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나눔

오늘의 말씀묵상 2/24/2021 수요일 [마태복음 17장 1-13절]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2-24 09:10
조회
907

2. 24. 수요일. 오늘의 말씀묵상

찬양링크 “십자가의 전달자”: " target="_blank" rel="noopener">

[본문: 마태복음17:1-13]
1.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6.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
7.예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
8.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9.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본문이해]
오늘의 본문은 성육신(Incarnation), 수난(Crucifixion), 부활(Resurrection), 승천(Ascension)과 함께 예수님의 생애의 5대 사건이라 불려질 만큼 중요한 변화산(Transfiguration)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신다는 수난예고를 듣고 혼란과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던 제자들에게 고난과 죽음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다시 부활하셔서 영원한 승리자가 될 것임을 예시함으로 제자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며(막 9:2-8, 눅 9:28-26), 누가의 기록이 가장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가버나움으로 가는 행로에서 일어난 이 사건에 등장하는 ‘높은 산’은 정확히 어느 산을 말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학자들마다 다볼산, 헐몬산 등등의 주장이 있지만 신빙성이나 지정학적 위치나 산의 환경을 고려할 때에 정확하지 않으므로 현재까지는 정확한 산을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1-8절에서 산에 올라간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같이 올라간 주님의 모습이 영화로우신 모습으로 변형되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주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하시는 신비로운 목격을 하고,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놀라운 체험을 한 제자들이 두려워하자 주께서 안심시켜 주십니다. 9절에서 예수님께서 산을 내려올 때 자신의 부활 때까지는 산에서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세 제자들에게 명하십니다. 10-13절에서는 엘리야에 대해 세 제자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혹자는 변화산의 사건이 환상으로 본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본문 3절의 “그들에게 보이거늘”이라는 문장에서 사용된 동사 ‘보이거늘’은 분명히 체험한 사실임을 나타내는 ‘역사적 부정과거(Historical Aorist)’의 수동태 용법입니다. 즉 제자들이 목격한 변화산의 사건은 모든 것이 직접 체험한 역사적 사건이며, 또한 자신의 주관적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눈으로 확인된 객관적인 사건입니다. 마태는 예수님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모세와 엘리야가 어떤 대화를 했는지 기록하지 않지만, 누가는 눅 9:31에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라고 기록하므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의 완성을 위해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고초와 죽음을 주제로 상의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5절 말씀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라는 문장 앞에 헬라어 성경에는 “보라!(Behold)”라는 말에 해당하는 감탄사 단어가 있습니다. 마태는 이 단어를 사용하므로 눈 앞에 벌어진 사건이 전혀 예상치 못한 실로 놀라운 사건이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여진 소리와 동일합니다. 이러한 선포는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에서 예언된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즉 유일한 구원자되심을 확증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늘의 소리를 통해서 앞서 등장한 모세나, 엘리야보다 예수님이 훨씬 더 위대한 분임을 하나님께서 직접 보증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9절에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고 제자들에게 함구명령을 내립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함구 명령은 마태복음 8:4, 9:30, 12:16, 16:20, 그리고 본문에 등장합니다. 본문을 제외한 다른 본문의 함구명령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시지만, 본문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후’에는 말을 해도 좋다는 제한적 허용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함구명령의 이유는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때를 따라 잘 감당하기 위해서이며,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주님의 사명을 오해하거나 왜곡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부활 이후에는 말해도 될 것처럼 말씀하신 것은 메사아로서의 강력한 사역이 변화산 사건이 아니라, 부활이므로 부활 사건에 더 큰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10절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엘리야가 메시아에 앞서 올 것이라는 예언은 말라기 3장 1절과 4장 5-6절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의 예언을 메시아 출현의 결정적 증거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변화산에서 엘리야를 목격한 제자들에게 궁금증이 생겼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궁금증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메시아가 오면 회복될 것으로 생각한 이스라엘의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상황에 대한 궁금증이며, 말라기에 나온 엘리야가 직접 또 다시 제자들의 시대에 다시 올 것이라는 것에 대한 궁금증이며, 또한 엘리야 이후에 오시는 메시아에 의해서 회복이 일어나는데 이렇게 회복될 환경에서 주님이 죽으신다고 말씀하시니 예수님의 메시아되심에 대한 궁금증 등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위의 10절에 등장하는 제자들의 궁금증에 대해서 예수님은 11-12절을 통해 엘리야가 이미 왔으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다고 답변하십니다. ‘임의로’(헬, 에델레산)라는 말은 ‘원하다, 기뻐하다, 즐기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동사의 부사형태로 ‘자신들이 기뻐하는 욕구에 따라 마음대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엘리야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와서 회개와 갱신을 선포하였던 세례 요한을 세상이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미워함으로 죽이게 된 사실을 예수님께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묵상 및 적용]
여호수아가 모세를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이끄는 2번째 지도자로 세워질 때였습니다. 그는 두렵고 떨렸습니다. 출애굽 이후에 광야생활을 거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향과 변화무쌍한 성정을 고려할 때에 도저히 그들을 인도할 자신감이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모세처럼 뛰어난 능력이나 지도력도 없다고 스스로를 평가하고 나니 더더욱 자신감이 없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라고 여호수아 1장 5절에 말씀하십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세의 징조들을 말씀하시면서 믿는 자들이 당할 박해와 고난,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었던 제자들은 두려웠을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다니는 것은 주님 때문에 핍박과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영화와 권세를 누리기를 원했던 제자들의 솔직한 심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세의 징조에 맞설 용기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라고 누가복음 21장 15절에 말씀하십니다.

구약과 신약의 두 가지 예를 통해서 오늘 말씀과 연관하여 두 가지를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여호수아와 제자들에게 사명을 감당할 힘을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언제나 사명을 주실 때 감당할 힘도 함께 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변화산 사건은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앞으로 벌어지고 닥칠 상황에 대해서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확증을 해 주는 사건이며, 감당할 힘을 주는 사건입니다.

사명을 감당할 힘은 ‘믿음’을 근거로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들이 사명을 감당하면서 살아 갈 수 있는 능력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명을 감당해야 할 사람들이 믿음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고 믿지 못한다면 핍박과 고난, 두려움이 있을 때에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변화산으로 데려 가십니다. 그리고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의 죽음에 대해서 나누신 말씀을 듣고, 또한 제자들이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므로 앞으로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언인가를 분명히 깨닫고,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둘째로, 사명을 감당할 힘을 얻었으면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내려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지금 자기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놀라운 광경과 장엄한 영광에 압도되어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산 위에 머무르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베드로의 답변은 장차 제자들에게 맡기실 사명과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망각한 태도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태도에 대해서 하늘에서 직접 말씀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사명을 가지고 세상 속에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도로서의 사명,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망각한 채 산 위에 초막을 짓고 머무르려고 하는 태도는 베드로의 태도는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베드로의 모습은 비단 베드로 한 사람의 모습일까요? 아닙니다.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면 우리들도 베드로처럼 산 위에 머물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따뜻한 분위기, 서로 교제하고 사귐이 있는 분위기, 은혜로운 찬양에 마음껏 취하였던 분위기, 뜨거운 기도의 경험들에 심취하여 도무지 그 울타리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베드로처럼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말하며 교회 안에서만 우리들 끼리끼리만 신앙생활 하려는 경향이 이는 것입니다. 이는 단호하게 신앙의 이기주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현실에 안주하라고 말씀하시기 보다는 ‘나가라, 전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요즘처럼 교회로 오기 어려운 코로나 시대에 다시 한번 주의 뜻과 하나님의 생각을 마음에 새기고 귀를 열고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쾌락과 환락에 젖어 있을 때에, 세상이 질병과 고통에 신음하고 있을 때에 성도들은 십자가를 지시고 세상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을 따라 세상으로 나아가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20장 21절에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씀하셨듯이 힘들고 어렵지만 이 코로나 시대에 더더욱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성도의 발걸음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기도]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현실에 안주하여 편안함에 도취되어 세상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지 않도록 성령 안에서 늘 깨어 있게 하옵소서. 바울의 고백처럼 저는 지극히 작은 자이며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부족한 저를 부르셔서 사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기대와 소망을 바라보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우리 주 예수의 능력을 힘입어 기대와 소망 부끄럽지 않게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죽음을 이기시고 영원한 생수의 근원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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