나안 사람들과 혼합되어 문화적 침식을 당하여 하나님을 잊어 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시시대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철이란 무엇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소홀히 하고 말았습니다. 언약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언약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약을 안다는 것은 언약의 조약 내용 하나, 하나를 아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뼈대가 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뼈대는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즉 언약의 주체자가 되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여호수아와 함께 했던 세대의 사람들이 조상들에게로 돌아간 후에 사사기의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를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정말 안타까운 점은 여호수아 세대로부터 불과 한 세대를 지나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구원하여 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 등의 가나안 땅의 신들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한 세대가 지나지도 않았는데 “다른 세대”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다른 세대’가 되어 버릴 수 있습니까?

유대인의 자녀 교육법은 오늘날도 매우 유명한 교육 사례입니다. 이를 감안해 본다면 다음 세대는 부모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서 지식적인 가르침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지식은 머리로만 들은 것이며, 다음 세대들이 삶 속에서, 또는 생활 가운데서 경험한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가슴으로 받아들여서 안 것이 아니기에 실패의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아버지 세대가 경험한 출애굽의 기적과 이적을 듣고, 광야의 파란만장한 삶의 이야기를 듣고, 기적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도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경험하지 못하면 쉽게 다른 문화에 넘어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사사기는 보여 주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아는 것이 “다음 세대”에 연결되지 못하고 후손들이 ‘다른 세대”로 변질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변질된 다른 세대의 교훈은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죄악으로 치닫는 경향이 강한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아버지 세대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보면서 자란 세대들이라 할지라도 치열한 영적 전쟁의 현장인 이방 문화 속에 살면서 얼마나 쉽게 동화되어 버리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우리들의 실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생활 방식에게도 가나안 문화와 혼합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흡사한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며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지은 죄를 슬퍼하고 애통해하지만, 교회를 나서는 순간부터 다시 직장이나 비지니스의 현장으로 돌아가면 얼마나 많은 죄를 반복해서 범하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럼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문화와 그들의 삶의 방식으로 부터 얼마나 자유롭지 못했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사사시대에도, 그리고 21세기 오늘날에도 똑같은 점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이 너무 심하게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도구로 이 ‘악’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으며, 가나안 정복 전쟁은 단순하게 언약의 성취로서 약속의 땅을 주는 것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의 죄의 관영함을 심판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으로 인해 가나안 땅에 사는 그들에게 “옆구리의 가시”로 이방 민족을 그대로 남겨 두셨습니다. “옆구리의 가시”가 되는 가나안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악”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한 사회에 “악”이 존재하게 되면 그곳에 있는 구성원은 어떤 식으로든 ‘악의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은 결국 “악”이 있는 지역에 거주한다는 것이며, 그 결과는 “악”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걸음을 돌이켜서 전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 그 안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붙들고 있는 ‘죄악’의 자리에서 벗어나 문화적 침식을 끊어야 하며, 삶 속에 은밀하고 가만히 들어온 우상 숭배의 사슬을 끊어야 하며, 하나님 안에서 참된 자유인으로서 의를 행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편지한 말씀을 오늘 하루 묵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이 말씀이 오늘 하루 여러분의 삶을 인도해 가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격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세상의 구원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우리로 하여금 주의 발자취를 거침없이 따를 수 있는 용기와 단호함과 두려움 없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예수께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우리를 성령께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성령님 우리를 아버지께로, 예수께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삼위가 되시는 하나님과 사귐이 없이는 이 세상의 도전과 우리도 인식하지 모르는 사이에 침식해 오는 세상 문화의 세속화를 이길 수 없사오니 우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죄의 중보자가 되시고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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