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나눔

오늘의 말씀묵상 8/26/2021 목요일 [사사기 9:46-57]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8-26 08:41
조회
275

8. 26. 목요일. 오늘의 말씀묵상

찬양링크 “교회”: https://youtu.be/mjfgfx-eoRI

[본문: 사사기 9:46-57]
46.세겜 망대의 모든 사람들이 이를 듣고 엘브릿 신전의 보루로 들어갔더니
47.세겜 망대의 모든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비멜렉에게 알려지매
48.아비멜렉 및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살몬 산에 오르고 아비멜렉이 손에 도끼를 들고 나뭇가지를 찍어 그것을 들어올려 자기 어깨에 메고 그와 함께 있는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내가 행하는 것을 보나니 빨리 나와 같이 행하라 하니
49.모든 백성들도 각각 나뭇가지를 찍어서 아비멜렉을 따라 보루 위에 놓고 그것들이 얹혀 있는 보루에 불을 놓으매 세겜 망대에 있는 사람들이 다 죽었으니 남녀가 약 천 명이었더라
50.아비멜렉이 데베스에 가서 데베스에 맞서 진 치고 그것을 점령하였더니
51.성읍 중에 견고한 망대가 있으므로 그 성읍 백성의 남녀가 모두 그리로 도망하여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망대 꼭대기로 올라간지라
52.아비멜렉이 망대 앞에 이르러 공격하며 망대의 문에 가까이 나아가서 그것을 불사르려 하더니
53.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 던져 그의 두개골을 깨뜨리니
54.아비멜렉이 자기의 무기를 든 청년을 급히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 하니 그 청년이 그를 찌르매 그가 죽은지라
55.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비멜렉이 죽은 것을 보고 각각 자기 처소로 떠나갔더라
56.아비멜렉이 그의 형제 칠십 명을 죽여 자기 아버지에게 행한 악행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57.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응하니라

[본문이해]
[46-49, 아비멜렉의 세겜 망대 사람들의 학살]
세겜 망대 사람들이 세겜의 멸망 소식을 듣고 엘브릿 신전으로 피신했다는 소식이 아비멜렉에게 전해집니다. 아비멜렉이 그를 따르는 자들과 살몬산에 올라 나뭇가지를 찍어 신전의 보루에 올려 놓고 불을 질러 세겜 망대 사람들 약 천명을 죽입니다.

46절, “세겜 망대”: 세겜 망대가 어디에 있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들이 세겜 성읍의 멸망을 직접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귀로 들었다는 것과 세겜이 멸망할 때에도 세겜 망대는 온전했으므로 세겜 성읍과는 거리가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망대”로 번역된 단어의 히브리어 “미겟달”은 ‘높이다, 올리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말로 높은 지역에 견고하게 세워진 성곽, 성채, 혹은 요새와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흔히 망대는 적군의 공격의 움직임을 미리 알 수 있는 전략적 시설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망대는 경비병 몇 명만이 있는 그런 파수 망대(Watch tower)가 아니라,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가족들과 주거 생활을 할 수 있는 큰 요새로 보입니다.

46절, “엘브릿 신전의 보루”: “엘브릿”은 ‘언약의 신’이란 뜻입니다. 이는 4절에 나오는 “바알브릿”이 ‘언약의 주인’이라는 뜻이므로 서로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1926년 독일의 고고학자 Sellin에 의해 발굴된 한 유적지가 불에 그을려 있고 성경의 기록과 같이 화재로 이곳이 일시에 폐허가 된 흔적이 있으므로 이곳에 상당한 규모의 신전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되어 엘브릿 신전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본문에 “보루”로 번역된 말의 히브리어는 “체리아흐”로 ‘은밀한 곳, 동굴, 지하실, 성채의 은밀한 장소’등과 같은 곳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공동번역 성경은 ‘밀실’로 번역하고 있고, 현대인의 성경은 ‘내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48절, “살몬산”: 이 산의 명칭은 ‘그늘지다’라는 뜻의 “첼렘”이라는 히브리어 동사에서 유래된 말로 ‘그늘진 산’이라는 의미이므로 나무가 많았던 산으로 추정됩니다. 본문의 내용 전개로 보아 세겜 근처에 있는 산으로 추정되며 아비멜렉과 그의 부하들이 이 산에 올라가 나무들을 잘라서 세겜의 망대를 불태울 땔감을 모은 것입니다.

49절, “세겜 망대에 있는 사람들”: 본문의 “사람들”에 해당되는 히브리 단어는 ‘에노쉬’로 그 의미는 ‘(일반적인) 사람, (집단적인) 인간’을 의미합니다. 사사기 9장에서 ”세겜 사람”이라고 표현할 때에 “사람”이라느 단어는 언제나 “빠알”이 사용되어 우상 ‘바알을 섬기는 사람들, 바알 신앙인들’을 나타내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빠알”로 표현된 세겜 사람들은 자신들을 그 땅의 주인으로 영원한 신 바알을 섬기는 자들로 표현하고 있지만, 49절에서는 헛된 자만심이 깨어지듯 완전히 훼파된 세겜성, 또한 불에 타서 비참하게 죽을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킬 때에는 더 이상 “빠알”이 사용되지 않고 유한하고 연약한 보통 인간을 나타내는 “에노쉬”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50-54, 아비멜렉이 세겜 반란에 가담한 데베스 공격과 그의 비참한 최후]
아비멜렉이 세겜 반란 사건에 가담한 데베스를 공격하여 점령하자 데베스의 남녀가 모두 성중의 견고한 망대로 도피합니다. 아비멜렉이 망대 앞에 이르러 계속 공격하며 망대의 문을 불사르려 하자, 한 여인이 망대 위에서 맷돌 윗짝을 던져 아비멜렉의 두골을 깨뜰립니다. 아비멜렉은 여인의 손에 죽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자신의 무기 담당 호위병에게 자신을 죽이도록 명령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50절, “데베스”: ‘창백함, 흰색’이란 뜻의 이 도시는 세겜 북동쪽 약 16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 세겜인들과 같이 아비멜렉에 대한 반역에 동참한 성읍으로 보입니다. 본문의 표현된 말에 의하면 데베스는 매우 견고한 망대를 가지고 있으며, 비교적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크고 넓은 것으로 보입니다.

54절, “자기의 무기를 든 청년”: 고대 근동의 전쟁에서 무기를 드는 자를 옆에 둔 것은 무기의 무게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왕이나 장수들은 무기가 많았고, 또한 무거웠기 때문에 전쟁에 이 무기들을 다 들고 나간다면 싸움을 하기도 전에 지쳐서 전투를 효과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뢰할 수 있는 자로 무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을 정해서 옆에 데리고 다닌 것입니다.

[55-57, 하나님께서 요담의 저주가 이루어지게 하심]
아비멜렉이 죽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흩어져 각기 처소로 돌아갑니다. 사사기 저자는 이루어진 모든 일이 요담의 저주가 그대로 응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죄의 보응을 위해 서로 죽이게 하심으로 죄의 대가를 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56절,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사사기의 저자는 본장의 서두 부분에 아비멜렉의 죄악을 기록하면서 하나님이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지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비참한 최후를 당하는 장면을 기록하면서 하나님의 그의 죄악을 다 알고 계셨고, 그에게 이 죄에 대한 대가를 되돌리셨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갚다”라는 말의 히브리어 “슈브”는 ‘되돌아오다’라는 의미로서 결국 아비멜렉 자신이 저지른 악에 대해서 그 자신에게 다시 되돌아오도록 하셨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악한 일을 상관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며(갈 6:7), 모든 일을 불꽃 같은 눈으로 일일이 다 보고 계시는 분입니다(욥 11:11).

57절, “요담의 저주”: “요담”이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완전하시다. 여호와는 정직하시다’라는 뜻입니다. 요담의 저주가 이루어진 것은 정직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악인의 악행에 대해 결코 모른 채 지나가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건입니다. 또한 본문은 요담의 저주가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 요담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라는 관점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저주”라는 번역에 해당하는 “킬랄라트”라는 히브리어는 축복받은 혹은 의로운 상태가 결핍되거나 이전 보다 못한 상태로 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묵상 및 적용]
오늘 본문은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반역을 다루는 사사기 9장의 마지막 단락입니다.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분열이 생기고, 아비멜렉이 반역을 꾀한 세겜 사람들을 멸망 시킵니다. 하지만 그 잔당과 동조자를 쫓아 반란을 진압하던 아비멜렉이 정말 어처구니없이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치명상을 입어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선택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사사기에 기록된 아비멜렉이든지, 그를 따랐다가 배반하는 세겜 사람들이든지 모두 의롭지 못한 세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원치 않는 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형제들을 죽인 사람이며, 이 일에 동조하고 힘을 보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이 두 그룹에 대해서 ‘성경이 어떤 평가를 내 놓았는가?’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좋은 교훈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살펴 보았더니 모든 사건들이 지나간 후의 상황을 사사기의 저자는 55절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비멜렉이 죽은 것을 보고 각각 자기 처소로 떠나갔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표현을 읽고 묵상하면서 웬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이야기가 떠 올랐습니다. 왜냐하면 “각각 자기 처소로 떠나갔더라”라는 뉘앙스가 창세기 11:9 “거기서(바벨)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라는 말씀과 서로 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벨탑은 어떤 사건입니까? 홍수 이후에 사람들이 시날 평지에 성읍과 탑을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홍수를 경험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뭉쳐서 도시를 건설할 때에 매우 공을 들였을 것입니다. 창 11:4에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라고 말하면서 바벨탑을 쌓아 나갔습니다. 하지만 바벨 공동체의 사람들의 의도는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창조의 명령을 거스릴 뿐만 아니라, 4절의 표현에 언급된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름을 드러내자’라는 바벨 공동체의 생각의 밑바탕에는 하나님께 맞서고자 했던 인간의 교만함과 자기들 스스로도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교만함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정 왕국을 거부하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꺾으시기로 작정하셨고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바벨 공동체를 온 지면에 흩어지게 하시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비멜렉과 한 때 그를 따랐다가 배반하여 분열한 세겜 사람들의 행보는 마치 바벨탑을 쌓았던 바벨 공동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모두가 정당한 방법으로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치 않는 방법이며, 형제를 죽여서 차지한 권력의 자리가 바른 길이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비멜렉이 왕으로 있었던 3년 동안 세겜 사람들과 권레를 누리던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이익을 누리고, 절대 권력 아래서 많은 기득권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의한 그들을 하나님께서 두고만 보지는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영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을 이간질 시키고 서로 배반하여 분열하고, 결국 전쟁에 이르는 것을 그대로 두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심판과도 같은 것이요, 죄에 대한 보응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사기는 아비멜렉의 최후와 세겜과 그들의 동조자들의 죽음을 기록한 사사기 9장의 사건을 통해서 그 옛날 바벨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여 무너진 것과 비슷한 결과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왕으로 따랐던 아비멜렉이 어이없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후에 사람들은 구심점을 잃어 버렸습니다. 기득권과 이익을 누렸던 절대 권력이 사라지자, 사상누각처럼 흩어지고 맙니다. 창세기 1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므로 사람들을 흩었다면, 사사기 9장에서는 아비멜렉의 죽음을 통하여서는 사람들이 자기 처소로 돌아감으로 흩어짐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한 가지는 불의한 공동체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대항하여 불의로 모인 공동체에게는 바벨탑의 형벌처럼 “흩어짐”의 형벌이 따를 뿐입니다. ‘불의를 좇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되는 것으로 그에 상응하는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사람의 욕심이나 인본주의적인 사고를 가진 불의한 공동체는 하나님의 심판을 당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2을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셨으며, 로마서 2:9에서도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불의를 행하는 공동체인지 혹은 의를 행하는 공동체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공동체가 의를 행하는 공동체인가를 따지는 기준을 나와 내 가족, 또는 내가 하는 사업의 유익이나 이익, 즐거움에 두면 바른 판단을 할 수도 없으려니와, 그리스도인에게 이런 기준은 올바른 판단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때때로 바벨과 같은 이 세상이 우리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기준에서 아무리 보기에 좋아 보이고, 또한 나에게 주는 유익과 이익이 많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면 미련을 갖지 말고 과감히 돌아서야 합니다.

불의한 공동체는 심판과 분열이 있지만, 진리의 공동체는 그 끝이 그리스도의 때까지 지속된다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비멜렉을 추종한 불의한 공동체가 하나님의 징례로 우두머리 아비멜렉을 잃자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명분이 정당하지 못한 집단은 한 때 흥왕하는 듯하여도 쉽게 와해되고 맙니다. 반면에 진리 속에서 모인 공동체는 그 결속력이 끝까지 갑니다.

그 한 예로, 초개 교회 시대에는 교회에 대한 박해가 많았습니다. 그때에는 그리스도인을 잡아다가 사자의 밥이 되게 하기도 했고, 검투사의 상대나 혹은 죄인으로 취급하여 불신자들의 노예로 삼기도 했으며, 맹수의 밥으로 주기도 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의 사회적 기준으로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불의한’ 공동체 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쉽게 와해되지 않았습니다. 그 분명한 이유는 하나님의 진리가 함께 하는 의로운 공동체 였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목숨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며, 옥고를 치루었으며, 그리스도를 믿는 자녀들이 집에서 쫓겨나고 사람들로 부터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으며, 그리스도인들과 선교사들의 목에 현상금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진리의 공동체는 계속되고 있으며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해 가고 있으며, 앞으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이신 예수을 믿고 의지하는 교회 공동체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 세계로 흩어지지만, 거주하는 장소는 흩어질 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똘똘 뭉쳐서 성령 안에서 교통하는 공동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이 공동체가 주의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키지 못하고, 그 순수성을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진리의 순수성, 거룩성을 잃어 버린다면 그때부터는 세상의 다른 공동체와 다를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진리를 수호하고, 순수한 하나남의 진리를 간직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있는 교회 공동체는 아무리 밟아도 뿌리 뻗는 잔디처럼 끊임없이 그 영향력을 이어나갈 것입니다. 바로 주님이 오실 그날까지…

[기도]
어둠에서 우리를 빛으로 부르신 예수님! 주의 핏값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공동체, 교회를 거룩하게 세워 주옵소서. 우리의 더럽고 추한 죄악으로 인하여 주의 몸된 교회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주의 보혈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옵소서. 믿음의 선진들이 핏값으로 하나됨을 지켜내고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였듯이 우리들도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복음의 수호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변하지 않는 약속을 지켜 나가시는 주의 뜻을 따라 어둠의 권세를 무너뜨리고 승리하는 교회가 되게 하시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죽음이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를 갈라 놓지 못하며, 병마가 갈라 놓지 못하며, 가난과 비천에 처하는 것이 갈라 놓지 못하며, 세상 즐거움과 쾌락과 이익이 주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 놓지 못함을 믿사오니 우리로 하여금 하나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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