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나눔

오늘의 말씀 묵상 12/30/2020 수요일 [본문: 베드로후서 3:1-9]

작성자
KCPC ADMIN
작성일
2020-12-30 11:35
조회
619

오늘의 말씀 묵상

[본문: 베드로후서 3:1-9]

1.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2. 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4.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6.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생명의 삶 온라인 링크]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edit_all=2020-12-30

[본문이해]
1-4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편지를 쓰는 이유가 성도들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우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예언자들의 말씀과 주님이 명하신 명령, 그리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잊지 않고 기억하게 하려는 이유는 말세에 일어날 일 때문입니다. 말세에는 정욕을 따라 행하는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서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에 대해서 회의적 질문을 하며 혼란케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본 단락에서 강조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헬, 파루시아, Parousia)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처럼 자신의 정욕을 좇아 가르치는 것이나 회의주의가 아니라, 사도적 권위, 예언자들의 권위, 주님의 명령을 근거로 선포된 말씀의 권위에 근거하여 재림의 확실성을 선언하며, 확증하고 있습니다.

5-9절에서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먼저 본 단락에서 저자는 성경적 근거를 통해 거짓 교사들이 부정하려고 하는 것을 들추어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위의 물과 땅 아래의 물을 나눠 궁창을 만드신 창조의 행위를 홍수로 인한 심판과 연관시키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창조를 가능케 했으니 동일한 능력으로 심판도 있음을 밝힙니다. 하지만 거짓 교사들은 세상의 심판과 종말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그들의 도전 방식은 첫걸음은 신실한 신앙인처럼 가장하여 창조의 때를 언급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므로 결국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자체를 부정해 버립니다.

베드로는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라고 하나님의 시간의 비밀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이 다르다는 사실을 권고하면서 재림의 지연으로 거짓 교사들의 회의론에 빠지게 됨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재림의 지연은 하나님이 인류를 용서하려는 의지를 사랑의 확증이라고 말하면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복음에서 은혜의 길을 발견하도록 기회를 제공하시고, 더 나아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표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동시에 그 오래 참음은 영원하지 않으며 언제가, 그리고 반드시 종말이 올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묵상 및 적용]
현대는 과학적 검증으로 밝혀진 사실에 대해서도 또 다시 확인해 보고자 하는 경향이 있는 ‘의심의 시대’ 입니다. 한번 밝혀진 사실에 대해서 또 다시 검증하고, 다른 각도로 검증하고, 과거의 행적들을 낱낱히 살펴 보면서 검증하는 시대입니다. 즉 숨긴다고 숨길 수 없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미래를 확증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런 취급(?)을 받는다면, 신앙의 증인들의 간증이나 경험이 삶의 기준이 될리 만무한 시대가 오늘날의 세태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거짓 교사들은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라고 조롱하는 질문투로 의심과 회의적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회의주의란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는 태도입니다.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공부하는 학생처럼 모든 현상이나 원리에 대해서 “Why?(왜?)”라는 질문의 태도를 보이는 것을 나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회의주의에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철학적 회의주의가 있고, 또한 한걸음 뒤로 물러나서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한계 내애서 신뢰하고 이해할 만한 지식을 찾으려고 하는 과학적 회의주의가 있습니다. 학자들은 과학적 회의주의를 기본으로 철학적 회의주의를 꺼내 오곤 합니다.

하지만, 본문에 등장하는 거짓 교사들은 그 반대입니다. 그들의 질문은 바른 방향의 회의주의가 아니라, 인간에게 적용되는 철학적 회의주의를 “하나님의 말씀이 틀릴 가능성이 있다”라고 하나님께 적용하면서 말씀이 틑릴 수 있다라고 그 분의 권위를 끌어 내립니다. 그리고는 과학적 회의주의를 통해서 검증은 시도도 하지 않은채 자기들의 주관적인 주장과 이론으로 의심의 말꼬리만 던진채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거짓교사들의 태도는 요즘 세상의 세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요즘 세상에는 온갖 소문과 가짜 뉴스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러한 가짜 뉴스와 소문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뉴스와 소문이 가짜라는 것이 드러나면 너무나도 당당하게 “아니면 말구~”라고 말한채 그냥 아무일도 아닌듯 지나가 버리곤 합니다. 누군가를 향해 던진 돌팔매질에 어느 누군가가 피를 철철 흘리며 아파하고 있는데도 “아니면 말구~”라고 쉽게 말한채 상처를 보듬으려고 하지도 않고, 무시해 버리며, 더욱 황당한 것은 자신이 만든 가짜 뉴스와 소문에 대한 죄책감을 커녕 미안함 조차도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현대판 가짜 뉴스와 소문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과 같은 경향의 사람들이 바로 초대 교회의 거짓 교사들의 악함과 비슷합니다. 마치 사단이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으로 왜곡하여 말씀의 권위와 경중을 약화시켜서 죄의 문턱을 넘도록 유혹하듯이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하신 말씀을 왜곡하고 교묘하게 틀어서 의심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태에 대해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의와 불의에 대해서 단호하다는 사실입니다. 성도는 의를 행하고 불의를 버려야 합니다. 어떻게 의와 불의를 구분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비록 포스트 모던니즘 시대의 현대적 흐름이 총체적 회의주의로 규정된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은 그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고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우리의 삶과 생활의 태도의 기준과 표준임을 확증하고 확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하고 있고, 세상의 심판과 성도의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승천 이후 오늘날까지 얼마나 많은 거짓 교사들이 등장하여 예수의 재림을 공교히 꾸며낸 이야기라고 조롱했는지 모릅니다. 더우기 인간 사회의 삶이 재림과 심판을 의식하면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 살기에는 삶의 현장이 너무 치열합니다. 이윤추구라는 경제원리의 목적하에 성경의 제시하고 있는 정의와 나눔과 분배의 미덕은 설 자리를 잃어 버리게 되고, 개인주의와 이기적인 삶의 태도는 자기 합리화를 통해서 불의를 의로 탈바꿈 해 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과 세속에 물든 교회 공동체를 향하여 베드로는 단호하게 재림과 심판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재림이 영원히 일어나지 않고, 심판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에게 ‘파루시아(재림)’의 지연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불신이나 거짓 교사의 회의론적 도전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시는 회개의 기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의를 행하지 못하고 있다면, 성도로서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의 삶이 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 힘써 응답해야 합니다. 이사야가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하였듯이 우리를 향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목적에 부합하는 성도의 삶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올 해의 삶의 태도와 행적들을 돌아 보며 기도의 제목에 회개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단순히 세상 심리학에서 요구하는 ‘카타르시스(Katharsis, 정화, 淨化)’를 통한 감정의 응어리나 풀거나, 정신적, 정서적 안정을 되찾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성도의 회개는 하나님 앞에 홀로 마주 앉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 앞에 자신을 거꾸러 뜨리는 것입니다. 회개하려고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회개가 ‘되어지는 것’이며, 자신도 모르게 은혜 아래 ‘거꾸러’ 지는 것입니다.

성도의 눈물의 기도는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답니다. 그 시간을 올 해, 2020년이 다 지나가기 전에 가져 보는 거룩한 결심이 있으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기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안에 있었던 불신과 의심의 마음을 용서하옵소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닫지 못하고 인간의 눈으로 이해하려고 했던 우리의 무지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듯이 회개의 은혜를 주옵소서. 회개하면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니 회개의 은혜를 주셔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하옵소서. 병든 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다’라고 말씀하시면 치료하신 것처럼 우리 죄를 용서하셔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우리 허무을 위해 질고를 지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찬양: ”마라나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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