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나눔

오늘의 말씀묵상 10/6/2020 화요일 [본문: 예레미야 43장 1-13절]

작성자
KCPC ADMIN
작성일
2020-10-06 12:53
조회
813


 

오늘의 말씀묵상

[본문: 예레미야 43장 1-13절]
1.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 곧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신 이 모든 말씀을 말하기를 마치니
2.호사야의 아들 아사랴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오만한 자가 예레미야에게 말하기를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는 애굽에서 살려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너를 보내어 말하게 하지 아니하셨느니라
3.이는 네리야의 아들 바룩이 너를 부추겨서 우리를 대적하여 갈대아 사람의 손에 넘겨 죽이며 바벨론으로 붙잡아가게 하려 함이라
4.이에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군 지휘관과 모든 백성이 유다 땅에 살라 하시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5.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군 지휘관이 유다의 남은 자 곧 쫓겨났던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유다 땅에 살려 하여 돌아온 자
6.곧 남자와 여자와 유아와 왕의 딸들과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맡겨 둔 모든 사람과 선지자 예레미야와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거느리고
7.애굽 땅에 들어가 다바네스에 이르렀으니 그들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함이러라
8.다바네스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너는 유다 사람의 눈 앞에서 네 손으로 큰 돌 여러 개를 가져다가 다바네스에 있는 바로의 궁전 대문의 벽돌로 쌓은 축대에 진흙으로 감추라
10.그리고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내 종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을 불러오리니 그가 그의 왕좌를 내가 감추게 한 이 돌들 위에 놓고 또 그 화려한 큰 장막을 그 위에 치리라
11.그가 와서 애굽 땅을 치고 죽일 자는 죽이고 사로잡을 자는 사로잡고 칼로 칠 자는 칼로 칠 것이라
12.내가 애굽 신들의 신당들을 불지르리라 느부갓네살이 그들을 불사르며 그들을 사로잡을 것이요 목자가 그의 몸에 옷을 두름 같이 애굽 땅을 자기 몸에 두르고 평안히 그 곳을 떠날 것이며
13.그가 또 애굽 땅 벧세메스의 석상들을 깨뜨리고 애굽 신들의 신당들을 불사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하시니라

[본문이해]
1-7절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떠나지 말고 본토에 거주하라는 예언의 말씀이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사랴와 요하난과 남은 자들은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예레미야 선지자를 거짓말하는 사람으로 몰면서 애굽의 다바네스(다바네스는 지리적으로 이집트 나일강 하류의 삼각주 동편에 있는 도시로 현재는 텔 다프네로 추정되며, 애굽 26왕조의 프삼메키쿠스 요새가 있고 동서의 교통의 관문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이다. Jerome이 전하는 전승에 의하면 이 도시에서 동족인 유다 백성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하는데 정확히 확인된 바는 없다)로의 이주를 감행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2절에 표현된 “모든 오만한 자”라는 표현은 렘 42:1의 “백성의 낮은 자로부터 높은 자까지 다”라는 말과 대조되는 뉘앙스가 있습니다. 오만하다는 것은 교만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러므로 예언의 말씀을 받을 때 남은 자들을 표현하는 렘 42:1의 표현에 비해 렘 43:2에서 불순종을 염두에 두고 있는 군지휘관들과 남은 자들을 표현하는 단어가 완전히 바뀐 것을 통해서 성경의 의도적이며 날카로운 지적임을 볼 수 있습니다. 3절과 6절에 등장하는 바룩은 선지자가 전한 하나님의 계시를 그대로 두루마리에 받아 적거나 때로는 낭독하는 충성스러운 예레미야의 개인 서기입니다(32:12-14).

8-13절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다바네스로 이주한 남은 자들에게 선지자를 통하야 예언의 메시지가 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을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여 애굽의 모든 신들과 집과 신상들 같은 것들이 옮겨지고 파괴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예언의 말씀은 BC586년 7월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애굽을 침공하여 바로의 권좌를 그대로 두지만 바벨론의 통치에 협력하도록 굴복시킴으로 역사적으로 그대로 성취됩니다.

12절의 “목자가 그의 몸에 옷을 두름 같이”라는 표현을 직역하면 “목자가 그의 옷을 입음 같이” 입니다. 이 표현은 매우 간편하고 손쉽게 어떤 일을 이룬다는 의미입니다. 즉 느부갓네살이 “애굽을 옷 입는다”는 표현은 그가 애굽을 정복하는 일이 매우 쉽게 이루어진다는 의미가 되는 셈입니다.

[묵상 및 적용]
본문을 묵상하면서 “나도 똑같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 적군이 다가오거나, 전쟁이 끝나고 속국이 되어서 힘들고 어렵게 살게 될 것이 분명하다면 가장 보편적인 선택은 ‘피난’입니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식구들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은 “떠나지 말고 그 땅에 남으라”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 치세에서 식민지인으로 사는 것이 불보듯 뻔하고 서러움과 억울한 일들이 한 두번이 아닐텐데 어떻게 그 땅에서 계속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지키고 순종하는 것은 생명을 걸수도 있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아마 내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나도 오만한 자들과 똑같았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믿는다면 이러한 인간의 의지와 생각을 뛰어 넘을 수 있어야 합니다. 피난이나 도피를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조건과 상황이지만, 현재 일이나 상황을 뛰너 넘어서 소망 가운데 하나님이 인도하는 손길의 미래를 보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아사랴나 요하난, 그리고 모든 사람의 생각 속에서 안전하다고 판단한 다바네스는 결코 피난처가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와 결정은 인간의 의지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안전하다고 판단하여 피하여도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가장 중요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이유 중에 한 가지는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지혜를 깨닫고 그대로 살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유나 상황 여하를 막론하고 성도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믿음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속에서 한 가지 더 묵상하고 싶은 내용은 바로 인본주의! 입니다. 인간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다는 좋은 의미도 있겠지만, 인본주의가 하나님의 생각과 부딪히면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선택하려고 할 때에 우리 안에 떠오르는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생각이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의 본문에 등장하는 아사랴나 요하난 같은 사람입니다.

아사랴와 요하난과 모든 오만한 자들이 예레미야를 거짓말 하는 사람으로 몰면서 하나님의 예언을 배척합니다. 하지만 지도자들이나 남은 자들이 예레미야를 배척하는 것은 결국 스스로 자기 모순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요청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구한 사람들이 바로 그들 자신들이었기 때문이며, 또한 어떤 것이든지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약속한 것도 그들 자신들이었기 때문입니다(렘 42:3-4). 도움을 청하고 도와 준다고 하니까, 그 도움의 방법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거절해 버리니 이러한 경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결국 방법과 길을 이미 자기들 마음에 정해 놓고 그대로 될 수 있도록 하나님으로부터의 신탁을 요청하는 셈이니 거꾸로 인간이 하나님께 명령하는 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성경의 표현에서도 렘 42:2에서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들었던 대상들이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호사야의 아들 여사냐와 백성의 낮은 자로부터 높은 자까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렘 43:2에서는 “호사야의 아들 아사랴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오만한 자가”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두 귀절에서 등장하는 여사냐와 아사랴는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두 귀절에서 주목할 점은 바로 요하난과 아사랴, 두 사람의 이름 순서의 뒤바뀜입니다.

사실 당시의 군 지휘관들 가운데 요하난이 항상 앞에 거명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제일의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하난은 그다랴에게 이스마엘의 암살 계획을 요청(렘 40:13-16)하기도 했으며, 미스바의 잔류민들을 구출(41:11-15)하기도 한 인물입니다. 어느 정도 상황 파악도 하고 결단력과 선한 마음도 가지고 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렘 43:2에서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는 내용의 본문에서 항상 첫번째에 거명된 요하난 대신 기록된 이름의 순서가 아사랴가 처음으로 등장하며 순서가 바뀝니다. 이를 통해 히브리 어법에 따라 애굽으로 가자는 주장을 아사랴가 주도적으로 주장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결정하도록 역할을 한 것으로 유추되는 것입니다. 아사랴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도우셨다”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이름처럼 행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본주의적 결정하고 맙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안타까운 점은 요하난입니다. 그는 당시의 상황에서 제일되는 지도자로서, 동료일 수도 있고, 어쩌면 자기 보다 낮은 부하일수도 있는 아사랴의 인본주의적인 주장을 따라갔던 점입니다. 요하난에게 하나님의 의지하는 거룩한 지혜가 있었더라면 아사랴나 애굽으로의 이주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견제하고 마땅히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신앙적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인본주의적인 주장을 따라 감으로 결국 파멸을 자초한 불행한 지도자가 되고 만것입니다.

때때로 인간으로서의 선택과 믿음의 길이 서로 상충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믿음의 길은 수퍼맨이나 특별한 사람들 만이 가는 길은 아닙니다. 성경이 보여 주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은 그 어려운 선택의 순간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생명을 걸고 그 길을 선택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과 성정이 똑 같은 믿음의 선진들처럼 우리들도 주를 의지하여 믿음의 길을 선택하는 결단과 헌신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능력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하셨드시 우리가 믿음 안에서 결정하고 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 속에 있는 불안함을 긍휼이 여기시고 주님 의지하므로 연약함을 강하게 하시고, 불안함을 물리치고 평강가운데 거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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