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나눔

오늘의 말씀묵상 06/05/2021 토요일 [시편 5편 1-12]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6-05 09:21
조회
1017

6. 5. 토요일. 오늘의 말씀묵상

[본문: 시편 5:1-12,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관악에 맞춘 노래] 1.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2.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3.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4.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5.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6.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7.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8.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9.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10.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11.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12.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본문이해] 시편은 5편은 고난의 때에 성전을 향해 드리는 다윗의 시로서 인도자를 따라 관악에 맞춘 노래입니다. 유대의 관악은 피리, 퉁소, 플릇과 같은 악기이기에 음악 전문가의 연주에 맞추어 부르도록 의도된 찬양시입니다. 시편에는 현악에 맞춘 시가 6개이지만, 관악에 맞춘 시편은 5편이 유일합니다. 히브리어 성경 원문은 표제들을 모두 첫 절로 표기하고 있어서 한글성경에 표기된 절수보다 1절이 더 많습니다. 앞선 시편 3, 4편이 압살롬의 반역 사건이 일어난 시점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반하여 5편은 시간적으로 다소 앞선 것으로 여겨집니다. 즉 3, 4편이 압살롬의 반역 이후 긴박한 상황 중에 드린 기도라면, 5편은 반역 직전에 위기 상황이 닥친 것을 인지하고 드린 기도라 볼 수 있습니다.

(1-3, 기도 응답에 대한 다윗의 호소)
저자 다윗은 아침에 기도 소리를 듣는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살펴 귀를 기울여 달라고 간구하고, 부르짖는 소리에 응답해 달라고 간절히 호소하며 기도합니다.

1절, “여호와여”: 한글 개역성경은 ‘주어+동사’로 표현되어 동사의 행위에 강조점을 둘 수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성경은 본 절에서 동사보다 주어인 ‘여호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순서를 재배치하여 직역하면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여!”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러한 히브리식 뉘앙스는 여호와 하나님께 그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위기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그 자신의 절박한 상황에만 시선을 집중하게 마련인데 다윗은 그 시선을 여호와께 향하였다는 점에서 믿음의 사람으로서의 다윗의 면모를 볼 수 있는 표현입니다.

2절,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이 문장의 히브리어 직역은 “왜냐하면 당신께 내가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표현하므로 기도 응답의 이유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강조점이 동사인 ‘기도하다”보다 기도의 대상인 “주께”를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간구하고 부르짖을 수 있는 이유를 응답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기도”에 두고 있습니다.

3절,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이 구절은 실제로 후대에 제사장들이 아침 희생 제사를 드릴 때 공식적으로 낭송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표현이 여호와께서 낮이나 저녁 때에 드리는 기도는 듣지 않으시고 오직 아침에 드리는 기도만 응답하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본 절은 단지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아침에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으며,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과 만나는 일을 가장 앞세웠음을 의미하므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일이 무언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4-6, 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
다윗은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묘사하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주는 죄악을 기뻐하지 않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므로 악이 주와 함께 거하지 못하며, 오만한 자가 주 앞에 설 수 없는 분이라고 하나님의 성품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5절,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오만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홀렐림’의 원형은 본래 밝게 빛나는 모습을 나타내는 단어 ‘할랄’ 입니다. 이 단어가 사람을 대상으로 사용되면 ‘자기 자신을 찬양하며 자랑하는 자’를 의미하는 ‘오만’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오만과 비슷한 의미의 다른 말이 있다면 ‘교만’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한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24:1, 삼상 10:19을 참조하여 보면 ‘목전에 서다’라는 표현은 “예배” 즉 제사를 위해 하나님 앞에 선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감안하면 ‘오만하 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있는 자리에 나올 수 없다는 뜻이며, 동시에 설령 그들이 종교적 형식을 따라 성정에 나와 제사를 드린다 해도 그것은 예배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지 못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예배자의 기본 자세는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7-10,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하여 원수를 심판해 달라고 청함)
성전을 향해 경배하면서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근거하여 간구합니다. 다윗의 원수들 앞에서 의로 인도하시고 자신의 앞 길을 평탄케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원수들은 신실하지 않고, 마음이 악하며, 아첨하는 자들이오니 그들을 정죄하사 스스로 자기 꾀에 빠지게 하여, 그들의 행위를 따라 심판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7절, “예배하리이다”: 히브리어 “에쉬타하웨”는 옛 한글 성경에는 “경배하리이다”로 번역되었는데 그 의미는 “반드시 경배할 것입니다”라는 강조적 의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어에서 ‘경배하다, 예배하다’라는 의미는 상대방을 향해 자기 자신을 낮추어 합당한 경배를 올린다는 ‘겸손함’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므로 영어성경 ESV, NIV, NJB, NRSB 등에서는 “꿇어 엎드리다”라는 의미로 “Bow down”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경배하는 이유는 자신이 악인들에 비해서 의롭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 자신은 밧세바와 간음하여 죄를 지은 죄인이지만 “오직 주의 풍성한 인자하심” 때문입니다. 다윗은 명시적으로 7절에 밝히므로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적인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의 면전에 서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7절, “주의 사랑”: 옛 한글 성경에는 “인자”로 번역되었으며 히브리어는 ‘하쓰데카’의 원형은 ‘헤쎄드’ 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언약 백성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나타내는 단어로서 ‘변함없고 신실한 언약에 기초한 사랑’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7절, “성전”: 한글성경에는 ‘성전’ 한 단어로 표현되었지만, 히브리어 ‘헤칼 코드쉐카’는 2단어의 3가지 의미를 담고 있어서, 그 의미는 “당신의 거룩한 궁전”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윗 당시에는 성전이 완공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시편 5편이 솔로몬 시대 이후에 기록된 시로서 다윗이 저자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구약 시대의 성전은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장소나 건물’을 가리키는 것이 일차적인 성전의 의미이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임재하여 계신 곳이라고 해서 반드시 솔로몬의 성전을 가리킨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 시가 솔로몬 시대 이후에 시라고 주장하는 것은 근거가 약합니다. 그리고 시편 5편의 표제가 ‘다윗의 노래’로 되어 있으므로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지기 이전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셨던 예루살렘의 여호와의 장막을 지칭하는 표현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9절, “입에 신실함이 없고”: ‘신실함’이란 말의 히브리어 의미는 “세워지다, 확고히 세우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직역은 “사람의 입에 확실히 세워진 것이 없다”라는 표현으로 한 입으로 일관되지 않은 여러 가지 말들을 하거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말들을 쏟아내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입에 대한 경고의 말씀인 야고보서 3장 9절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라는 말씀처럼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를 하는 모습과 유사합니다.

9절,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열린 무덤이란 유대에서 무덤 입구를 막고 있는 돌 덮개가 젖혀져 있어서 돌 무덤 안에 있는 시체가 훤히 보이고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즉 사람들의 목구멍이 그런 열린 무덤이라는 것은 사람의 입에서 각종 더러운 말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3: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라고 인용하여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9절, “아첨”: 이 단어의 히브리어 “야할리쿤”의 동사 ‘할라크’(아첨하다)는 어떤 것을 부분으로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히브리어의 뉘앙스는 혀로 말하는 것을 통해서 이간질하여 나누는 것을 지칭합니다. 한글 성경이나 여러 영어성경 번역들이 표현하는 ‘아첨(Flattery)’은 속에 담고 있는 생각과 혀로 내뱉은 말이 동일하지 않고 나뉜 현상을 의미합니다. 악인들은 속으로는 상대방을 조롱하고 미워하면서도 무언가를 얻기 위해 사탕발림의 말로 그 사람을 속이는 아첨꾼과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말의 진위를 정확히 가려낼 수 없지만,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살피시는 하나님은 그들의 거짓된 마음을 알아차리고 공의로 심판할 것이라고 다윗은 말하고 있습니다.

10절, “하나님이여”: 한글성경은 구별이 안되지만, 다윗은 시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름의 히브리어 “예흐와”와 “엘로힘”을 혼용하여 사용합니다. 일반적으로 다윗은 “예흐와”를 사용하지만, 악인에 대한 심판을 단호하게 시행하시며 전능하셔서 생각하시는 뜻대로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강조할 때에는 “엘로힘”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10절에서도 대적자들을 심판해 달라는 요청에 “엘로힘”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11-12, 의인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를 확신하며 찬양을 드림)
주를 의지하여 그 분께 피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의 보호하심을 찬양하고 즐거워할 것이며, 의인에게 복 주시고 방패처럼 지키시는 여호와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11절, “기뻐하며…기뻐 외치고…즐거워하리이다”: 본 절에서 다윗은 ‘기쁨’이란 단어를 세번이나 점층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단순히 기뻐한다는 의미이며, 두번째는 기뻐서 큰 소리를 지른다는 의미이며, 마지막 세번째는 한글 성경은 “즐거워한다”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히브리 성경의 의미는 ‘기뻐 뛰며 의기 양양해 한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단어의 순차적 배치를 통해 여호와를 의지하는 의인의 기쁨이 점점 커져간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 절에서 다윗은 아직 원수들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지거나 끝난 것도 아닌데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믿는 ‘선취적 신앙’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선취적 신앙’의 표현은 다윗의 시편에서 전반적으로 발견할 수 있으며,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표현처럼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이루어지고 응답받은 것으로 믿는 표현들은 다윗의 신앙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표현입니다.

[묵상 및 적용]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슷한 사람끼리 모인다는 말입니다. 의인은 의인들끼리, 악인은 악인들끼리 모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의인과 악인이 함께 섞여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누가 의인이고 누가 악인인지 어느 정도는 구분이 됩니다. 그 이유가 바로 유유상종, 비슷한 부류의 사람끼리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본질적으로 의인들과 함께할 수 없고, 그것은 의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선하신 하나님은 어떨까요? 당연히 하나님은 악과는 절대 함께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듯이 빛이 오면 어둠은 그 자리에 있지 못하고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5:4-6에서 악이 선하신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며, 함께할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은 악을 미워하시되 철저하게 미워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이 과연 악을 미워하시는지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악인이 득세하고 의인이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과연 하나님이 악을 미워하시는 것이 사실인지 의심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악을 당장 심판하시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악을 용납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질적인 성품은 결코 악을 용납할 수 없는 분이신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하나님께서 악을 용납하시는 이유는 선하신 목적에 따라 때로 악을 일시 허용하신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다윗의 대적자들이 반역을 일으키는 것을 허용했을까요? 다윗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하셨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다윗을 징계하실 필요가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다윗이 선을 넘어서 더 큰 죄를 짓는 것을 허용하시므로, 악을 용납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하시지만, 아니 어쩌면 사랑하시기에 더욱 그를 징계하여 선을 넘어 죄의 길에 서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주의 뜻을 바로 깨닫고 믿음에 더욱 굳게 섰을 때에 악인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서 잠시 유보하시며 용납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서 또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본다면, 선한 자를 징계하실 때에 선한 자를 통해서 징계하실까요?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선한 자들은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를 대적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사람을 대적하는 죄를 저지르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을 피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때로 악인을 용납하여 두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기록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지어 징계가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민족이나 나라, 세력들을 사용하여 채찍질하시거나, 징계의 회초리를 드시곤 했던 것입니다.

오늘 시편 5편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요, 악인은 결코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속단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에 따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실 것임을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합니다. 어떤 악인은 이 세상에서 평안하게 살다가 죽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결코 여호와의 목전에 설 수 없습니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는 마지막 심판날이 이르면 악인들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며, 쫓겨나고 영원한 멸망에 처할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징계와 채찍질이 임한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 사실을 선지자 에스겔은 25:7에 선포하기를 “그런즉 내가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다른 민족에게 넘겨 주어 노략을 당하게 하며 너를 만민 중에서 끊어 버리며 너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패망하게 하여 멸하리니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두렵고 떨리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놓친 한 가지를 강조하고 있는데 바로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라는 말씀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오라,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라는 하나님의 외침과 선포를 외면하고 떠난 결과 심판이 임하였고, 그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이 다시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을 알라”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시편의 고백을 통해서 분명하게 남기고 있는 교훈은 그는 고통과 고난, 감당하기 힘든 어려운 상황이나 부끄러운 죄의 결과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던 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 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자기 백성들이 깨닫기를 원하는 사실이며, 다윗도 끝까지 잊지 않고 놓치지 않았던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동일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만은 꼭 붙들고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현실만을 바라보고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라는 질문을 던지는 세상에 당당히 맞서려면 세상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그 이면에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필요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속에도 계심을 깨닫는 믿음의 눈도 필요합니다. 오늘 나의 기도 제목 가운데 다윗이 만나서 대화하며 간구했던 그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간구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기도]
만군의 여호와이신 하나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했습니다.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와 손길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악인을 미워하시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실한 사람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주께 나가기를 원하오니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시며 죄를 씻어 주시며 주께서 꺾으신 뼈들로 즐거워하는 겸손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과 깊이 만나고 사귀기를 원하오니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시며 기쁨과 평강에 거하는 믿음의 용사되게 하여 주옵소서. 상함 심령을 위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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