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나눔

오늘의 말씀묵상 8/31/2021 화요일 [사사기 11:29-40]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8-31 09:18
조회
591

8. 31. 화요일. 오늘의 말씀묵상

찬양링크 “믿는다면”:

[본문: 사사기 11:29-40]
29.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의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30.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31.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32.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33.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매우 크게 무찌르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34.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35.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36.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
37.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버려 두소서 내가 내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니
38.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을 기한하고 그를 보내니 그가 그 여자 친구들과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39.두 달 만에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온지라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 이것이 이스라엘에 관습이 되어
40.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

[본문이해]
[29-33, 입다의 출정과 인신 번제 서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여 길르앗의 미스베에서 암몬 자손과 싸우러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 서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입다로 하여금 암몬을 이기게 해 주시면 돌아올 때 자기 집에서 자신을 처음 영접하는 자를 여호와께 돌려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한 것입니다. 입다가 암몬 자손과 맞서 싸우니 여호와께서 승리하게 하셔서 아로엘에서부터 민닛까지 20성읍을 치고 아벨 그라밈까지 무찌르니 암손 자손이 항복합니다.

29절,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성경에서 ‘~에게 임하였다’라는 말로 표현되었을 때에 히브리 단어의 전치사 사용 용례에 따라 2가지로 그 뉘앙스가 표현이 됩니다. 첫째는 전치사 “알”을 사용하여 ‘~위에(upon)’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시기는 했는데 그의 ‘안에’, 즉 내부에 내주하지는 않는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신이 역사하시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시면 언제든지 소멸될 수도 있음을 나타냅니다. 구약 시대에 히브리 성경에 표현된 문법은 대부분 이 경우에 해당됩니다. 둘째는 전치사 “뻬”를 사용하여 ‘~안에(in)’라고 표현합니다. 이 경우는 ‘들어오다’라는 뉘앙스의 ‘뽀’라는 단어와 함께 쓰이면 하나님의 신이 내부까지 들어오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대표적으로 에스겔 2:2, 3:24이며, 신약성경에는 성령에 대하여 모두 두번째 뉘앙스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본문 29절에 “입다에게 임하시니”에 사용된 히브리어의 뉘앙스는 첫번째에 해당됩니다. 이는 구약 시대의 성령 하나님의 역할은 내주하는 역할 보다는 ‘사역적’ 측면이 강하지만, 신약 시대의 성령 하나님의 역할은 ‘구원론적’ 측면이 강하여 내주하는 것으로 표현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30절, “서원하여”: 이 말의 히브리어 원형은 “나다르”로서 ‘맹세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신 23:21에 의하면 약속한 서원이나 맹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켜져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경솔한 서원에 대해서 레 19:12, 민 30:2, 전 5:4 등등의 말씀에서 금하고 있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입다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조건으로 하나님께 맹세하고 있습니다. 사실 여호와의 영이 임하였으므로 그가 서원의 맹세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암몬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을텐데, 아마 입다는 지나친 인간적 충동과 열정으로 인해 그만 경솔한 맹세를 한 것 같습니다. 그는 전쟁을 앞두고 상당한 불안감을 느꼈으며 이러한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그릇된 서원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31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입다가 사람을 번제물로 드린다는 본문의 말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왜냐하면 37-38절에 표현된 “죽음을 인하여”라는 번역은 한글성경의 의역이고, 실제 히브리 성경에는 “죽음”이라는 의미가 없으며, 또한 “번제로 드려졌다”라는 결과에 해당하는 말이 표현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실제로 입다의 딸을 번제로 드리지 않았다는 해석을 하는 부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원래 번제는 짐승의 수컷만을 드리게 되어 있는데 번제물이 되는 사람이 입다의 딸로 여성이었으며, 또한 사람을 불태워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게서 극히 꺼리시고 가증하게 여기셨기 때문에(신 21:31, 18:9-10, 왕상 16:3, 왕하 21:2, 6)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부류는 주로 중세 이후에 등장하는데, 입다가 드리겠다는 번제는 실제 제물 전체를 불태워 드리는 번제가 아니라 성전 봉사자로 헌신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거나, 평생 결혼하지 않은 채로 평생 혼자 살았다고 주장하거나, 또는 사람이 아니라 짐슴을 번제로 드렸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들과 반대로 둘째로는 성경 문맥상에서 알 수 있듯이 실제로 입다의 딸을 번제물로 드렸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은 이미 중세 이후에 새로운 해석들이 등장하기 전에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 유대 랍비들, 대부분의 교부들이 주장해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대부분의 보수주의 학자들은 초대교회 시대와 교부시대의 해석을 따라 실제로 입다의 딸을 번제로 드려졌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곧 본문의 문맥을 통해서 정황상 살펴 보면 성전 봉사자로 대체되거나, 짐슴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번제물로 드리는 것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사사 입다가 인신 제사를 선뜻 서원할 수 있었을까? 에 대한 의문입니다. 그 이유는 입다가 이방 땅에서 살면서 이방인의 인신 제사 풍습에 오염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입니다. 당시 가나안 족속들은 우상에게 제사를 드릴 때에 사람을 희생제물로 삼는 일들이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

[34-35, 제일 먼저 입다를 영접한 딸과 입다의 심정 고백]
입다가 암몬과의 전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 그의 사랑하는 유일한 딸이 춤추며 제일 먼저 나와서 아버지 입다를 영접합니다. 입다가 자기 딸이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을 보고 옷을 찢으며 비통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서원하였으므로 번복할 수 없어 그 고뇌의 심정을 고백합니다.

35절, “자기 옷을 찢으며”: 보통 옷을 찢는 행동은 극한 슬픔을 접하게 되었을 때에 주체할 수 없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성경에 표현되어 있습니다(삼하 13:31, 왕상 21:27, 왕하 19:1, 대하 34:27, 욥 1:20). 곧 죽음이나 그와 유사한 종류의 비극적인 소식을 접하게 될 때 주로 보이게 되는 반응입니다. 개선장군으로 돌아오는 입다는 승리를 축하하는 축제와 기쁨을 기대했을 것이지만, 자기 딸을 보고 기뻐해야 할 상황에서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기억하고 옷을 갈기갈기 산산조각 내서 찢어야 하는 참담한 현실에 바뀐 것입니다.

35절, “참담하게 하는 자요”: “참담하다”라는 말로 한글성경에 번역되었지만, 이 말의 히브리어 “카라”는 사람이 땅에 엎드리거나 무릎을 꿇는 것을 묘사하는 동사입니다. 하나님 또는 왕에 대한 경외심을 나타낼 때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직역하면 “(슬픔으로) 무릎을 꿇게 만들다, (경외심으로) 무릎을 꿇다”의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복받치는 슬픔을 안고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비참한 심정에서 사용된 말로 무릎을 꿇는 심정으로 애통해하고 있으므로 히브리어 단어의 의미를 살려 본문을 번역하면 “딸아! 너는 나를 너무나도 비참하게 만들어 무릎꿇게 하는 자구나!”라는 의미로서 입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36-40, 입다의 딸의 서원 이행에 대한 순종과 애곡]
입다의 딸이 아버지에게 여호와께 서원한 대로 자신에게 행하라고 순종적인 자세를 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였으므로 당연히 맹세한 대로 지켜야 한다고 당위성을 말합니다. 입다의 딸이 단지 처녀로 죽음으로 인하여 동무들과 산에 가서 애곡할 기간을 달라고 하여 2달 동안 애곡합니다. 딸이 돌아오자 입다가 서원대로 행하였으며, 이 사건으로 인하여 해마다 이스라엘 여인들이 입다의 딸을 위해 나흘씩 애곡하는 하나의 풍습이 생겨난 것이라고 사사기의 저자가 적고 있습니다.

38절,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한글성경의 번역은 히브리어 성경을 의역한 번역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의 표현에는 “죽다”라는 표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직역하면 “나의 처녀됨을 인하여 애곡하고”라는 의미가 됩니다. 본문 38절 말씀에 ‘죽음’이라는 의미가 없기 때문에 입다의 딸의 처리에 대해서 논쟁의 쟁점이 되어 온 것입니다.

39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 본문의 옛 한글성경은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라고 번역했었습니다. 이는 37절과 38절에 “죽음을 인하여”라고 의역하여 번역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 “죽었다”라는 의미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39절에 “죽었다”라는 의역을 넣지 않고 원문을 따라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NASB 영어성경, “she had no relations with a man”, NIV “she was a virgin”)”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위의 31절에 설명한 부분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37절과 38절, 그리고 40절, “애곡하다”: 먼저 37절과 38절에 쓰인 “애곡하다”의 히브리어는 “빠카”로서 영어로는 ‘Lament’(애곡하다, 애도하다) 입니다. 하지만 40절에 한글성경에 “애곡하다”로 번역된 말의 히브리어는 “탄나”로서 ‘애곡하다’라는 의미보다는 ‘되풀이하여 말하다, 노래하다’라는 의미나 과거의 사건을 ‘자세히 이야기하다( recount)’의 뜻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40절에 대해서 영어성경들도 번역본들마다 다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KJV, RSV, LB, 한글성경은 “애곡하다”(Lament)로 번역하고 있고, NIV와 NASB는 “(의식으로) 기념하다”(Commemorate)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39절에 “이스라엘의 관습”이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으므로 이스라엘 여인들은 해마다 4일씩 입다의 딸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거나, 기념 노래를 지어 계속해서 되풀이하며 기억하여 교훈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묵상 및 적용]
우리 실생활에서 “거짓말 아닙니다. 내가 정말 맹세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확실함’을 공약하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또는 정말 절실한 소원이나 간절한 응답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주여! 내가 서원하오니 들어 주시옵소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서원이나 맹세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9:12에는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또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5:34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입다의 서원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 서원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묵상의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그 첫번째 교훈은 서원하는 것은 기도 응답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0-31절에 보면 입다는 주께서 암몬 자손을 자신의 손에 붙이실 경우 어떻게 하겠다고 서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29절에 보면 그 이전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입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하셨다는 것은 이미 여호와께서 입다에게 승리를 보장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암손 족속으로부터의 승리는 입다가 서원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입다의 손에 붙여서 승리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게서 입다를 택하시고 그에게 승리를 주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지 입다는 여호와의 영이 임한 후에 서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는데도 왜 그래야 했을까요? 혹시 그의 마음 속에 믿음의 확신이나 담대함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이러한 입다의 모습이 우리 신앙생활 가운데도 종종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서원하면 마치 기도 응답을 해 주실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즉 서원이 기도 응답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 서원하는 것을 오해하는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위에 기록된 레 19:12, 마 5:34이나 민 30:2, 전 5:4의 말씀들에 의하면 서원은 기도할 때나 또는 응답을 요구할 때에 하나님을 상대로 제시하는 조건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조건이나 서원을 보시고 응답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입다의 승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과 그들의 곤고함을 보시고 “은혜” 주신 것이며, 구원을 베푸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지 하나님과 입다 사이의 “쌍방간의 계약”에 의해서 승리하게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때때로 기도할 때에 서원을 하거나, ‘주여! 앞으로 신앙생활을 이렇게 저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조건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그런 조건과 서원 이후에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아! 하나님께서 내 기도의 서원을 들으셨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서원을 기도 응답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서원을 들으시는 것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응답해 주시는 것이 신앙의 유익이 되기 때문에 응답하신 것이지 결코 “쌍방간의 계약”하듯이 우리가 제시한 조건이나, 서원때문에 응답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마치 조건을 제시하듯이 서원을 하거나, 그 서원을 통해서 기도가 응답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바른 성도의 자세는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을 기대하고 믿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번째 교훈은 정말 하나님께 다짐을 하면서 서원을 했을 때 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따르면 여호와 하나님께 약속한 것은 그것은 자기에게 해로울지라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의해야 할 것은 “자기에게 해로울지라도”라는 표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35절에 입다의 심정은 정말 참담했을 것입니다. 승리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무남독녀를 번제로 바쳐야 한다는 슬픔과 당혹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입다의 서원은 여호와의 영이 임한 후에 혹시라도 믿음의 확신에 거하지 못하여 경솔하게 서원하지 않았을까?라는 가능성과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이방 종교의 풍습을 따르는 인신제사를 싫어하신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입다는 자신의 과오를 회개하여 물리는 것이 아니라, 35절에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라고 말하며 지키기로 작정합니다. 즉 자신에게 해로울지라도 입으로 뱉은 서원의 말을 지키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사람은 그의 말한 바와 행하는 바가 얼마나 일치하느냐에 따라 인격의 정도가 가늠됩니다. 말한 바를 행하는 바와 일치시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문제이지만, 자신이 말한 바를 지키지 않는 자를 사람들은 믿지 않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전도자로서의 성도는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더욱이 그 말을 낸 상대가 하나님이라면 그 경우에는 더욱 문제가 엄숙하고, 엄중해 질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기도할 때 수 많은 말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려 하곤 합니다. 나의 삶에 대해서, 행동에 대해서 여러 가지 다짐하는 말로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이끌어 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말한 것에 대해서는 너무나 책임없이 방종의 태도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할 때 온갖 미사여구를 사용하여 말로 다짐하지만, 지키지 못했을 때에 그냥 넘어가거나, 기억하지 못하거나, 무시하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회개하거나 엄중하고 심각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입다의 딸이 아버지에게 ‘2달’이라는 기간을 허락받고 친구들과 산에 가서 애곡하는 시간을 보냅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 ‘두 달’이라는 기간이 입다의 딸 뿐만 아니라, 입다 자신에게 어떤 기간이 되었을까요? 입다의 딸이 보낸 두 달은 자기의 비참한 인생에 대해 애곡하고 인생을 정리하는 기간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 입다에게는 어떤 시간이었을까요? 아마 입다는 하나님께 ‘주여! 차라리 모든 책임은 제가 질테니 제 딸은 살려 주세요. 제가 죽겠습니다’라고 기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딸을 번제로 드려야 하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서원에 대해서 수도 없이 괴로워하며 슬픔으로 무릎을 하나님께 꿇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입다의 두 달간의 후외와 기도는 결코 딸을 살릴 수 없는, 곧 응답 받을 수 없는 기도를 드리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 처럼 입다에게 ‘두 달’의 시간은 결코 응답받을 수 없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응답받을 수 없는 기도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여호와께 약속한 것은 자기에게 해로울지라도 지켜야 한다”라는 두 번째 교훈이 매우 고차원적인 신앙의 결단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입다의 참담한 심정을 생각한다면 너무나 가슴 아프고 비참한 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원하는 것을 함부로 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 대하여 매우 엄중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묵상이 우리에게 던져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이 있습니다. 바로 그럼 입다가 그렇게 참담한 심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입다의 심정은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딸을 죽음에 방치해야 하는 아버지의 괴로움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통해서 자녀를 죽여야 하는 아버지가 받아야 할 슬픔과 참담함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를 깨닫는다면,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세상의 대속제물로 삼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셔야 했던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자녀로서 마땅히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과 행동이 일치되지 않는 세상 속에서, 말과 행함이 있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입다의 교훈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잘못된 신앙의 모습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케 할 수 있음을 늘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사사 입다의 교훈이 우리 모두에게 입에는 쓰지만 몸에는 단 양약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아버지 나의 하나님! 내 입술의 모든 말과 마음의 묵상이 하나님께 열납되기를 소원합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의 믿음의 생활과 삶을 위하여 기도하오니 내게 말씀하시옵소서. 나의 기도의 소원들이 응답되는 기한과 때가 있음을 믿사오니 내 마음대로 결정하거나 행동하지 않게 하시고, 오직 주의 뜻이 이루어짐을 기다리는 제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나의 말과 행동이 일치되기를 원하오니 경솔한 신자가 되지 않게 하시며, 행함이 있는 믿음의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더욱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하시고 내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이 하는 말이나 사단의 속사귐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하시고, 오직 내 손을 잡아 주셔서 일으켜 주시는 주님만을 붙들게 하여 주옵소서. 믿음으로 우리를 일으켜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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