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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12/18/2020 금요일 [본문: 베드로전서 3장 13-22절]

작성자
KCPC ADMIN
작성일
2020-12-18 15:08
조회
816


 

오늘의 말씀 묵상

[본문: 베드로전서 3장 13-22절]

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22.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생명의 삶 링크: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본문이해]
13-17절에서 베드로는 ‘선으로 인한 고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할 때에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라고 권하면서 소망을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베드로는 벧전 1:3, 21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된 소망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는 신앙의 중요한 핵심으로 성도의 삶에 있는 선교적 본질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전파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은 그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망에 관해 분명히 “전파”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벧전 2:9). 그래서 본문 15절에서 힘들다고, 불리하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온유와 두려움”으로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또한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 성도에게는 “선한 양심”이 필요한데 이는 2장과 3장에 등장하는 “선한 행실”과 같은 맥락으로, 선한 양심을 끝까지 지키면 비방하는 자들조차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벧전 2:16).

18-22절의 내용은 앞에 있는 선으로 인해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밝힘으로 기독론적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2장 21절에서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곧 고난에 관한 베드로의 권면은 철두철미하게 “의로운 자”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죽으심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중에서 난해한 구절로 뽑히고 내용은 19-20절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 구절들에 대해서 “신약성경 가운데 가장 모호하여 자신도 그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한다”라고 고백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까지도 신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그치지 않는 이유는 그 주제가 “불신자의 사후 상태”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방대한 논란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지만 크게 두 방향의 해석이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와 일부 학자들은 사후 상태를 확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개혁교회들와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사후 상태를 확정적인 것으로 보고 사후의 구원의 가능성을 부정합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사후 구원설에 대해서는 보편 구원론과 카톨릭의 연옥설입니다. 보편구원론은 모든 인류가 결국 구원에 이르게 되며 악인의 영혼도 때가 되면 죄의 징벌에서 풀려나 하나님께로 회복된다는 주장입니다. 또한 연옥설은 가장 오래되고 널리 알려진 사후 구원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카톨릭의 교리입니다. 교황 그레고리 1세(AD590-604)에 의해 교리화 된 후에 1439년 카톨릭 플로렌스 공의회에서 공식 교리로 선포된 연옥설에 의하면 악한 상태로 죽은 사람은 당연히 즉시 지옥에 가지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었지만 아직 영적으로 완전하지 못한채 죽은 사람은 연옥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 있었던 사람들, 곧 신앙 생활을 했지만 고해성사를 통해 죄에서 정결함을 받지 않고 죽은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기에 앞서 정화되는 장소가 연옥입니다. 이 연옥에서의 기간을 거치면서 정화됨으로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불신자의 사후 상태를 고정적으로 보지 않는 위의 대표적인 두 가지 주장들은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주께서 그의 죽음과 부활 사이 기간에 지옥의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구원했다’는 뜻으로 해석하므로 성립된 주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보편 구원론이나 연옥설을 적용하면 이 땅에 있는 동안 주어진 인간의 생명과 삶에 대한 존중의 가치가 약화되며, 무질서한 범죄의 가능성이 제기되고,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의무와 책임감이 약화되어 ‘결국 악인만 되지 않으면 어느 정도 죄를 지어도 구원받을 것이다’라는 생각의 유혹으로 바른 성도의 삶을 살 수 없다는 위험이 있습니다.

정통 개혁교회와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위의 주장들을 거부하고 동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후에도 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말한 구절이 없으므로 불신자의 사후에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증거는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입니다. 이 비유에서 낙원과 음부 사이에는 서로 교통할 수 있는 길이 없으며 불신자가 죽은 이후에는 그 상태가 영원히 변경될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본문 19절 말씀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였다는 말씀을 개신교에서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요? 첫째로는 벧전 4장 6절과 조화를 이루어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은 후, 그리고 부활하시기 전에 지옥에 내려가 그 곳에 갇혀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결국 보편구원설이나 연옥설처럼 사후에 구원의 가능성을 주장했다는 점에 있어서 합리적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하며, 사후 구원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는 성경의 다른 본문들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둘째로는 성육신 하시기 전에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했다는 주장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직접하신 것이 아니라, 주의 영이 노아를 통해 그 당시 사람들엑 복음을 전파했다는 ‘노아를 통한 영적 전파설’ 입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20절 말씀과 연관해서 볼 때는 적절한 해석이지만 벧전 3:20절과 벧후 2:5 외에는 다른 성경구절의 지지가 약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동의하는 내용으로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 상태에 있는 동안에 지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영혼이나 타락한 천사들에게 복음의 승리를 선포하셨다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의 근거는 본문의 ‘선포’라는 단어의 헬라어 ‘에케뤼크센’(영, Proclaim, Preach, Announce)은 구원의 수단, 길, 방법을 직접 제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였다’라는 의미보다는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영적 세계에 있는 영들에게 승리를 선언했다고 봅니다. 즉 구원에 대한 전파가 아니라 심판의 선고와 불신앙에 대한 경고이며, 부활로 완성하실 승리의 선언이라는 것입니다.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함을 느낄 수 있겠지만 간단히 정리를 하면 개혁교회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두번째와 세번째 주장을 절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옥에서 선포했다는 구절이 사후 회개 가능성이나 구원의 기회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의 표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불신자의 사후 상태는 바뀔 수 없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불신자의 사후 구원을 주장하는 이론들이 있지만, 성경 전체의 교훈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점이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시간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 사람만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며, 사후에 회개나 구원의 기회가 없다는 것이 성경적 가르침의 신앙입니다.

[묵상 및 적용]
오늘 본문에 기록된 그리스도인의 선한 양심에 대한 내용과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과 승천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의 삶의 모습의 현 주소를 좀 더 진지하게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만약 한 사람이 “나는 구원받았습니다”라고 고백하면, 그 고백을 구원의 확신이 있는 것으로 단정하여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은 100% 맞는 것이라고도 할 수 없고, 또한 100% 틀린 것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개인의 고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반면에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잘못됬었다라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데 베드로는 구원의 확신과 그 경계에 대해서 확실하게 선을 긋기에는 모호한 면이 있다는 우리의 고민을 십분 이해하고 말씀을 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명쾌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의 상황 속에서 현재의 삶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에 대한 조명입니다. 오늘날 성도 개인의 삶 뿐만 아니라, 교회도 세속적 가치에 물들어가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악이 직면하게 되는 심판과 의인의 구원이라는 단순한 성경적 가르침입니다. 이 가치를 잃어 버리면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땅의 방식으로’ 승리를 거두려는 경향을 취하게 됩니다. 성도와 그 성도가 속한 교회가 유지해야 할 삶은 적어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구원받은 자로서의 삶의 바른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삶의 바른 모습을 오늘의 본문 속에서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사는 선한 양심, 선한 행동의 삶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선을 행하라고,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라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도,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신 이유도, 노아의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 선포하신 이유도, 그리고 부활하신 이유도 모두 “구원”이라는 주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1절에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라고 말하면서 왜 우리에게 선한 양심과 행동의 삶이 중요한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거룩한 삶, 선한 양심과 선한 행동의 삶은 그 자체가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기도이며, 구원의 증표입니다. 즉 선한 삶은 구원론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에서는 성도의 고난에 대해서 여러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본질적인 관심사는 고난이 아니라, “선한 삶” 입니다. 고난이 중요한 것은 그 고난이 혹시라도 선한 삶을 사는 것을 방해할 수 있는 “시험”이 되거나, 고난 때문에 성도의 선과 의의 길을 포기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고난을 많이 언급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이나 야고보서, 또는 베드로서에서는 “선한 행동, 선한 양심의 삶”은 구원받은 성도의 확증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즉 구원을 단순하게 “은헤로 구원받는다”라고 말하지 않고, 구원받은 자의 삶이 구원의 확증을 알게 해 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대한 세상의 냉정한 시각과 사회적 인식이 “최저”를 향하여 내려가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우려가 심심치않게 등장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평가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만, 세상의 평가가 만약 하나님의 평가도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염려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인간은 때때로 자신의 구린 모습을 감추면서 다른 사람의 약점과 불편한 점들은 신랄하게 비판하곤 합니다. 우리가 악을 행함으로 받는 사회의 냉대나 고난이라면 이것은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과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그리스도와도 무관한 고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재의 고난이나 어려움이 혹시라도 악을 행하으로 받는 고난이 아닌가를 스스로 면밀히 살펴서 다시 한번 ‘내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는가?’를 말씀에 비추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제는 2020년 12월의 신앙생활이란 2020년 3월 이전의 교회 안에서만의 신앙생활과는 판이하게 달라졌습니다. “화려한 교회 생활”의 그늘에 가려진 “개인 스스로의 신앙생활”이 하나님 앞에서 증명될 때가 바로 요즘음과 같은 시기입니다. 성도들 각 개인의 부르심을 받은 터전, 일상적 삶이 중요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신앙의 틀을 떠나서 여러분 모두의 삶이 신앙의 현장임을 기억하고 참 소망이요, 산 소망 되신 주를 의지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기도]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신 예수님! 우리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시고 죄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루도 사탄의 죄의 유혹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리지 못함을 긍휼히 여기시고 정결케하시며 주의 날개 아래 거하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주의 날을 간절히 기대하오니 주여 속히 오시옵소서. 주의 손길이 우리에게 임하실때에 참 기쁨이 있음, 질병이 치유되고, 세상의 명예와 권세와 물질의 유혹에서 자유함을 누릴 수 있음을 믿사오니 주님의 오심이 우리 삶 속에 능력으로 임하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찬양: ” 선한능력으로(Von guten Mächt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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