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나눔

오늘의 말씀묵상 8-1-2021 주일 빌레몬서 1:1-14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8-01 08:23
조회
885

8. 1. 주일. 오늘의 말씀묵상 찬양링크 “주를 향한 나의 사랑을”:

[본문: 빌레몬서 1:1-14]
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2.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4.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5.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6.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7.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9.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13.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본문이해]
생명의 삶 책자를 사용하시는 분은 20페이지에 나오는 ‘한 눈으로 보는 성경’ 해설편을 꼭 읽어 보시기를 권고 드립니다. 해설편에 기록된 빌레몬서의 목적을 옮겨오면; “바울이 빌레몬으로 하여금 도망친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주 안에서’ 형제로 받아들이도록 부탁하기 위해 쓴 개인적인 서신이다. 당시의 법과 관행에 따르면 주인의 돈을 훔쳐 달아난 종이 붙잡힌 경우 사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바울과의 만남을 통해 오네시모는 복음을 믿고 새사람이 된다. 이에 바울은 오네시모의 잘못과 빚을 자신이 책임지고 떠안으려 하며, 빌레몬에게 사면과 선처를 간곡히 요청한다.’

혹독한 노예제도가 시행되던 당시에는 오네시모의 경우와 같이 노예의 도주 문제와 참회하는 노예의 귀향 문제가 교회 공동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G. Plinius가 친구 Sabinianus에게 보낸 당시의 편지”를 참고해 보면, 플리니우스는 자신에게 찾아온 사비니아누스의 노예를 변호하면서 당시 사회에 반향을 불러 일으킨 기록이 있습니다. 즉 노예제도와 인권의 변호 문제는 당시에 사회적 문제로까지 확산되었던 적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교회 공동체와 사회문제를 감안해 본다면 빌레몬서는 주 안에서의 노예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다룬 서신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본 서신에서 노예 제도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는 방식이 아니라, 노예들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에 대한 변화를 강조함으로 제도적 접근보다는 인격적, 관계적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제도를 바꾸고 사회법을 바꾸어도 사람을 노예로 바라보는 인식과 시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 개혁은 실제적 효과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인격적, 관계적 접근과 인식의 변화를 통해서 노예를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바꾸기 위한 복음 안에서의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전의 제목은 “프로스 필레모나”로 번역하면 “빌레몬에게” 입니다. 수신자 빌레몬의 이름을 반영하여 영어 성경들은 “Philemon”으로, 한글성경은 “빌레몬서”로 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바울이며, 본 서신서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와 함께 바울이 옥중에서 기록한 서신으로 분류되며,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와 거의 같은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면 기록 시기는 바울이 제1차 로마에 가택 연금 상태로 수감된 주후 60-62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1-3, 문안인사]
자신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로 표현한 바울은 편지의 수신자들인 빌레몬, 압비아, 아킵보, 그리고 빌레몬의 가정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 보냄을 밝히면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임하는 은혜와 평강을 비는 축복을 하며 문안인사를 합니다.

1절,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 바울은 여러 서신의 서두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수신자 및 교회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자신을 표현하는 수식어를 다르게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사도직을 강조할 때는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 소개합니다(고후 1:1, 갈 1:1).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자신을 “파울로스 데스미오스”, 즉 “갇힌 자 된 바울”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갇힘’이 개인적인 범죄 때문이 아니라 복음 때문임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갇혔다’라는 뉘앙스가 노예 신분으로 어려움에 처한 오네시모의 상황과 연결고리가 형성되고 있음을 은연중에 말하고 있습니다. “갇힌 자”라는 표현을 바울은 빌레몬서에서 4번(1, 9, 10, 13절)이나 사용하면서 복음 안에서 갇힌 자 되고, 복음으로 회심하여 자유자가 됨을 연결하면서 수신자 빌레몬의 마음에 바울과 오네시모를 동일시하는 감동을 주고 있는 셈입니다.

1절, “형제 디모데”: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와 친분은 당시 초대 교회에 익히 알려져 있었을 것입니다. 빌레몬서에는 “형제(헬, 아델포스)”라는 말이 디모데를 향하여(1절), 그리고 빌레몬을 향하여(7, 20절), 끝으로 오네시모를 향하여(16절) 총 4번이나 사용됩니다. 이 표현을 바울의 의도적인 표현으로 고려해 본다면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하여 디모데와 자신이 동일한 믿음을 가진 친밀한 사이였음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빌레몬은 물론 오네시모도 주 안에서 동일한 ‘형제’ 임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바울은 빌레몬으로 하여금 그가 자신을 친근하게 형제로 대하는 것과 같이 오네시모를 형제로 대해 줄 것을 담고 있는 용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1절, “빌레몬”: 빌레몬에 대한 신분과 가정의 배경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교회 전통과 구전에 의하면 그는 골로새 출신의 부자로서 바울에 의해, 혹은 골로새 교회를 설립한 에바브라(골 1:7)에 의해 회심한 그리스도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을 동역자로 생각하였으므로 그는 골로새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사랑을 받는 자(헬, 아카페토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바울의 동역자들 가운데 ‘사랑을 받는 자’라는 단어로 표현된 사람들은 에바브라, 자신의 주치의였던 누가(골 4:14), 그리고 자신과 항상 동행하고 사역을 도우며 골로새서와 빌레몬서의 전달자인 두기고와 오네시모(골 4:7, 9) 입니다. “사랑을 받는 자”라는 단어로 표현된 이들은 모두 복음의 사역에 헌신적인 일꾼들이었으므로 빌레몬에게 이런 표현이 붙여진 것은 그도 역시 다른 동역자들과 같이 복음 전파에 매우 헌신적인 자였음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2절, “압비아, 아킵보”: 이름의 의미는 “가장 사랑하는 자매”라는 이름의 뜻으로 빌레몬의 아내입니다. 아킵보라는 이름의 의미는 “말 주인”이라는 뜻으로 빌레몬의 아들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바른 결정을 위해 그의 아내 압비아와 아들 아킵보를 수신자에 포함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4:17에 의하면 바울은 아킵보에 대해서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라고 말합니다. 즉 아킵보가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격의 직분자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2절 “교회”: 헬라어로 “에클레시아”에 해당하는 “교회”라는 말의 직역은 “밖으로”란 뜻의 “에크”와 “부르다”라는 뜻의 동사 “칼레오”가 합성된 말입니다. 즉 “밖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란 뜻입니다. 3세기 전까지는 교회의 단독 건물 형태가 없었기 때문에 초대 교회 당시의 교회는 건물 개념이 아니라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킵니다. 즉 바울은 빌레몬의 집에 모인 가정 교회 성도들 또한 서신의 수신자로 밝히면서 성도 간에 나누어야 할 사랑과 용서에 대한 교훈을 목적한 서신이 빌레몬서라 볼 수 있습니다.

[4-7, 빌레몬으로 인한 감사 및 그를 위한 기도와 칭찬]
바울은 자신이 기도할 때마다 항상 빌레몬을 기억하며 감사하고 있음을 밝히는데 그 이유는 주님과 모든 성도들에 대한 그의 사랑과 믿음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빌레몬을 칭찬하기를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통하여 그의 믿음의 교제가 역동적으로 그리스도께 이르게 되며, 성도들이 마음의 평안을 얻게 한다고 칭찬합니다. 또한 바울 자신도 그의 사랑으로 인하여 큰 기쁨과 위로가 된다고 말합니다.

5절, “사랑과 믿음”: 바울 서신서에는 이 두 단어가 들어간 표현이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두 단어를 사용해서 표현할 때는 주로 “믿음과 사랑”의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딤전 1:5에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라고 표현하면서 믿음과 사랑의 순서적 관계를 고정화 시킵니다. 이는 바울 신학에 있어서 사랑은 실천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믿음의 소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사랑’을 같이 언급할 때 대부분 믿음을 앞세우는 어법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레몬서에서는 바울의 일반적인 어법과 다른 순서로 표현하여 “사랑과 믿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빌레몬서의 주된 내용이 노예 오네시모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를 믿음의 형제로 받아들이라는 사랑을 근거로 하는 바울의 사도적 권면이기 때문이라 볼 수 있습니다.

6절,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이 문장의 한글성경의 표현의 뉘앙스는 빌레몬의 믿음의 교제가 선을 알게 하는 결과와 그리스도에게 이르도록 하는 결과를 불러 일으키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의 직역은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선에 대한 지식에 의하여(통하여) 그리스도를 향하여 역사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결과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에 이르는 것”의 원인이 빌레몬의 믿음의 교제 때문이 아니라, “선에 대한 지식(영역 NASB ”through the knowledge of every good thing”, KJV “by the acknowledging of every good thing”) 때문에 빌레몬의 믿음의 교제가 그리스도에게 이르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는 것은 우리 믿음의 교제라기 보다는 선에 관한 지식과 깨달음, 곧 복음에 관한 지식과 앎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7절,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많은 성경 학자들은 빌레몬이 성도들에게 베푼 사랑을 당시의 실제적인 사건과 연관지어 유추하곤 합니다. 당시에 부유했던 빌레몬이 갈라디아 지역의 부르기아 지방에 ㅇ리어난 지진의 피해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입은 사람들을 도운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지진으로 기업의 터를 잃고 생활의 어려움으로 여러 가지 근심 걱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빌레몬이 도움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평안케 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8-10, 명령이 아니라 사랑에 근거한 바울의 보증과 호소]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도된 자로 당당하게 명령할 수도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에 근거하여 호소하고 있습니다. 중재자 역할인 바울은 자신의 연로함과 옥중에 갇혀 있는 상황을 빌레몬에게 상기시키면서 오네시모가 옥중에서 전도의 열매로 얻은 영적 아들임을 강조하며 그를 위해 호소하며 중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전에는 빌레몬에게 “무익한 자”였으나 이제는 바울과 빌레몬에게 “유익한 자”라고 보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신의 심복이라 칭하면서 그를 빌레몬에게 돌여 보내는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즉 오네시모를 그냥 바울의 곁에 두고 자신을 시중들게 하면 좋겠지만 빌레몬의 허락 없이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아 그를 돌여 보내게 되었음을 밝힙니다.

8절, “마땅한 일로”: 한글성경의 번역은 “마땅한 일”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문구의 헬라어는 “토 아네콘”의 직역은 수단이나 방법의 “~으로”라는 번역보다는 “~을(를)”에 해당하는 목적격으로 “마땅한 일을”라고 번역되어야 합니다. 즉 본문의 뉘앙스는 바울이 “빌레몬에게 마땅한 일을 하라고 명할 수도 있으나”라고 번역되는 것입니다. 즉 오네시모를 받아 들이고 용서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마땅한 일이므로 바울이 사도적 권위로 명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9절에서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라고 말하므로 바울은 명령보다 간청, 호소를 택하면서 호소와 간청의 근거가 ‘사랑’ 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빌레몬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경험한 사랑, 혹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에서 특징지워지는 보다 넓은 의미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10절, “오네시모”: 이름의 뜻은 “유익한 자”라는 뜻으로 당시 노예들 가운데 흔한 이름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는 골로새 출신 빌레몬의 노예로서 이교도였을 것입니다. 주인 빌레몬의 집에서 물건을 훔쳐서 도주한 오네시모의 행위는 주인의 노여움을 사기에 충분하였으며, 사형을 당한다해도 변명조차 할 수 없는 중죄라 할 수 있습니다. 빌레몬이 바울의 편지에서 오네시모라는 이름이 거론되었을 때에 아마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도망자 노예가 바울의 영적 아들로 거듭났다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11절에서 전에는 “무익한 자”(헬, 아크레스톤) 오네시모나 이제는 자기의 이름의 뜻 그대로 “유익한 자”(헬, 유크레스톤)가 되었음을 밝히면서 그 근거가 그의 회심과 믿음에 근거함을 밝히고 있습니다.

12절, “심복”: 이 단어의 헬라어 “스플랑크나”는 본래 “창자, 내장”을 지칭하는 단어로서 당시 헬라 사람들은 인간의 감정이 내장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에 기인합니다. 따라서 이 단어는 ‘긍정적 감정, 친절, 자비심, 동정심’과 같은 추상적 의미의 “마음”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헬라 문화에서는 부모들이 자녀를 가리켜 자신의 “스플랑크나”라고 부르면서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자녀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때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본문 12절의 한글 성경에는 “심복”으로 번역되었으나 7절에서는 “성도들의 마음”이란 문구에서 “마음”으로 한글 성경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한글 성경이 “심복”이라는 말로 번역한 것은 주인의 마음에 긍정적 감정을 갖도록 해 주는 종이나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자를 가리킨다는 의미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14절,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마음대로 활동할 수 없는 매인 몸인 바울은 자신에게 지극한 정성과 헌신을 하는 오네시모를 자기 곁에 두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그를 자기 곁에 두지 않고 빌레몬에게 돌려보낸 이유가 1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묵상 및 적용]
초대교회의 역사적 자료들을 근거로 볼 때 적어도AD 3세기 이전에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특별한 건물을 세웠다는 증거를 찾기 힘듭니다. 그렇다면 과연 초대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예배를 드렸을까요?

많은 기록들에 의하면 신실한 그리스도인 가정마다 많으면 몇 십명 가량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고 믿음과 사랑 가운데서 똘똘 뭉쳐 신앙생활을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2장 12절에 의하면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라고 표현하면서 성도의 집이 기도의 장소로 제공된 것을 보면 가정 교회 공동체의 모임 장소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빌립보의 자주 장사 루디아도 자신의 집을 교회의 모임 장소로 드렸으며(행 16:40), 에베소의 아굴라 부부의 집도 교회였으며(고전 16:19), 라오디게아의 ‘눔바와 그 여자의 집’(골 4:15)도 가정 교회였습니다.

즉, 초대교회 당시에 교회란, 가정을 중심으로 집에서 모인 가정 교회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가족과 같이 친밀하게 교제하는 그런 공동체였습니다. 따라서 서로서로 모르는 사람이 없고 아무도 소외됨이 없어야 했고,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며 질적으로 매우 높은 믿음의 영적 수준을 유지하는 교회였을 것입니다. 물론 세월이 흘러 기독교가 확산, 확장되면서 도시 안에서 그 중심을 차지하는 위치에 건물로서의 교회들이 세워지게 됩니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성경적 의미의 교회란 건물이 아니라,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믿는 자들이 모이는 공동체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 “교회”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 말의 헬라어 “에클레시아”는 “밖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의 모임”, 또는 “~로부터 부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다른 헬라어 단어들도 있었을 텐데 하필 “에클레시아”라는 이 단어를 채택했을까요?

이 단어는 헬라의 민주주의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는 시의회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헬라 문화에서 시의회는 공동체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공동체 구성원 스스로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의사를 결정하여 실행에 옮기는 민주 정치와 맥락이 닿아 있는 체제입니다. 바울의 생각을 민주정치 체제라는 시스템에 집중하지 않고 목적에 집중하면 어느 정도 바울의 의도를 미루어 집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민주정치 체제의 최종적인 목적은 의사 결정 과정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하여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나로 뭉치는 것입니다. 의견의 다양성만 분분하고 하나로 뭉치지 못한다면 결국 민주정치 시스템의 성립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에클레시아’로서의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다양한 의견들이 분분할 수 있는 곳이지만, 하나로 의견 수렴이 되어야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가정 교회에서 시작한 교회는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간다’라는 속담이 적용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다양성 가운데 하나로 뭉쳐서 섬기는 것을 지향하는 모임이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섬기는 것”의 대상이신 영원 불변하신 하나님을 대체할 분이 전무후무하다는 것을 믿고, 그 분을 다양성 있게 섬길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섬김과 하나됨의 모든 것이 “공동체”라는 모임과 무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빌레몬서의 본문을 묵상하면서 놀라운 점은 바울의 관심이 공동체나, 공동체 구성원들의 ‘다양성’에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럼 어디에 있을까요? 제가 느낀 생각은 어쩌면 “공동체”를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잃어버리기 십상이 “개인, 즉 자아”에 집중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공동체”의 의미가 강한 교회, “에클레시아”를 사용하면서 그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 “개인,” 오네시모에게 집중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오네시모를 향해 어쩌면 분노를 가지고 있을 법한 한 “개인”인 빌레몬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울의 관심이 교회로서의 “공동체”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은 분명히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빌레몬서에서는 한 개개인을 향한 관심과 배려, 사랑과 용서, 그리고 호소와 보증을 통해서 한 명, 한 명의 개개인을 회복시키고 격려하고 살리는 것이 결국 공동체의 회복과 기쁨으로 이어짐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성도들을 군대로 비교한다면 “성도들은 서로 영적 전우”라 볼 수 있습니다. 성도는 완전한 하나님 나라로 향하여 하는 도상에서 우리의 대적자 사단과 싸워야 하며, 영적 전투의 현장에 처할 수 있음을 잊지 않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군대가 싸워야 하는 전투 현장에 투입되기 전에 승리하기 위해서 군인은 첫 번째 전투 현장이라 할 수 있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만 합니다. 이는 신앙적으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성도는 자신 자신과의 영적 전투에서 이기지 않고서는 공동체 영적 전투의 현장에 투입조차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자신과 빌레몬, 그리고 오네시모의 관계 속에서 공동체의 목적이나 요구를 들이 밀기 이전에 개개인의 마음 속에 쌓일 법한 것들을 내놓고 해결하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명령이나 권고가 아니라, 사랑에 근거하여(1:9) 호소하므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문제의 답을 빌레몬 스스로가 찾아 해결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신앙의 지혜의 ‘끝판 왕’을 보여주고 있는 아닐까요? 바울이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개인에게 집중하였듯이 한 영혼, 한 영혼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결국 교회와 더 넓게는 하나님의 나라에 닿아 있는 것입니다.

전도서 4:10-12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라는 말씀처럼 서로 하나된 교회 공동체가 되기 위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바울이 빌레몬과 오네시모를 보았듯이 우리 안에 회복될 동무들은 누가 있을까요? 오늘 거룩한 주의 날, 그 동무를 찾아보기를 원합니다.

[기도]
사랑의 주님! 주님만을 송축하며 높여 드리기를 원합니다. 나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며 일으켜 주옵소서. 무익한 자 오네시모가 유익한 자 오네시모로 변화된 것처럼 나의 삶을 만져 주셔서 주를 알게 하시며, 믿음으로 일어서게 하시고 회복되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 주변에 쓰러질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넘어진 동무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로 하여금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여호와 하나님의 그 날이 이르기 전에 담대하게 세상을 향하여 부름 받은 택한 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주의 영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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