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나눔

오늘의 말씀묵상 8/27/2021 금요일 [사사기 10:1-0]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8-27 07:54
조회
563

8. 27. 금요일. 오늘의 말씀묵상

찬양링크 “말씀하시면”: ">s

[본문: 사사기 10:1-9]
1.아비멜렉의 뒤를 이어서 잇사갈 사람 도도의 손자 부아의 아들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그가 에브라임 산지 사밀에 거주하면서
2.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이십삼 년 만에 죽으매 사밀에 장사되었더라
3.그 후에 길르앗 사람 야일이 일어나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니라
4.그에게 아들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성읍 삼십을 가졌는데 그 성읍들은 길르앗 땅에 있고 오늘까지 하봇야일이라 부르더라
5.야일이 죽으매 가몬에 장사되었더라
6.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리고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
7.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들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그들을 파시매
8.그 해에 그들이 요단 강 저쪽 길르앗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땅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쳤으며 열여덟 해 동안 억압하였더라
9.암몬 자손이 또 요단을 건너서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과 싸우므로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더라

[본문이해]
[1-2, 잇사갈 지파 출신 사사 돌라]
아비멜렉 후에 잇사갈 지파 부아의 아들 돌라가 하나님의 사사로서 일어나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으며, 에브라임 산지 사밀에 거하며 23년을 다스렸습니다.

1절, “돌라”: 히브리어 “돌라”의 뜻의 ‘벌레’라는 의미입니다. 한글성경에서 신 28:39에 ‘벌레’라는 뜻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본문에서는 사람의 이름이므로 히브리 발음 그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1절,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 본문에 “구원하다”는 히브리어는 “레호쉬아”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 동사의 기본형 “야솨”는 히브리어에서 상당히 비중있는 단어로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낼 때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에서 파생된 명사로 ‘구원’이란 의미를 가지는 어근이 같은 단어로는 ‘예수아”, ‘여호수아’, ‘호세아’, 그리고 ‘예수’가 있습니다. 히브리 문화 속에서 ‘야솨’가 의미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압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스라엘은 많은 압제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전쟁을 치루어야 했으며 이 때마다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였고, 구원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의미는 속박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방어적 의미의 ‘구원’을 가리킬 때는 성경에 ‘구원의 방패’(시 18:35), ‘구원의 옷’(사 61:10), ‘구원의 투구’(사 59:17) 등과 같이 보호를 나타내는 명사와 함께 사용되곤 합니다. 결국 히브리 개념에서 ‘구원’을 의미하는 “야솨”라는 단어는 어떤 압제와 억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자유하게 한다는 의미와 함께 공동체를 보호한다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돌라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니라”라는 표현은 방어적인 의미로 볼 때는 돌라가 이스라엘을 외부적인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였다는 의미가 됩니다. 돌라의 사사 직임때에는 외부적인 압제가 공격이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돌아의 사사로서의 역할은 국지적인 분쟁을 조정하거나, 이스라엘이 우상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는 등의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악을 행하는 것으로부터 지키는 역할을 감당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1-2절, “에브라임 산지 사밀”: 사사 돌라는 북쪽 지방을 유업으로 얻었던 잇사갈 지파에 속하였으나, 그가 사사로 활동한 지역은 가나안 땅 중앙에 있는 에브라임 지파입니다. 그런데 타지에서 활동한 돌라가 죽었을 때에 장사된 지역도 고향이 아닌 에브라임 지파의 땅이라는 것은 히브리 풍습으로 볼 때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사사기의 등장하는 기드온(8:32), 입다(12:7), 입산(12:10), 엘론(12:12), 압돈(12:15), 삼손(16:31) 등이 모두 자기 고향에 장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활동하였던 이유도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돌라는 자신이 평생 수고한 사역지인 사밀에서 묻히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3-5, 길르앗 출신 사사 야일]
길르앗 사람 야일이 사사가 되어 22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그에게 아들 30명이 있었는데 그들 모두 어린 나귀를 타는 지위를 누렸으며 각자 성읍 하나씩 모두 30개의 성읍을 다스렸습니다. 그 성읍들은 모두 길르앗 땅에 있었으며 사사기 기록 당시까지 하봇야일이라 칭해졌습니다.

3절, “야일”: 이름의 뜻은 ‘빛’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오르”에서 유래된 말로서 ‘계몽자, 빛을 비추는 자”라는 의미가 됩니다. 야일의 공적이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그가 다스린 22년 동안 이름에 걸맞게 사명을 담당하였기에 이스라엘은 평화로운 시절을 보냈던 것입니다.

4절,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성읍 삼십을 가졌는데”: 고대 근동에서 나귀는 귀족들의 교통 수단이었으므로 어린 나귀 삼십을 탔다는 것은 그들이 각자의 성읍을 다스리는 통치자였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동시에 야일 시대에 30개의 성읍이 얼마나 풍요로운 생활을 하였는지 짐작하게 해 줍니다.

4절, “하봇야일”: “하봇”은 ‘마을, 고을’ 또는 ‘성읍보다는 조금 작은 규모의 촌락’을 의미하므로 이 말을 직역하면 “야일의 마을(촌락)”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신 3:14, 민 32:41에 보면 출애굽 이후 요단강을 건너기 직전에 사사 야일과 동명이인인 므낫세의 아들 야일이 바산 지방을 점령하고 “하봇야일”이라 칭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사기 기록 당시까지 그 이름이 지속된 것을 볼 때에 사사 야일이 그 마을들에 대한 통치권을 다시 굳건하게 세워서 확립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야일 사사 전에 그 땅의 통치권을 이방의 세력들에 의해 잃었다가 자기 선조들이 얻었던 성읍들을 되찾고 자기 아들들에게 줌으로 통치권을 유지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여호수아 13:30에 의하면 야일이라는 이름과 관련된 성들이 모두 60개가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절반에 이르는 30개를 자신의 후손들에게 물려 줄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사사 야일의 역할이 매우 탁월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6-9, 이스라엘의 재타락과 블레셋과 암몬의 압제를 통한 여호와의 징계]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우상들을 섬기게 됩니다. 이에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과 암몬 족속으로 징계하십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학대하기 시작하니 요단 동편의 길르앗 땅에 거하는 이스라엘 자손이 18년 동안 압제를 당합니다. 또한 암몬 족속이 요단을 건너 요단 서편의 유다와 베냐민, 에브라임 족속까지 침입하니 이스라엘이 환란과 고통을 당합니다.

6절,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 본문에서는 바알와 아스다롯으로 대표되는 이방신들 외에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던 우상들의 종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알과 아스다롯, 그리고 아람, 시돈, 모압, 암몬, 블레세 등의 이방신들의 이름을 나열하므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정복한 지역의 우상들뿐만 아니라 그 밖에도 주위에 있는 모든 지역의 신들을 모조리 섬겼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렇게 이방 신들을 적극적으로 섬겼지만 결국은 이스라엘이 얻은 것은 이방 신들의 땅에 거하는 민족들에 의해 다시 짓밟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9절, “유댜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곤고가 심하였더라”: 이 단어의 히브리어 기본형 “야차르”는 ‘묶다, 고통 중에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히브리 성경에는 ‘매우, 대단히’를 의미하는 부사 “메오드”가 표현되어 있으므로 본문의 직역은 “이스라엘의 곤고가 매우 심하였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특히 본문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가장 강력하였던 것으로 여겨지던 유다 지파까지 외적의 침입에 무기력했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으므로 당시 이스라엘의 암울했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묵상 및 적용]
며칠 동안 계속되었던 아비멜렉의 죄악상과 부패한 세겜 사람들의 행적을 쫓으면서 마음 한 편에는 ‘지친다’라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사람이 ‘검은 색’만을 계속 보는 것은 충분히 지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평화를 상징한다는 초록색도 보고, 파스텔 풍의 하늘색도,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오렌지나 노란색도 보고, 몸에 에너지를 끌어 올려 주는 붉은색도 보는 등의 다양한 색깔을 보는 것이 오히려 사람의 마음에 평안을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사기 9장을 마치고 10장으로 들어섰는데 고개가 좌우로 갸우뚱 해지는 기록들이 1-5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고개가 갸우뚱 해졌을까요?

다섯 절 밖에 되지 않는 짧은 본문 속에 두 사사, 돌라와 야일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고, 두 사사의 직임 기간이 45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3년을 통치하고 악한 행보를 걸었던 아비멜렉에 대한 기록은 사사기 8:31절과 9장 전체 57절에 걸쳐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의로운 사명을 감당했던 돌라와 야일 사사의 기록은 단지 “5절” 밖에 되지 않다는 것이 “왜?”라는 궁금증을 자아냈기 때문입니다.

이 궁금증에 대한 해답은 사사기의 집필 목적을 따라 생각해 보면 ‘아하~ 그렇구나!’라고 무릎을 ‘탁’ 치게 됩니다. 사사기의 집필 목적은 사람에 대한 행적을 기록하는 자서전도, 전기문도 아닙니다. 사사기의 기록 목적은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 구속사를 밝히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기록에 돌라와 야일 시대에 대해서 어떤 과오나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돌라와 야일 사사가 큰 소란 없이 자기의 직분을 잘 감당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사사기의 집필 목적에 따라 하나님의 신정 통치가 잘 실현되었으며,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다스린 45년 동안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손길을 경험하며 태평하고 풍요로웠다는 사실을 본문의 표현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을 깨닫기 위함이요,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함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사사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과 함께 죄악으로 가득 찬 모습들이 등장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이를 징계하시고 회개를 촉구하기 위하여 외적의 침입이나 내부의 혼란한 모습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타락한 모습과 외적의 침입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이라면 구원하시고 해결할 힘이 충분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징계로 인한 고통의 시간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지만, 오늘 본문처럼 어떤 때는 평화로운 시대가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한 가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돌라와 야일 시대는 평화로웠는가?”라는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생뚱맞은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이 조금이나마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을 알 수 있는 키워드가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공명심으로 똘똘 뭉친 아비멜렉 후에 ‘사랑과 은혜, 자비와 인애’가 본성이신 하나님은 어떤 지도자가 필요했을까요?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소란케 한 이유는 그가 공명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관심은 오로자 자기의 이름을 높이고, 자기의 통치 기반을 확고히 하는 것에만 쏠려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계획에 거슬리며 경쟁이 될 만한 70명의 형제들을 죽이는 비극을 초래한 것입니다. 아비멜렉에게 이스라엘의 “평화”라는 주제는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지도자라면, 돌라와 야일은 묵묵히 자기의 본문에 충실히 직분을 다한 지도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보다는, 자기 명예와 권세 보다는 공동체의 평화와 안녕에 더욱 관심을 가지는 지도자가 필요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평화의 기간을 부정적으로 보면 영적으로 해이해질 가능성이 있는 시기이지만, 반대로 긍정적으로 보면 이 기간은 오랜 분열과 다툼 속에서 상처나고 피곤한 사람들을 위로해 주는 시간입니다. 또한 평화의 기간은 과거의 모습을 자아 반성하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며, 아물고 치료된 상처를 훌훌 털고 일어나 자랄 수 있는 기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돌라와 야일을 평화를 위한 일꾼으로 적합하다고 여기시고 피와 전쟁으로 점철된 아비멜렉 이후 치유와 회복과 평화를 위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돌라와 야일을 세우신 것입니다.

왜 돌라와 야일 시대는 평화로웠는가? 이 질문의 답은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 인애와 자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폭풍이 지나 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처를 싸매고, 치유하고, 그 상처가 아물고 회복되어 가면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오도록 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채찍을 들고 독려만 하고 다구치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5절까지 다섯 구절로 이루어진 본문 속에서 지극히 ‘평범하다’라고 느꼈지만, “때로는 평범한 것이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특별한 활동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평범한 45년의 세월이지만 성경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라고 기록하며 평범하지만 자신의 직분을 충실하게 감당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은 믿음의 용사였지만, 축재와 축첩 등의 오욕을 남겼으며, 후대에 내분의 되는 씨앗과 우상 숭배의 올무를 남겨 아름답지 못한 인생의 말년을 보냈습니다. 오늘날도 위대한 업적을 생전에 보내고도 말년을 잘못 보내서 오명을 남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자기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는 돌라와 야일 같은 사사의 모습은 평범하지만 아름다운 것이라 생각됩니다. 역사의 무대에서는 조용히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사명을 충실하게 다했으니 생명책의 기록은 천국의 상급이 주어지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사사기의 등장하는 사사들 중에서 화려한 전투와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 기드온이나 삼손의 이야기는 잘 기억하지만, 평범한 돌라와 야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유명한 것이 항상 위대한 것과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름없이 살다 간 역사의 인물 중에도 묵묵히 신앙의 길을 가며 구속사의 일꾼으로 일한 종들이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비록 역사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여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모두 믿음의 선진들이며 충실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역사학자 토인비(A.J.Toynbee)는 “역사는 창조적 소수(creative minority)에 의해 발전한다”라고 말했지만, 이 말이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적용되는 진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역사 속에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자기의 소명을 묵묵히 다하고 사라져 간 ‘알려지지 않은’ 위인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 ‘알려지지 않은’ 위인들 중에 바로 여러분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묵묵하지만 진실하게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충실한 일꾼이며, 역사의 한 축을 지탱하는 ‘알려지지 않은’ 위인입니다. 위대한 인물이 되기를 꿈꾸는 것이 나쁘지는 않지만, 평범한 일이라 할지라도 내게 맡겨진 일들을 믿음으로 감당해 내는 성도의 삶 또한 어느 것에 못지 않은 ‘아름다운 인생’ 입니다.

[기도]
이 땅에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예수님! 주의 뜻을 깨달아 알게 하시며, 그 뜻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탐욕과 죄악의 짐을 벗고 거룩한 성도가 될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세상에서 성공하여 이름을 내려는 권세욕과 명예욕의 이생의 자랑을 쫓지 않고, 이름도 없이 빚도 없이 아골 골짜기 어디든 가리라 결단하고 헌신하는 사명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짧은 인생 동안에 저 천국에 쌓아 놓을 것이 하나도 없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생명책에 기록될 성도의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주의 뜻이 원하는 곳에 있게 하시고 주께서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는 성도가 되기를 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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