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나눔

오늘의 말씀묵상 04/08/2021 목요일 [출애굽기 2:11-25]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4-08 09:01
조회
739
[본문: 출애굽기 2:11-25]
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12.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13.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14.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16.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었더니 그들이 와서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 그들의 아버지의 양 떼에게 먹이려 하는데
17.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 떼에게 먹이니라
18.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버지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19. 그들이 이르되 한 애굽 사람이 우리를 목자들의 손에서 건져내고 우리를 위하여 물을 길어 양 떼에게 먹였나이다
20. 아버지가 딸들에게 이르되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그 사람을 버려두고 왔느냐 그를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라 하였더라
21. 모세가 그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의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
22.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이르되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본문이해]
(11-15, 모세의 애굽인 살해와 미디안 땅으로 도피)
모세가 장성한 후 한 애굽인이 고되게 노동을 하더고 있던 자기 동족,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목격합니다. 주위에 보는 사람이 없자 그 애굽인 쳐죽인 후에 시신을 모래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다음 날 모세가 히브리 사람들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책망하자 한 사람이 전날 애굽인을 살해한 사건을 알고 있으며 그 사건을 빌미로 오히려 모세를 비난합니다. 결국 모세의 애굽인 살해 사실이 탄로나고 바로는 이 사건을 듣고는 모세를 죽이려 합니다. 모세는 자신을 죽이려는 바로를 피해 미디안 땅으로 도망합니다.

11절,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한글 성경에 “한번은”이라는 번역과 영어성경의 “One day”라는 번역은 원어 성경에 나와 있는 표현은 아닙니다. 이러한 표현은 우연히 또는 목적이 없이 동족들의 일하는 상황을 보게 되었다라는 식의 뉘앙스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7:23-24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약의 구약 인용을 참조해 볼 때에 모세가 아무런 목적없이 궁을 빠져 나가 자기 형제들에게 간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형편과 처지를 돌아볼 생각을 가지고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살인을 하게 된 동기도 그냥 자기 동족이 맞는 것을 보고 분노가 일어서 죽인 것이 아니라, 원통한 일을 당함을 보고 보호하고 원수를 갚기 위해 행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정황을 볼 때에 모세는 비록 애굽 공주의 양자로서 귀족적 지위와 특원을 누리고 살고 있었지만, 자기 동족에 대한 연민을 늘 가지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2절,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본문의 말씀은 모세의 살인이 우발적으로 노를 발하여 죽인 것이 아님을 더욱 확실하게 표현하게 있습니다. 즉 모세는 애굽인을 죽일 목적으로 주변을 살폈으며 오히려 무모한 행동이 아니라 자제력을 갖고 계획적인 살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세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인지 아닌지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저지른 행동이므로 성숙한 행동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파악하기 보다는 주변을 살펴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 행동이었으므로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눈을 두려워하는 인간 위주의 행동이었음을 본문이 고발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의로운 동기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살인하는 것은 바른 행동이 아니며, 자신의 혈기와 능력으로 무엇인가를 해 보려고 했던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15절,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당시 모세의 신분은 자신을 물에서 건져서 키우고 교육시킨 하셉수트의 총애를 받는 고귀한 귀족이며 양아들의 신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인 행각이 들어 났다고 바로 바로의 미움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당시 애굽 왕 투트모스 3세에게 있어서 하셉수트는 장모이며, 왕의 장모가 총애하는 모세는 정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해서는 모세를 제거하는 것이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15절, “미디안 땅”: 창세기 25장 1-2절에 의하면 미디안은 아브라함과 그의 세번째 부인인 그두라 사이에서 태어난 네번째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미디안 땅은 아브라함의 아들 미디안의 후손들이 살던 지역인 셈입니다. 일반적으로 미디안 땅은 어느 지역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아서 경계를 정확히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홍해의 상류가 한쪽은 수에즈만으로 연결되지만, 또 다른 한쪽은 아카바만으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아카바만의 동부해안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으로 홍해의 동쪽에 해당하는 지역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미디안 사람들은 유목민으로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유랑 생활을 주로 했기 때문에 아카바만 동쪽의 오늘날의 사우디 서쪽에서 홍해와 맞닿은 곳인지, 아니면 시내 반도 지역으로 유목 생활 때문에 이주해 있는 미디안 사람들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 미디안 족속이 애굽과의 국경 지역에서 잦은 국지전으로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모세가 애굽 군사의 추격을 뿌리치기에 적절했던 족속이며, 그들이 거주했던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모세와 같은 셈족이었기 때문에 모세가 더 쉽게 적응하는 이점도 있었을 것입니다.

(16-22, 모세의 미디안 도피 생활과 결혼)
모세가 미디안 땅에 도착하여 피해 있던 중에 어느 날, 미디안 제사장의 일곱 딸들이 양떼에게 물을 먹이려고 하는데 남자 목자들이 횡포를 부리자 딸들을 도와 횡포를 물리치고 양떼에게 물을 먹입니다.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이 모세가 딸들을 도왔다는 말을 듣고 모세를 청하여 대접합니다. 모세가 제사장 르우엘의 집에 거하며 그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이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라는 의미의 게르솜입니다.

16절, “제사장”: 본문에 등장하는 제사장(히, 코헨)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실 때 등장하는 제사장과 같은 역할과 의미의 제사장은 아닙니다. 원어 히브리어가 뜻하는 의미는 “제사직을 행하는 자, 또는 사제”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즉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에게만 사용된 단어가 아니라, 애굽의 여러 신들을 섬기는 이방 종교의 제사장들에게 사용된 말입니다. 그러므로 미디안의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유일신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 아니라, 미디안 족속이 섬기는 이방 신의 제사장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16절, “그들”과 17절, “그들”: 16절의 “그들”이라는 말은 히브리 성경에 여성 복수 3인칭으로 정확한 번역은 “그녀들”로 번역해야 하며, 17절은 남성 복수 3인칭이므로 “그들”로 번역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17절의 표현은 여자를 남성으로 표현했으니 문법적으로 틀린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 근동아시아 지역에서 우물에 와서는 목자들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양떼나 동물들도 함께 사용했으므로 본문 17절에 “그들”이라고 표현한 단어는 제사장 르우엘의 일곱 명의 딸들과 그녀들이 데리고 온 양떼들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이기에 문법적인 오류는 아닙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특히 물이 귀해서 우물을 공동으로 사용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여럿히 힘을 합쳐야 들 수 있는 큰 돌로 우물을 덮어 두었다가 목자들이 모이면 이 돌을 힘을 합해 들어내고 사용하곤 했습니다(창 29:8). 그리고 힘 있는 목자들이 약한 자들에게 횡포를 부리는 일들이 종종 일어났던 점을 성경에도 언급되어 있고, 고고학 자료들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18절, “르우엘”: 미디안 제사장이며 모세의 장인이 되는 ‘이드로’의 다른 이름입니다. 르우엘은 ‘친구’를 뜻하는 “르우”와 ‘능력, 힘, 권능자’를 뜻하는 “엘”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이름으로 “엘의 친구, 전능자의 친구’라는 뜻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엘’은 하나님을 이르는 명칭으로 많이 등장하지만, 고대 근동 지방의 셈족들과 가나안 부족들 사이에서 ‘엘’은 전능자를 지칭하는 신에 대한 보편적인 이름이기도 하며, 미디안 족속들이 섬기는 우상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21절, “십보라”: ‘작은 새’라는 뜻의 이름으로 모세의 아내입니다. 십보라는 출 4:24-26에서 모세와 함께 애굽으로 귀환할 때 모세가 할례를 행하지 않은 일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려 하자 그의 자녀에게 할례를 행하고 양피를 모세의 발에 던짐으로 화를 면하게했던 여인이며, 또한 자기와 자녀들이 모세의 민족 구원 사역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하여 미디안으로 돌아갔다가 모세가 자기 민족을 이끌고 시대 광야에 나왔을 때에 모세에게 합류할 정도로 지혜롭고 헌신적인 아내로 성경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23-25, 모세를 죽이려 하던 바로의 죽음과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기억하심)
여러 해 후에 모세를 죽이려 하였던 애굽 왕이 죽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탄압 정책은 계속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습니다.

23절, “상달된지라”: 히브리어 “왓타알”이라는 말의 의미는 ‘올라가다(창 49:9, 수 2:8)’, ‘드리다(왕상 18:29)’, ‘운반되다(욥 5:26)’라는 의미로 구약성경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향이나 번제물의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듯이 이스라엘 족속의 부르짖는 소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보좌까지 올라가 닿았다는 뜻이 됩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5:8에서 이십사 장로들이 금대접에 담아 어린 양께 드렸던 향으로 성도들의 기도를 떠올리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24절, “기억하사”: 기억한다는 것은 평소 잊고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떠올리는 뉘앙스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 단어의 ‘기억하다(히, 자카르)’라는 말은 ‘생각하다, 마음에 두다, 잊지 않고 있다’라는 뜻으로 잊고 있던 사실을 새롭게 기억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항상 ‘잊지 않고, 생각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언약을 늘 마음에 두시고 생각하고 계신 것이며, 그의 백성을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며 마음에 담고 있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25절, “기억하셨더라”: 24절과 25절에 모두 ‘기억하다’라는 단어로 한글 개역개정 성경은 번역하고 있지만, 25절의 원문은 사실 ‘기억하다’라는 단어가 아닙니다. 옛날 개역한글성경은 이 단어를 “권념하셨더라”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오히려 옛 번역이 원문에 더 가깝습니다. 영어성경은 “was concerned(NIV)”, “has respect(KJV)”, “took notice of(NASB)” 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한글로 생각하면 “염려하셨다, 존경할 정도로 관심을 기울이다, 주목하여 보았다”등이 될 것입니다. 즉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의 조상과 맺었던 언약을 재확인하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염려하시며 관심을 기울여 자세히 보셨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묵상 및 적용]
창세기 15장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언약을 주시면서 애굽의 생활에 대해 예언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창 15:13-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에서의 힘들고 고단한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할 것이라는 예언은 야곱과 그의 12아들들과 가족들이 애굽으로 가기 훨씬 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약속과 예언의 말씀은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그리고 아버지에서 아들로, 손자로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왔음에 분명합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방에서의 객 생활과 사백년 동안의 괴로운 생활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그 나라를 징벌하시며,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큰 재물을 이끌고 해방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해방과 축복의 언약에도 불구하고,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과 괴로움이 시작되고, 그 고통이 지속되면서 오랫동안 하나님께 부르짖어 왔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구원의 응답은 너무도 오랫동안 들려오지 않고, 무응답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속을 잊으시고 자신들을 잊어 버렸다고 생각해서 하나님을 원망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우리도 그와 같은 상황에 있었다면 마치가지 입장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24, 25절에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하셨던 약속을 기억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결코 잊지 않는 분이십니다. 위에 본문해설에서 설명하였듯이 하나님은 까마득하게 잊고 계시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잊고 계셨던 언약을 기억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24-25절의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항상 지켜 보시고 그들의 고통을 들으시고 아시며 염두에 두셨던 분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본래의 언약대로 묵묵히 400년의 시간을 기다리신 것입니다. 언약의 준엄함과 신실함을 따라 때가 자기를 기다리시며, 자기 백성을 구원할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때가 되었을 때에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자로 모세를 통해서 구원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모세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언약이 성취되고, 애굽으로 부터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모세의 오판이 등장합니다. 그는 동족을 향한 뜨거운 마음과 애국애족의 마음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자기 동족 히브리 민족을 향한 마음과 구원하고 싶은 마음이 선했을지라도 그 과정이 바르지 못하면 어려움을 당할 수 있음을 성경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때때로 세상사에서는 ‘결과’를 ‘동기’보다 중요시 합니다. 동기가 선하지 못하여도 결과만 좋으면 괜찮다는 식입니다. 또한 좋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과정’이 옳지 않아도 용납하는 ‘결과위주’의 사고방식이 세상사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방법은 결코 동기와 과정을 간과하고 지나치지 않습니다. 동기도 중요하고, 과정도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처음 동기부터 선하시며, 그 과정 또한 의롭고 공의로우 십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살인의 행각은 자기 동족을 향한 애민의 마음이 있다할지라도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따르지 않는 인간 스스로의 결정과 노력은 무리한 시도일 수 있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에 흙탕물을 튀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반드시 때가 차면 이루어지며, 성취될 것임을 신뢰하는 믿음의 굳건함을 지닐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시기를 사 54:10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뜻이 결코 바뀌지 않으며, 약속하신 언약이 흔들임 없이 이루어질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하나님과의 사귐과 관계 속에서 우리가 기도하고 응답을 기대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기대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선하신 응답이 거룩하신 뜻을 따라 우리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선이 되는 응답이 반드시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그 분의 자비하심이 결코 성도의 길로부터 떠나지 않음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의 응답을 기대하고, 응답의 복을 누리는 은혜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기도]
신실하신 하나님! 나의 혈기와 의지로 하나님의 뜻과 발걸음 보다 더 앞서지 않도록 나를 겸손케 하시고, 머리와 허리를 꺾어 낮아지게 하옵소서. 하나님,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 인도하심을 간절히 원하오니 나로 하여금 하나님이 계신 곳을 향하여 눈을 들게 하여 주옵소서. 지난 13개월 동안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전염병의 상황이 게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주의 백성들이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게 하시며, 오히려 주를 더욱 간절히 사모하여 부르심의 소망과 믿음에 흔들림 없게 하여 주옵소서. 온 성도들이 다시 만나서 함께 찬양하며 예배하는 그 날을 기대하며 인내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여 주옵소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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