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나눔

오늘의 말씀묵상 06/11/2021 금요일 [시편 10편 1-18절]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6-11 10:39
조회
1099

6. 11. 금요일. 오늘의 말씀묵상 찬양링크 “십자가 그 사랑이”:

[본문: 시편 10:1-18]
1.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2.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3.악인은 그의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4.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5.그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그에게 미치지 못하오니 그는 그의 모든 대적들을 멸시하며
6.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7.그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며 그의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8.그가 마을 구석진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의 눈은 가련한 자를 엿보나이다
9.사자가 자기의 굴에 엎드림 같이 그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당겨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10.그가 구푸려 엎드리니 그의 포악으로 말미암아 가련한 자들이 넘어지나이다
11.그가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12.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13.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14.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15.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까지 찾으소서
16.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17.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18.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본문이해]
시편 1권에 해당하는 1~41편 중에서 표제가 없는 시는 1, 2, 10, 33편입니다. 그런데 시편 1권이 모두 다윗이 저자로 되어 있고, 표제가 없는 시들이 1권에 속해 있어서 10편의 저자도 다윗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1-2, 환난으로 인한 탄식과 간구]
시인은 환난 때에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다고 탄식합니다. 왜냐하면 악한 자들이 교만하여 약한 자를 핍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악한 자들이 자기 꾀에 빠져 핍박과 악행이 그치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1절, “어찌하여…숨으시나이까”: 이 단어의 히브리어는 “라마” 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상칠언으로 남긴 말 가운데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에 나오는 것과 같은 말로 ‘라마’란 ‘어찌하여’라는 뜻입니다. 시인은 악인들의 횡포가 만연한 가운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즉각적인 심판을 시행하지 않으시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자신의 답답함을 “어찌하여”라는 탄식가운데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맥 전체의 내용으로 볼 때에 시인이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부정적인 탄식이 아니라,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뒤에 나오는 “숨으시나이까”라는 말의 히브리어 “타을림”은 앞에 있는 것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가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직역하면 “당신은 (의도적으로)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시인은 공의로우시며 연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있지만,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이 세상의 불의한 현실을 목도하면서 견딜 수 없는 답답함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3-11, 악인들의 악행에 대한 탄식과 고발]
시인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악인들의 악행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여호와를 배반하고 멸시하며, 교만하여 하나님이 자신들의 악행을 감찰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이렇게 악인들이 의기양양한 것은 자신들이 악행을 저질러도 여전히 잘되고 심판이 없으니 깨닫지 못한다고 시인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은 심판이 없다고 말하며 더더욱 무죄한 자와 가련한 자들에게 악행을 행하는 것입니다. 악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이 잊으셨다 말하며, 그 분의 얼굴이 가리워져서 영원히 보지 않을 것이라 말하여 악행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 시인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3절, “마음의 욕심”: “욕심”이란 단어의 히브리어는 “타아와트”는 간절히 원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로 ‘열망, 탐욕, 욕심’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시인은 악인의 모습을 지적하면서 암암리에 행해지는 불의한 계획과 악한 일을 성취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3절, “탐욕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본 절의 구문은 히브리어 원문에 의해 주어를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세가지로 번역이 가능하기 때문에 영어성경들이 각각 다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소개하면 첫째, 한글개역성경, 영어성경 NASB는 “탐욕을 부리는 자”가 여호와를 배반한다는 의미로 “The greedy man curses and spurns the Lord”라고 번역합니다. 둘째는 KJV은 ‘악인’을 주어로 해서 “Blesseth the covetous, whom the Lord abhorreth”(그는 여호와께서 혐오하시는 탐욕자들을 축복합니다”라고 번역합니다. 셋째는 NIV도 ‘악인’을 주어로 해서 “He blesses the greedy and reviles the Lord”(그는 탐욕자들을 축복하며, 그리고 여호와를 모욕합니다)라고 번역합니다. 본절에서 “탐묙을 부리는 자”란 말의 히브리어 “우보체아으”라는 말의 동사형은 “빠차으”로서 그 뜻이 “깨뜨리다, 부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탐욕을 부린다는 것은 단순히 욕심을 가지는 정도가 아니라, 욕심을 위해서 타인들의 재산을 강탈하거나, 타인의 삶을 깨뜨리고 부수어 망가뜨리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성경적 개념의 탐욕은 자기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결과로 다른 사람의 삶도 망가뜨리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4절,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여”: 히브리어 성경에는 “말하기를”에 해당하는 단어는 없습니다. 그리고 “감찰하지 아니하신다”라는 말의 히브리어 “빨 이드로쉬”의 문자적인 의미는 ‘찾지 않는다’입니다. 그러므로 본절을 직역하면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하나님을) 찾지 않으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The wicked in his proud countenance does not seek God; God is in none of his thoughts)가 됩니다. 즉 악인은 하나님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그 분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감찰하다, 찾다”(히, 이드로쉬)의 주어를 악인으로 보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으로 생각하면 한글성경의 번역도 히브리어 문법상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한글성경은 여호와께서 악인들의 악행을 감찰하거나 징계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더욱 교만해지고, 또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게 되는 뉘앙스를 지니고 있습니다.

5절, “견고하고”: 이 단어의 히브리어 “야힐루”의 원형 동사 “훌”은 ‘돌리다, 회전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성경상의 용례를 보면 ‘춤을 추다’라는 의미도 있고, 마음이나 몸이 꼬인다는 의미에서 ‘근심하다, 고통하다, 아프다’라는 의미도 있고, 여러 겁으로 돌려서 묶는다는 의미에서 ‘강하다, 확고하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한글성경은 세번째 의미를 채택하여 ‘견고하다’로 번역하였지만, 대부분의 영어성경들은 ‘춤을 추다’라는 의미를 채택하여 직역하지 않고 의역하여 악인들이 연회장에서 춤을 추는 것을 항상 형통하다는 의미로 보아 ‘번영하다, 번창하다’라는 단어인 ‘prosper, prosperous’라는 말로 NRSB, NKJV, NIV, NASB, ESB성경들은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외로 KJV은 ‘근심하다, 고통하다’라는 의미를 담아서 ‘비통한, 슬픈’(grievous)’라는 말을 사용하여 ‘His ways are always grievous’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5절, “주의 심판은 높아서 그에게 미치지 못하오니”: 하나님의 심판이 악인들에게는 전혀 깨달아지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인들은 자신들의 악행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고 생각하여 자유롭게 살고, 악에 대한 양심의 가책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더욱 악을 자행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7절,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말로 인한 범죄를 시인이 의도했다면 직접적으로 ‘혀에는 잔해와 죄악이’라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가 “혀 밑”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서 두 가지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악에 대한 은폐 행위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즉 악인들은 악한 말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말을 돌려서 숨기거나, 달콤하게 유혹하는 말로 숨겨서 표현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혀 밑”이란 말로 표현한 것으로 보는 해석입니다. 둘째는 “혀 밑”이 맛을 음미하는 부위라는 점에서 악인들은 잔해와 죄악을 행하되 이를 음식을 즐기듯이 죄를 즐기면서 행한다는 사실을 전달하기 위한 표현으로 보는 해석입니다. 어떤 입장을 취하여도 본 절의 표현은 결국 악인의 사악함을 강조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8절, “외로운 자”: 이 단어의 히브리어 “레헬레카”는 많은 성경들이 제 각각 번역하고 있습니다. 한글성경은 “가련한 자”로 번역하며, ESV, NKJV, NRSV는 ‘무력한 자(the helpless)’로 번역하며, KJV, LXE는 ‘가난한 자(the poor)’로 번역하며, NASB는 ‘불행한 자(the unfortunate)’로 번역하며, NJB는 ‘억압받는 자(the downtrodden)’로 번역하며, NIV는 ‘희생자(the victims)’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번역이 나오는 이유는 히브리어 ‘레헬레카’가 이러한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맥상으로는 악인들이 악함을 드러냄에 있어서 어떤 번역을 취하든지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9절, “사자가 자기의 굴에 엎드림같이…그물을 끌어당겨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시인은 악인들의 악행을 사자와 사냥꾼에 비유함으로 포악성을 드러내어 고발하고 있습니다. 사자가 단번에 사냥을 성공하기 위해 숨을 죽이고 잔뜩 웅크리고 있다가 공격하듯이 악인들이 그렇게 한다는 것이며, 또한 사냥꾼이 짐승을 잡는데 사용하는 그물을 묘사하며 악인들이 가련한 자들을 학대하고 착취하는 악행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10절, “그가 구푸려 엎드리니”: 본 절의 해석은 번역하는 성경들마다 차이점이 있어서 쉽게 파악되기 힘든 난해한 면이 있습니다. 권위 있는 번역성경들을 중심으로 크게 두 가지 해석만을 살펴보면, 첫째는 연약한 자들이 당하는 고통으로 보는 견해입니다(ESV, NIV). 둘째는 이와 달리 악인들이 연약한 자들을 잡으려고 취하는 사전 행동으로 보는 견해입니다(NASB, NRSB). 이렇게 해석이 나뉘는 이유는 주어 “그가”라는 단어가 위에 나와 있는 문장에서 ‘악인’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핍박을 당하는 ‘가련한 자’를 가리키는지 정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구푸리다”라는 히브리어가 ‘잠복하기 위해 몸을 구부린다’라는 의미도 있고, ‘무너지거나 부서진다’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10절의 본 구문을 두 가지 모두 해석이 가능하므로 감안해서 해석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12-15, 악인들의 심판을 위한 간구]
시인은 하나님께 일어나시라고 촉구하며 가난한 자를 잊지 말아 달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이 하나님을 멸시하며 제멋대로 떠드는 것을 왜 내버려 두시는지 질문하며 학대받는 자, 외로운 자, 고아를 도우시는 하나님께 악인들의 팔을 꺾어 심판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14절, “감찰하시고”: 14절에 등장하는 ‘감찰하다’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탑비트”로서 4절과 13절에 등장하는 “감찰하다”라는 말의 히브리어와 다른 단어입니다. 14절의 ‘감찰하다’(히, 탑비트)의 원형은 “나바트”로서 “주의 깊고 지속적으로 바라보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본절에서 악인들에 의해 핍박당하는 피해자들의 원한을 하나님께서 주의 깊고 지속적으로 바라보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즉각적인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악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하나님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시인은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며, 공의로운 심판이 반드시 시행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14절, “고아”: 이 단어의 히브리어 ‘야톰’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부모가 없는 ‘고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홀로 있는 것을 나타내는 어원에서 유래하여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홀로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문맥에서는 박해의 상황에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약자들, 10편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가련한 자’, ‘무죄한 자’, ‘가난한 자’, ‘외운 자’ 등등을 지칭하는 말로 볼 수 있습니다.

15절, “악을 찾으소서”: 이 단어의 히브리어 “티데로쉬”는 4절과 13절에 등장하여 한글성경에 “감찰하다”라고 번역된 말과 동일한 히브리 단어입니다(4절의 ‘감찰하다’의 설명 참조). 원형 동사는 ‘따라쉬’로서 ‘뒤를 쫓아가다, 따르다, 구하다, 찾다’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악인들은 하나님께서 결코 감찰하거나 찾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는 교만함에 반대하여, 시인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악행을 뿌리 뽑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때까지 그들의 뒤를 쫓고 따라가서 심판해 달라는 간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인들의 확신이 오히려 그들을 멸망케 하는 독이 되게 해 달라는 시인의 열망이 담겨 있는 표현입니다.

[16-18, 여호와의 심판에 대한 확신의 고백]
영원무궁하신 하나님을 부르며 이방 나라들이 멸망할 것임을 확신하여 고백하며, 또한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시고, 고아와 눌린 자를 위해 판결하시는 하나님께 심판을 간구합니다.

17절, “소원”: 이 단어의 히브리어 “타아와트”를 한글성경 3절에서는 “욕심”으로 번역하였지만, 17절에는 “소원”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똑 같은 단어이지만 누구에게 적용되었는가에 따라 부정적으로, 또는 긍정적으로 다르게 번역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겸손한 자에게 적용될 때에는 ‘간절한 기도’의 의미를 담아서 ‘소원’이라고 번역되었지만, 악인들에게 적용될 때는 ‘욕심’으로 번역된 것입니다.

17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본 절의 ‘예비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킨”은 ‘어떤 형태로든 견고하게 세우다(establish), 용기를 주어 강하게 하다(strengthen), 용기를 붇돋아 주다(encourage)’라는 의미입니다.

[묵상 및 적용]
시인은 1절에서 매우 답답한 심정으로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서 환난 때에 보이지 않고 숨으시나이까?”라고 탄식하여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심정을 “어찌하여, 어찌하여”를 반복하는 부르짖음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인이 이렇게 애타게 찾는 이유는 환난을 당하였는데도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고 자신을 구원해 주시기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시편을 살펴 보면 하나님께서 환난 때에 당신의 백성들을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의 표현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시편 27:5),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난 때에 그들의 요새이시로다”(시편 37:39),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편 50:15),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시편 91:15) 등등.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환난에 처할 때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 10편에서 시인은 환난 날에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멀리 숨어 버리시거나 보이지 않는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왜 시인은 이런 고백을 하고 있으며, 환난 날에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던 하나님께서 시인에게 보이지 않고 숨은 것처럼 여겨 졌을까요?

이런 상황에 닥치면 건져 주시겠다는 하나님과 건져 주시지 않는 하나님, 이 두 모순 사잉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두 모습의 하나님은 도저히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보이지 않고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과 어떤 창도 막을 수 있는 방패의 부딪힘처럼 ‘모순’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짓을 말하는 분이라는 것일까요? 시인은 평소에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당연히 주께서 도우실 것으로 믿어 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자로 나타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환난 속에 고통받는 시인의 입장에서 보면 숨어 계시기까지 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시인의 입장에서는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보이지 않고, 어찌하여 숨어 계시나이까?”라고 탄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도대체 하나님은 환난 때에 어디에 계신 것입니까? 하나님은 환난 때에 자기 백성들의 형편과 처지와는 무관한 분이십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의문에 의문, 회의적인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묵상의 질문들을 던지다 보니 질문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디에 계십니까?”라는 질문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하나님은 어디에 가 계시거나,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계시는 분이 아니라, 처음부터 어디로 가지 않으시고 바로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봄에 대학교에 가 있던 아들 찬양이가 금요일 밤에 갑자기 연락이 왔습니다. 급성 맹장으로 Emergency로 병원에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검사를 하고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화를 끊은 후에 아내와 저는 안절부절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 후에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토요일 아침에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LA까지 6시간 정도 걸려서 가야 할 것인지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지금 출발해도 수술 시간을 맞출 수는 없었습니다. 더우기 코로나 경계 상황이므로 부모가 병실에 같이 있을 수 없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결국 LA까지 가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들에게 전화로 기도를 해 주고 수술 잘 받으라고 연락하고는 끊었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몸은 집에 있어도 마음이 편할리 없었고, 수술실의 아들에게 온 생각과 마음이 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 하나님도 똑같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식이 중병으로 앓아 누우면 부모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어 대신 아파 주었으면 할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의 참 부모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는 어떻겠습니까? 그 분은 자신의 생명읠 내어 주실 정도로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환난 날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며, 아버지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다만, 시기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때, 도움의 때, 그리고 회복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환난이 힘들고 괴롭고 고통스럽지만 자기 백성, 그 분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환난이기에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가슴이 아프시지만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자기 백성들에게 숨어 계신 듯이 보일 때가 있지만, 전적으로 그것은 우리의 느낌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한시도 자기 백성 곁을 떠나시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23에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라는 말씀처럼 어떤 상황과 순간에도 하나님은 바로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바로 이 믿음을 우리의 생활 속에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것으로 생각된다면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환난과 고난을 당하고 계시는구나”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실 가장 적절한 때를 찾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며 용기와 믿음을 가지고 주를 소망하며 인내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사랑의 구주 예수님! 이 죄인이 악인의 꾀를 쫓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고, 죄인의 길에 섰을 때에도 주님은 저를 붙들고 저와 함께 계셨음을 믿습니다. 돌아오라는 간절한 주의 음성을 외면한채 세상을 염원하며 믿음이 흔들릴 때에도 주님은 저와 함께 계셨습니다. 이 부족한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제가 당해야 하는 고통과 사망의 짐을 짊어지신 주님! 제 앞에 가시며 먼저 고난을 당하시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신 주님이셨는데, 주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원망만 했던 저를 무지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이제 믿음으로 주님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심을 보게 하옵소서. 주께서 견고하게 만들어 놓으신 회복의 때, 구원의 때를 인내하며 기다리게 하시며,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그 때를 소망하게 기다리며,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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