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나눔

오늘의 말씀묵상 8/13/2021 금요일 [사사기 5장 19-31절]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8-13 09:28
조회
569

8. 13. 금요일. 오늘의 말씀묵상

찬양링크 “사명선”:

[본문: 사사기 5:19-31]
19.왕들이 와서 싸울 때에 가나안 왕들이 므깃도 물 가 다아낙에서 싸웠으나 은을 탈취하지 못하였도다
20.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들이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
21.기손 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 이 기손 강은 옛 강이라 내 영혼아 네가 힘 있는 자를 밟았도다
22.그 때에 군마가 빨리 달리니 말굽 소리가 땅을 울리도다
23.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주민들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
24.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들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있는 여인들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
25.시스라가 물을 구하매 우유를 주되 곧 엉긴 우유를 귀한 그릇에 담아 주었고
26.손으로 장막 말뚝을 잡으며 오른손에 일꾼들의 방망이를 들고 시스라를 쳐서 그의 머리를 뚫되 곧 그의 관자놀이를 꿰뚫었도다
27.그가 그의 발 앞에 꾸부러지며 엎드러지고 쓰러졌고 그의 발 앞에 꾸부러져 엎드러져서 그 꾸부러진 곳에 엎드러져 죽었도다
28.시스라의 어머니가 창문을 통하여 바라보며 창살을 통하여 부르짖기를 그의 병거가 어찌하여 더디 오는가 그의 병거들의 걸음이 어찌하여 늦어지는가 하매
29.그의 지혜로운 시녀들이 대답하였겠고 그도 스스로 대답하기를
30.그들이 어찌 노략물을 얻지 못하였으랴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으랴 사람마다 한두 처녀를 얻었으리로다 시스라는 채색 옷을 노략하였으리니 그것은 수 놓은 채색 옷이리로다 곧 양쪽에 수 놓은 채색 옷이리니 노략한 자의 목에 꾸미리로다 하였으리라
31.여호와여 주의 원수들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하니라 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평온하였더라

[본문이해]
[19-22, 기손강 전투의 승리에 대한 찬양]
가나안의 왕들이 므깃도 물가 즉 기손강 전투에서 이스라엘에게 패함을 노래합니다. 하늘의 별들이 시스라와 대적하였다는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 있었음을 말합니다. 폭우로 인한 기손강의 물결이 적군을 휩쓸자 이스라엘이 공격하여 승리하게 되었음을 노래하며, 시스라 군대의 패주와 이스라엘 군대의 추격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19절, “왕들이 와서 싸울 때에”: 당시 가나안 왕 야빈과의 싸움에 가나안의 여러 왕들이 연합군을 형성하였음을 알 수 있는 표현입니다. 하솔 왕 야빈을 중심으로 가나안의 여러 도시 국가들이 동맹을 맺었고, 그 동맹군을 시스라가 지휘하였음을 가리키는 내용이 여호수아 11:1-9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9절, “므깃도 물가 다아낙에서”: 므깃도 지역은 현재의 “텔 엘 무테셀림(Tell el=Mutesellim)’에 추정되는 지역으로 하이파에서 남동쪽으로 32km, 예닌(Jenin)에서 북서쪽으로 17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으로 전략상의 요충지입니다. 그리고 다아낙은 므깃도 동남쪽 9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입니다. 기손강 하류 부근에 위치한 므깃도와 다아낙은 가나안 정복시 므낫세 지파에게 분배되었습니다(수 12:7, 21, 17:11). 기손강 상류 즉 스블론과 납달리와 잇사갈 지파가 모두 만나는 경계점에 있는 다볼산에 집결한 이스라엘이 기손강 하류 므낫세 지파의 지경에서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절, “은을 탈취하지 못하였도다”: 당시의 전투는 승리한 후에 전리품을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손 강 전투에서는 아무것도 탈취하지 못했다는 표현은 결국 가나안의 왕들이 패했음을 표현하고 있는 말입니다.

21절, “기손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 이 문장의 히브리어 직역은 “기손강이 그들을 쓸어 버렸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종종 하나님께서는 폭우, 바람, 벼락, 폭풍우와 같은 날씨의 변화를 통해 대적과 싸우셨음을 표현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당시 기손강이 심한 폭우로 일순간에 범람하여 가나안 동맹군을 패하여 했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22절, “군마가 빨리 달리니 말굽 소리가 땅을 울리도다”: 당시 이스라엘 군대는 방패와 창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군대이기에 이스라엘 군대가 기병을 보유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등장하는 군마와 말 발굽 소리는 시스라 군대의 기병입니다. 21절에 이미 전투의 승패가 결정되었음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22절의 표현은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하여 달리는 모습이기 보다는 패주하여 도망치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3-27, 이스라엘을 돕지 않은 메로스와 시스라를 죽인 야엘]
여호와의 편에서 싸우지 않고 전쟁을 방관만 했던 메로스의 주민에 대한 저주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장막에 거하는 여인들 중에서 가장 많은 복을 받을 것이라고 축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스라를 죽인 야엘의 지혜롭고 용기있는 행동을 묘사하며 칭송하고 있습니다.

23절, “메로스를 저주하라”: 성경에서 “메로스”라는 지명은 오직 본문에만 등장하므로 다른 본문과 비교하여 그 위치를 정확하게 추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학자들 마다 서로 주장하는 위치가 다릅니다. 23절의 기록에 의하면 메로스의 주민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그 전쟁에 참여해서 도와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강력하게 저주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4, “장막에 있는 여인”: 당시 여인들은 장막 안에서 주로 가사를 돌보는 것이 주된 일이었기 때문에 이 표현은 이스라엘의 여인들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즉 야엘이 일반 여인들 보다 더 축복을 받을 것에 대한 묘사입니다.

25절, “엉긴 우유”: 이 단어의 히브리어 “헤므아”는 우유나 염소젖 등을 발효시켜 만든 음료로서 당시 고급 음식에 속하였습니다. 영어성경들 마다 각각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데 KJV은 ‘버터(butter)’로, NIV는 ‘굳어진 우유(curdled milk)’로, NASB와 RSV는 ‘굳어진 우유와 같은 커드(curds)’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27절, “꾸부러지며 엎드러지고”: 이 단어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라 나팔”이 본문에 3회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반복은 강조이면서 동시에 드보라가 시스라의 죽음을 마치 느린 그림으로 반복하여 재생하듯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28-30, 시스라 어머지의 헛된 희망에 대한 풍자]
시스라의 개선을 기다리며 초초해 하고 있는 시스라의 어머니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스라가 당연히 이스라엘을 이기고 각종 전리품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녀의 헛된 희망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드보라는 풍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승리의 기쁨을 상대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29절, “그의 지혜로운 시녀들”: 본문의 “시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로테하”는 ‘시녀’라는 뜻이 아니라, 방백이나 장관을 의미하는 명사 ‘사르’의 여성형이기 때문에 ‘지도자나 귀족이나 왕족의 부인’을 뜻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시스라의 어머니와 함께 전쟁에 나간 남편들을 기다리는 귀부인들이나 기타 상류층의 부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30절, “채색 옷을 노략하였으니리”: 이러한 수놓은 채색 옷은 왕이나 상류층이 입었던 매우 귀한 옷입니다. 이 표현은 채색 옷을 전리품으로 노략했다는 말도 되고, 또한 이스라엘의 최고 지휘관이나 방백들을 사로 잡거나 죽인다는 의미도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승전보를 기다리는 시스라의 어머니와 여인들의 기대와 소망은 철저하게 무너져 내리고 맙니다. 드보라는 이러한 시스라 어머니의 헛된 망상을 풍자를 표현하여 이스라엘의 기쁨을 상대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31, 승전가의 종결과 드보라의 40년 사역기사의 종결]
여호와께 간구하며 찬양시를 종결합니다. 이스라엘의 대적은 망하게 하시고, 사랑하는 자 힘있게 해 달라고 기원함으로 승전 찬양시를 마칩니다. 이후 드보라 선지자가 생존한 40년 동안 태평을 누리가 되었음을 기록하므로 사역기사를 마칩니다.

31절,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분의 권능으로 해를 돋게 하시는 것처럼 그를 사랑하는 자들이 찬란하게 떠올라서 지속적으로 번영해 나가기를 기원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묵상 및 적용]
동양 철학의 기본 개념 중에 “중용(中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도덕론으로서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도리에 맞는 것을 ‘중’이라 하고, 평상적이고 불변적인 것을 ‘용’이라 말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지녀야 할 자세와 태도를 제시하는 것으로 사서오경(사서는 논어, 맹자, 대학이고, 삼경은 시경, 서경, 역경인데 여기에 춘추와 예기를 더한 것이 사서 오경입니다) 중의 하나로서 치우치거나 기대지 않고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것을 지향합니다.

중용의 요지를 언급하고 있는 자료를 참조하면, “사람은 누구에게나 인간적 욕심과 도적적 본성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도 인간적 욕심이 있을 수 있고,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도덕적 본성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두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 중용”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용을 실천하기 위해서 도덕적 본성이 자기 마음의 주체가 되게 하여 인간적 욕심이 항상 도덕적 본성의 명령을 듣도록 하는 것이 그 방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동양철학의 중용의 개념을 생각하면서 과연 인간이 도덕적 본성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인간의 욕심이 도덕적 본성의 명령을 듣도록 하는 것이 가능할까? 라는 의문입니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면서 이 중용을 잘못 적용하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발생하곤 합니다. 중용의 잘못 적용되는 예를 들자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애매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 ‘중용’의 도를 운운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애매한 상황에 빠진 정치인이나 사람들이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중용’을 거론하면서 확실한 결정이나 태도를 취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이유는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과 안전, 평안에 근거한다는 점입니다. 과연 이러한 적용이 바른 중용의 도를 적용하는 것일까 의심스럽지만,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실제로 우리 삶 속에서 애매모호할 때나, 결정하기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인간 마음의 도덕적 본성은 자신을 지키는 것, 이익을 지키거나 생명을 지키는 것, 무리하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욕심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많은 경우 이익을 포기하거나, 생명을 버리면서 욕심이나 본성을 뛰어 넘는 결정을 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 속에는 인간의 욕심과 관련된 성경구절들이 정말 많이 나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는 육체의 소욕, 인간의 욕심이 ‘성령을 거스린다’(갈 5:17)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육체의 일들을 갈 5:19-21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중용의 가르침처럼 인간 스스로가 도덕적 본성의 주체가 되어서 이러한 육체의 일들과 욕심을 제어하고 치우치거나 모자람이 없도록 조절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인간에게 없다고 성경은 단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묵상 본문에서 드보라 선지자가 23절에 “메로스를 저주하라”라고 말하며 여호와를 도와 기손강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메로스 주민들을 책망하며 저주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메로스가 어느 지역에 위치해 있으면 그 주민들은 어떤 사람인지 역사적 사료나 충분한 보충 자료가 없기 때문에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메로스 주민들은 삿 5:15-17에 기록된 르우벤, 요단 동편 길르앗 땅의 지파, 단 지파, 아셀 지파처럼 여호와 하나님께서 앞서 나가시는 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함께 동역하여 이스라엘 나라의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주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저주의 선포가 너무 가혹한 것처럼 여겨 지시나요? 메로스 주민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한번 상상하며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어느 날, 메로스 주민들의 족장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드보라 선지자가 20년간 이스라엘을 압제한 가나안 왕 야빈과 그와 동맹을 맺은 가나안 여러 도시 국가들의 연합군과 전쟁을 한다는 연락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 메로스 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연락입니다. 메로스 주민들과 족장은 급하게 회의를 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드보라와 바락의 군대의 힘은 야빈 왕의 가나안 연합군의 군사력과 비교해 보면 전혀 비교할 바가 되지 못합니다. 이리 재 보고, 저리 재 보아도 이스라엘이 전력상 패할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력상 우위에 있는 가나안 왕의 반대편에 섰다가 나중에 닥칠 후폭풍을 생각하면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는 분명하게 보입니다. 결국 메로스 주민들은 어떻게 결정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아마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쪽으로 투표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결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며, 많은 사람의 동의를 받는 것이며, 그들 자신의 도덕적 본성에 합리적이고 합당한 결정입니다. 결국 메로스 주민들은 이스라엘의 편도 들지 않았고, 그렇다고 가나안 왕 야빈의 동맹군의 편도 들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르우벤 지파나, 요단 동편의 지파들이나, 단과 아셀 지파도 같은 생각으로 전쟁에 동참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다만 합리적인 생각 하에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스라엘의 적이 되어 가나안의 동맹군의 연합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냥 지나가고 있지 않습니다. 드보라 선지자는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며 침묵했던 메로스를 저주합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드보라 선지자를 통하여 이러한 태도를 취한 메로스 주민들을 거듭거듭 저주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전쟁이라는 특수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 분의 명령에 따르는 전쟁에서는 하나님 편에 서든지, 아니면 그 대적의 편에 서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편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돕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아군이 아니면 적군이며, 중간에 애매모호한 자들은 적군으로 간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애매모호한 중도적 입장을 교회 밖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종종 표현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기독교인은 아니다’ 혹은 ‘나는 기독교는 물론 어느 종교도 믿지 않는 무교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입장은 기손강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메로스 주민들의 태도와 다를 바 없습니다. 또한 이런 중간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도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눈에 과연 어떻게 보일까요? 한번쯤은 곰곰히 묵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마태복음 7:21에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인 삶에 바탕을 두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신앙의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편에 서거나, 아니면 대적자의 편에 속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면서, 또한 하나님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라는 생각은 오늘 본문의 메로스 주민의 예를 생각한다면 정말 위험천만한 생각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편에 확실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음’이라 말하기도 하며, 이 믿음으로 사단과 세상의 악을 대적해야 하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8:21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백성에게 질문했으며, 예수님도 누가복음 11:23절에 아래와 같이 선포하셨습니다. 이 두 성경구절이 우리에게 도전이 되며 믿음의 결단력을 갖는데 능력의 권고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왕상 18:21)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눅 11:23)

[기도]
세상을 불꽃 같은 눈동자로 감찰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의 오른팔의 권능과 역사를 믿고 간구합니다. 내 안에 있는 나약한 믿음과 죄의 본성을 물리쳐 주옵소서. 두려워 물러 서거나, 좌절하여 고개를 떨구거나, 할 수 없다고 부정하고 부인하는 자가 아니라,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용기있게 자원하는 십자가의 정병이 되게 하옵소서. 드보라와 바락에게 용기를 주시고 승리의 확신을 주시고, 가장 앞서서 전쟁에 나선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믿사오니 내 삶에도 하나님이 앞서 가시는 은혜와 역사를 보게 하시고 경험하게 하옵소서. 내게 허락하신 삶과 힘을 주를 위한 일에 다 쏟아 부을 수 있도록 믿음의 용기를 더하여 주옵소서. 내게 사명을 주시며 나를 선택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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