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나눔

오늘의 말씀묵상 2/23/2021 화요일 [마태복음 16장 13-28절]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2-23 09:46
조회
1088

2. 23. 화요일. 오늘의 말씀묵상

찬양링크 “말씀 앞에서(하나님 말씀에 두려워 떠는 자)”: " target="_blank" rel="noopener">

[본문: 마태복음16:13-28] 13.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21.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27.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본문이해]

(13-20절, 베드로의 신앙 고백 및 교회의 설립과 권세에 관한 예언) 13-14절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견해를 묻고 제자들이 그 대답을 합니다. 15-16절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묻자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합니다. 17-19절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은 주님께서 칭찬과 축복 및 교회 설립과 권세에 대해 예언을 하시고, 20절에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아직 알리지 말라고 경계하시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집중 공세를 받는 갈릴리 지역에서 북쪽으로 40km 떨어져 있고, 헐몬산 기슭의 해발 약345m에 위치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는 사람들의 대답을 듣고 주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이 때 그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등장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고백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이 표현이 등장하는 첫번째 시점은 예수님이 공생애 시작을 선포하는 세례 장면에서 등장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 즉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사건이 시작되기 직전에 다시 등장한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고백입니다.

본문 13절의 ‘인자’란 표현은 말뜻대로 풀이하면 ‘사람의 아들’로서 보편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이지만, 묵시적 전통에 의하면 메시아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신약성경에 82회 사용되며, 그 중에 두번만 제외하고(눅 24:7, 요 12:34) 모두 예수님의 직접 화법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마가는 14번, 누가는 25번 사용한 반면 마태는 30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본문과 병행구절인 막 8:27, 눅 9;18에서는 ‘인자’라는 표현이 나와 있지 않는 이유는 복음서의 일차적인 대상이 이방인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구약의 묵시적 배경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인자’라는 말이 메시아 사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모르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으므로 이 칭호를 삭제하고, ‘나’라는 1인칭 칭호를 사용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16절의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서 주님이 알려 주시는 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계시적 은혜에 의해서 우리의 신앙고백과 믿음이 세워진다는 것으로 믿음이란 인간 스스로의 지식과 의지와 사색의 산물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이런 신앙 고백의 바탕 위에서 교회가 설립되고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고백의 반석 위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뜻인 “맺고 푸는” 사역을 감당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베드로의 고백의 헬라어 성경의 직역은 “당신은! 그 그리스도이십니다(You! You are the Christ)”라는 의미입니다. 원래 ‘주’라는 말은 들어 있지 않지만, 2인칭 대명사를 사용해서 제3자의 웃어른을 가리키는 극존칭 대명사인 ‘당신’이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또한 ‘그리스도’ 앞에 정관사가 붙어서 ‘그 그리스도’라고 번역될 수 있는데 이 말의 의미는 구약 성경에서부터 선지자들을 통해 오실 메시야로 예언된 바로 그분이심을 뜻하기 때문에 정관사를 붙여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국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에 대해서 내용적으로도, 심지어 문법적으로도 정확한 고백이며, 마태는 이러한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서 진정한 메시야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예수님이심을 강하게 확신하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18절에 등장하는 ‘교회(헬, 에클레시아 ekklesia)’라는 단어는 사복음서 중에서는 유일하게 마태복음에만 3회 기록되어 있습니다(마 18:17에 2회). 이 단어의 의미는 ‘~로 부터’라는 뜻의 ‘에크’와 ‘부르다’라는 뜻의 ‘칼레오(kaleo)’가 결합된 단어로 교회란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라는 문자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즉 교회란 일차적으로 세상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18절에서 “반석”라는 말의 헬라어는 ‘페트라’인데 그 뜻은 ‘바위, 반석’으로 베드로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본문 18절의 반석이 문법적으로 베드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반석’은 여성단수이고 ‘베드로’는 남성단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같은 의미의 단어를 사용하시므로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반석’이란 베드로와 관계가 깊은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앞에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고백이라 볼 수 있습니다. 즉 베드로와 같은 신앙고백 위에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는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이며, 교회란 주님이 누구이신가를 분명하게 고백하는 신앙공동체의 모임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9절 “천국 열쇠를 내게 주리니”라는 말씀에서 카톨릭은 사도 베드로가 교회의 통치권을 부여 받았고, 그 직계 후계자인 교황 역시 동일한 권리를 소유하게 된 근거 구절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하신 후 발설하지 말도록 제자들에게 경계할 것을 명령하신 점이나 베드로 혼자가 아니라, 제자들 모두에게 이와 동일한 능력이 있음을 마태복음 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에 카톨릭의 주장은 지나친 면이 있습니다. 오히려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 모두의 대표로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으로 복음을 전할 사도직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21-28절, 예수님의 첫번째 수난 예고)
21절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받을 수난과 부활을 최초로 예고하시는 내용이며, 22-23절은 예수님의 수난을 만류한 베드로가 예수님께 오히려 책망을 받는 내용이며, 24-28절은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제자들의 기본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21절의 “이 때로 부터”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로 계시되고 공개된 때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구약과 유대교가 기다려 왔던 그리스도, 즉 메시아가 이 세상에 왔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면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고, 이스라엘은 속박에서 풀려나며 경제적으로 번영하게 되고, 종교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게 된다는 메시아 사상으로 희망이 완성되고 기쁨이 요동치는 것이며 정의가 승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알고 있었왔던 메시아 사상과 실제 예수님의 사역이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위기 의식이 등장합니다. 그 위기 의식 속에서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진리가 선포됩니다. 곧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수난에 관한 선언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승리자이며, 적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선언하기 일보 직전에 패배자처럼 죽음을 수용해야 한다는 수난 예고는 상식적으로 반발을 불러 있으키기에 충분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식적인 반발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는 인물이 다름 아닌 방금 전에 위대한 신앙 고백을 했던 베드로입니다. 22절에 ‘항변하여’라는 말의 헬라어는 ‘에피티만’으로 이는 ‘책망하다, 꾸짖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대해서 불만을 표시하거나 반대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꾸짖었다’라는 의미입니다. 스승에 대한 제자로서의 충성심으로 수난에 대한 주님의 선언에 대해서 강하게 반발하였던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24절 이후에서 주님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한다고 말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인간적인 뜻을 접고 죽음을 통한 부활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세상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발생하게 되는 모든 불이익과 희생을 감수하는 것을 포함하는 신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주님께서 먼저 걸어 가시고 보여 주신 참다운 생명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을 선택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된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주께서 재림할 때에 보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보증하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에 기록된 ‘제자’라는 말은 ‘배우는 자’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는 제자도에 대해서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배운다라는 것은 따르는 것을 기초로 하므로 따르는 것이 배제된 신앙, 제자의 길은 껍데기뿐인 열매와 같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어떠한 교리를 믿는 것으로 ‘할 것을 다 했다’라고 안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으로 보여준 방식을 27절의 말씀의 표현처럼 “그 행한 대로”, 곧 실천하고 따르는 것이 제자의 마땅히 가야 할 길입니다.

[묵상 및 적용]
두 개의 의견이 충돌하면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논리적인 주장이나 설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논리적인 주장과 설득을 듣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하지만 선택의 일반적인 절차와 상관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나의 주장과 다른 사람의 주장이 충돌하게 될 때입니다. 물론 이 때에도 각자의 주장이 옳거나 더 낫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논리와 설득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주장이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있다면 어쩔 수 없이 결국 내 주장을 포기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자기 주장이나 의견을 포기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 속에 내 주장이나 의견을 포기한다는 것은 웬지 지는 것 같고, 웬지 마음 한 구석에 미련이 남기 때문입니다. 자기 주장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런 생각은 더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두 의견이 심하게 충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베드로의 마음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본문 21절에서 주님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라는 말씀의 표현에는 헬라어 성경에는 있지만, 한글번역에 빠진 뉘앙스가 있는데, 바로 “반드시~해야만 한다(영, must)”라는 의미입니다. 즉 21절의 직역은 주님께서는 ‘반드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만 한다’라는 뜻으로 예수님의 굳은 의지의 표현이 담겨 있고 절대로 뒤바뀔 일은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결연한 의지 이후에 22절에서 예수님의 의견과 충돌하는 베드로의 의지가 등장합니다. 베드로의 의지는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는 말 속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반드시”라고 말씀하시고, 베드로는 “결코”라고 표현하는데 두 의견이 서로 충돌하며 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반드시” vs “결코” 이 두 부사적 개념은 글자 그대로 타협의 여지가 없는 개념입니다. 즉 두 개념은 충돌할 수 밖에 없고 어느 하나가 물러서야만 끝날 수 있는 강한 주장입니다. 타협이 없고 중간 지대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베드로는 감히 주님을 꾸짖듯 책망하듯 “항변’하기에 이르렀고, 주님은 16절에서 역사 이래 최고의 신앙 고백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는 고백을 했던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라고 말씀을 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주장은 인간적인 태도와 마음을 생가한다면 사실 십분 이해할만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정말 좋아했고 따랐던 사람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을 좋아하고 따랐지만, 주께서 가지고 있는 “뜻”이라고 표현할 수 있고, 또는 “사명”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그 분의 마음이 원하시는 것을 따르는 것까지는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판단한다면, 베드로의 주장은 사람의 생각이요, 예수님의 주장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의 태도는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만을 생각한 것이기에 예수님의 뜻과 사명에는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어떤 상황에서는 너무나 치열한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 치열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반드시 고난을 당해야 하고, 죽임을 당해야 하는” 생과 사의 기로에 처해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합니다.

우리 마음에 부인할 수 없는 고민은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충돌하고 갈등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충돌과 갈등이 치열한 삶의 문제이며, 생사의 선택의 문제라면 믿음의 고백을 했던 순간처럼 쉽게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따르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래도 축복받은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잘못된 생각을 했을 때에 그 즉시 꾸짖어 주시고 고쳐 주신 예수님이 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대는 내 곁에 주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으며, 또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성령 안에서 영적으로 민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따르기가 어려운 혼탁한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치열한 선택의 기로에서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기가 더더욱 힘든 시대요, 세대입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에 득이 되는 결정, 좋은 결정, 생(生)을 위한 결정은 누구나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에게 해가되는 결정, 나 자신을 위해서는 좋지 않은 결정, 사(死)를 위한 결정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나를 위한 결정이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한 결정을 선택하는 훈련과 죽을 각오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훌륭한 군인이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상관의 ‘돌격 앞으로!’라는 죽을 수 밖에 명령에 주저함이 없이 나갈 수 있는 것은 훈련의 결과가 첫째이며, 그 둘째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나설 수 있는 이미지 트레이닝이나 결사각오를 늘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주님을 따르는 제자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24-25절에 주께서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뜻, 내 주장, 내 의견, 내 경험, 내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자가 바로 ‘제자’요, ‘그리스도인’ 입니다.

찬양 중에 “말씀 앞에서”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두려워 떠는 자”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찬양의 가사가 힘들고 어려운 시대를 사는 성도에게 오히려 힘과 격려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 찬양의 가사가 오늘의 기도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기도]
우리를 위하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죽음을 선택하신 예수님!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사랑의 주님께 고백합니다. “말씀 앞에서 경외함으로 주께 홀로 섭니다. 생명의 말씀 읽고 순종하며 주를 예배합니다. 기록된 말씀 힘이 있어서 진리로 우리를 거룩케 하시며, 거룩한 말씀 세세 영원히 복음이 되어 말씀하소서. 하나님 말씀에 두려워 떠는 자, 그 말씀에 생명을 거는 자! 한 사람 찾으시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어 하나님 말씀에 운명을 거는 자, 순종하며 주 따라가는 자! 영원한 하나님 나라 이뤄 갈 주의 교회여(백성이여) 일어”나게 하옵소서. 죽음의 십자가를 통해 승리를 이루신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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