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나눔

오늘의 말씀묵상 8/25/2021 수요일 [사사기 9:26-45]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8-25 09:22
조회
244

8. 25. 수요일. 오늘의 말씀묵상

찬양링크 “샘물과 같은 보혈은”: https://youtu.be/wjL8gZNK0EA

[본문: 사사기 9:26-45]
26.에벳의 아들 가알이 그의 형제와 더불어 세겜에 이르니 세겜 사람들이 그를 신뢰하니라
27.그들이 밭에 가서 포도를 거두어다가 밟아 짜서 연회를 베풀고 그들의 신당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며 아비멜렉을 저주하니
28.에벳의 아들 가알이 이르되 아비멜렉은 누구며 세겜은 누구기에 우리가 아비멜렉을 섬기리요 그가 여룹바알의 아들이 아니냐 그의 신복은 스불이 아니냐 차라리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후손을 섬길 것이라 우리가 어찌 아비멜렉을 섬기리요
29.이 백성이 내 수하에 있었더라면 내가 아비멜렉을 제거하였으리라 하고 아비멜렉에게 이르되 네 군대를 증원해서 나오라 하니라
30.그 성읍의 방백 스불이 에벳의 아들 가알의 말을 듣고 노하여
31.사자들을 아비멜렉에게 가만히 보내어 이르되 보소서 에벳의 아들 가알과 그의 형제들이 세겜에 이르러 그 성읍이 당신을 대적하게 하니
32.당신은 당신과 함께 있는 백성과 더불어 밤에 일어나 밭에 매복하였다가
33.아침 해 뜰 때에 당신이 일찍 일어나 이 성읍을 엄습하면 가알 및 그와 함께 있는 백성이 나와서 당신을 대적하리니 당신은 기회를 보아 그에게 행하소서 하니
34.아비멜렉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밤에 일어나 네 떼로 나누어 세겜에 맞서 매복하였더니
35.에벳의 아들 가알이 나와서 성읍 문 입구에 설 때에 아비멜렉과 그와 함께 있는 백성이 매복하였던 곳에서 일어난지라
36.가알이 그 백성을 보고 스불에게 이르되 보라 백성이 산 꼭대기에서부터 내려오는도다 하니 스불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산 그림자를 사람으로 보았느니라 하는지라
37.가알이 다시 말하여 이르되 보라 백성이 밭 가운데를 따라 내려오고 또 한 떼는 므오느님 상수리나무 길을 따라 오는도다 하니
38.스불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전에 말하기를 아비멜렉이 누구이기에 우리가 그를 섬기리요 하던 그 입이 이제 어디 있느냐 이들이 네가 업신여기던 그 백성이 아니냐 청하노니 이제 나가서 그들과 싸우라 하니
39.가알이 세겜 사람들보다 앞에 서서 나가 아비멜렉과 싸우다가
40.아비멜렉이 그를 추격하니 그 앞에서 도망하였고 부상하여 엎드러진 자가 많아 성문 입구까지 이르렀더라
41.아비멜렉은 아루마에 거주하고 스불은 가알과 그의 형제들을 쫓아내어 세겜에 거주하지 못하게 하더니
42.이튿날 백성이 밭으로 나오매 사람들이 그것을 아비멜렉에게 알리니라
43.아비멜렉이 자기 백성을 세 무리로 나누어 밭에 매복시켰더니 백성이 성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일어나 그들을 치되
44.아비멜렉과 그 떼는 돌격하여 성문 입구에 서고 두 무리는 밭에 있는 자들에게 돌격하여 그들을 죽이니
45.아비멜렉이 그 날 종일토록 그 성을 쳐서 마침내는 점령하고 거기 있는 백성을 죽이며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

[본문이해]
[26-29, 가알의 아비멜렉에 대한 선전포고]
세겜 사람들이 포도를 수확한 후 연회를 베풀고 바알 신당에서 먹고 마시며 아비멜렉을 저주할 때에 에벳의 아들 가알이 아비멜렉과 그의 심복 스불의 세겜 통치를 반대하며, 차라리 하몰의 후손을 섬기는 것이 더 낫다며 세겜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만일 자기가 세겜 사람들을 거느리게 된다면 아비멜렉을 충분히 제거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치고, 가알은 아비멜렉에게 전쟁을 선포합니다.

26절, “에벳의 아들 가알”: 본문에 등장하는 가알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에벳”에 대한 해석에 따라 두 가지로 추정됩니다. 첫째 한글성경에 “에벳”으로 번역된 단어의 히브리어 원형이 “에베드”라면 그 뜻이 ‘종, 하인, 노예’라는 의미이므로 가알은 노예의 아들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입니다. 둘째, 히브리어 원형이 “에베르”라면 그 뜻은 ‘건너편’이라는 의미로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건너다니면서 약탈을 하는 사람으로 추정합니다. 그러므로 가알은 약탈을 하는 사람의 아들이 되는 셈이며, 또한 그와 함께 온 “그의 형제”들도 친형제일수도 있지만 가알과 뜻을 같이하여 단체를 형성하고 있는 약탈자의 무리일 수 있습니다. 결국 가알의 등장으로 인해서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에게 반란을 효과적으로 일으킬 방법은 찾은 셈이 되는 것입니다.

28절, “그가 여룹바알의 아들이 아니냐”: 가알은 아비멜렉을 ‘기드온의 아들’이라고 지칭하지 않고 ‘여룹바알의 아들’이라고 지칭합니다. 이는 세겜 사람들로 하여금 ‘바울과 다투는 자’라는 ‘여룹바알’이란 이름의 뜻을 상기시킴으로 기드온과 아비멜렉에 대한 적개심을 일으키려는 의도적 목정이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세겜은 우상 바알을 신으로 섬기는 땅이기 때문에 ‘여룹바알’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들에게는 매우 껄끄러운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름을 가진 기드온의 아들이 아비멜렉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재인식 시킴으로써 적개심을 더욱 부추기며 선동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28절,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후손을 섬길 것이라”: “하몰”은 ‘나귀’라는 뜻을 가진 인물로서 히위 족속 중의 한 사람이며, 세겜 사람들의 조상입니다(창 33:19, 34:2). 그러므로 하몰의 후손은 바로 세겜에 살고 있는 그들 자신을 가리킵니다. 가알이 이런 말을 한 이유는 세겜 사람들은 세겜 원주민들에 의해서 통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 시키기 위해서라 볼 수 있습니다. 아비멜렉이 세겜과 전혀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세겜의 원주민이라고 보기에는 이방적인 요소가 많은 인물이기에, 가알은 세겜인 정통 계열에 있지 않은 아비멜렉을 대조시킴으로써 그가 세겜의 통치자로서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강하게 부각시키며, 그에 대한 반감을 확실히 조장하여 세겜 사람들이 그를 배반하도록 선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29절, “네 군대를 증원해서 나오라”: 가알은 현재의 세겜 사람들이 자신이 통치 아래에 들어온다면, 아비멜렉을 지금 당장이라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합니다. 그리고 아비멜렉과 그의 심복 스불에게 군사를 더 많이 증가시켜 자신과 싸우자고 선언하고 있으며, 적의 감정을 돋우는 말로써 전쟁을 공식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셈입니다.

[30-38, 아비멜렉과 가알의 싸움]
세겜의 방백 스불이 가알의 말을 전해 듣고는 노하여 아비멜렉에게 사자를 보내어 가알이 세겜 사람들을 충동하여 반란을 꾀한다고 보고합니다. 그리고 밤에 밭에 매복하였다가 아침에 성읍을 기습하여 가알의 무리가 나오면 공격하라고 작전을 건의합니다. 건의를 받아들인 아비멜렉이 군사들을 네 그룹으로 나누어 매복합니다. 그런데 가알이 성문 입구에서 매복한 군사들을 목격하여 스불에게 말하지만, 스불은 가알에게 그가 산 그림자를 사람으로 잘못 본 것이라고 무시합니다. 가알은 산 그림자가 아니라 매복한 사람들이라고 재차 말을 하자, 스불이 가알에게 이전에 아비멜렉을 조롱하여 호언장담했던 것을 상기시키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성 밖으로 나가 맞서서 싸우라고 유도합니다.

30절, “성읍의 방백 스불”: 본문의 “방백”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사르”는 한 나라의 일정 지역을 위임 통치하는 통치자입니다. 스불은 세겜보다 넓은 지역을 통치하는 아비멜렉이 세겜 성읍을 대신 통치하도록 위임한 세겜의 실질적인 통치자라 볼 수 있습니다.

33절, “엄습하면”: 이 단어의 히브리어 원형동사 “파솨트”는 ‘습격하다, 침입하다’라는 뜻으로 불시에 기습 공격하여 침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불은 지금 아비멜렉에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시간인 해뜰 무렵에 세겜 성읍을 기습 공격하라고 일러주고 있는 것입니다.

35절, “가알이 나와서 성읍 문 입구에 설 때에”: 본문의 의미는 성읍 문을 열고 성읍 사람들의 통행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고대 근동의 성문은 외부와의 교통을 이루는 통로이며, 성의 출입을 통제하는 수단입니다. 그런데 가알이 “성읍 문 입구에 섰다”라는 표현은 아마도 그가 세겜 성읍의 문을 여닫는 일을 주관하는 일을 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고, 또는 아비멜렉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군사들을 독려하거나 철저히 성문에서 검색하려는 목적하에 성읍 문으로 나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알이 아침에 성읍 문에 나올 것을 알고 있는 스불이 이 사실을 아비멜렉에게 아침을 맞을 때에 공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건의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36절, “백성이 산꼭대기에서부터 내려오는도다…산 그림자를 사람으로 보았느니라”: 가알이 아비멜렉의 군사들이 산에서 내려오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하지만 스불은 아비멜렉에게 완벽한 공격을 위해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며 가알을 안심시키려고 그에게 사람이 아니라, 햇빛에 의해 생기는 산의 그림자를 잘못 본 것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37절, “밭 가운데를 따라 내려오고 또 한 떼는 므오느님 상수리나무 길을 따라 오는도다”: 본문에 “밭”으로 번역된 말의 히브리어 “하아레츠”는 일반적으로 ‘땅’을 뜻하므로 실제적으로 ‘밭’이 될 수도 있고, 그냥 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 땅이 어떤 땅이며, 어떤 곳을 가리키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운데”라는 말의 히브리어 “탑부르”는 ‘중심지, 가장 높은 부분’을 뜻하기 때문에 36절에서 ‘산꼭대기에서부터 내려온다’라는 말하고 연결하여 생각하면 아비멜렉의 군사들이 내려오는 위치가 세겜 성 보다는 높은 위치이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밭 가운데를”라는 본문을 히브리어로 직역하면 “그 땅의 꼭대기로부터”라는 의미가 됩니다. 또한 “므오느님”이라는 히브리어는 ‘덮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에서 유래된 말인데 성경에서는 주로 ‘마술을 행하다, 점을 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신 18:10,14, 왕하 21:6, 대하 33:6, 사 57:3, 렘 27:9, 미 5:12). 그러므로 므오느님 상수리 나무라는 이름은 아마도 이 상수리 나무 아래에서 사람들이 점을 치고 마술을 행했기 때문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므오느님 상수리 나무가 있는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아비멜렉의 군사들 중 한 그룹은 그 상수리 나무가 서 있는 길쪽에서 세겜 성으로 공격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39-41, 가알의 패배와 세겜의 멸망]
가알이 세겜 사람들을 이끌고 선봉으로 앞장서서 싸우다가 아비멜렉에게 패하여 결국 도망하고 맙니다. 치열한 전투 때문에 부상을 입고 쓰러진 자가 많아 성문 입구까지 널려 있었으며, 스불은 가알 일당을 세겜에서 추방합니다. 세겜 사람들이 밭으로 나온다는 정보를 들은 아비멜렉은 군사를 세 그룹으로 나누어 밭에 매복시키고, 세겜 사람들이 나오는 것이 보이자 한 그룹은 성문 입구를 봉쇄하게 하고, 두 그룹은 밭에 있는 세겜 사람들을 기습하여 학살합니다. 그 날 종일토록 성을 쳐서 세겜 백성들을 죽이고 점령하였으며, 성을 헐고 소금을 뿌렸습니다.

42절, “백성이 밭으로 나오매”: 위에서 설명하였듯이 한글성경에 “밭”(히, 아레츠)으로 번역된 말은 실질적으로 밭이 될 수도 있고, 일반적인 ‘땅’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문맥과 정황상 군사들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이 밭으로 나온다는 표현이므로 민간인들이 전투를 위해서가 아니라, 생업에 종사하기 위해 아침에 밭으로 향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비멜렉의 군대가 가알의 무리를 제압하고 모두 떠났을 것이라 생각하고 밭으로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보고를 들은 아비멜렉에 의해 세겜 주민들은 철저하게 응징을 당하고 맙니다.

45절,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 아비멜렉이 자기 형제 70명을 죽이고 왕이 되는데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던 세겜 성읍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알의 충동에 아비멜렉을 배반한 대가는 멸망이었습니다. 성경은 성을 헐고 소금을 뿌렸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그 땅을 황폐하게 만들어 다시는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성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죽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미래에도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한 것이며, 이에 대해 저주를 내리는 제의적 의식으로 소금을 뿌리는 행위를 통한 철저한 응징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반역을 하지 못하도록 공포 정치를 보여준 것입니다. 이러한 아비멜렉의 조치를 통해서 그의 잔혹한 성품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기도 합니다.

[묵상 및 적용]
오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아비멜렉, 세겜 성읍의 방백 스불, 세겜 사람들은 모두 원래 같은 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비멜렉이 자기 아버지의 아들들, 즉 형들이나 동생들 69명을 죽일 때에 동조했던 사람들이며 힘을 보탰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악을 행한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성경은 악을 행한 책임의 대가는 각자의 때에 임하는 보응이요 심판임을 가르쳐 주고 있으며, 악을 행하는 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악을 행하는 사람은 심판의 때가 와도 깨닫지 못하며, 뉘우치지 않기 때문에 ‘어리석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에벳의 아들 가알은 세겜 사람들을 선동하여 아비멜렉에게 반기를 들게 합니다. 하지만, 반란은 아비멜렉과 그의 심복 스불이 성공적으로 진압해 냅니다. 결국 반란에 실패하므로 결국 세겜 사람들은 그 대가를 치루게 되는데 부족이 패망하고, 살던 주거지 성읍이 헐리고, 소금이 뿌려질 정도로 참담한 대가를 치룹니다. 그럼 반란을 진압한 똑같은 악인의 행보를 걸었던 아비멜렉은 어떻습니까? 그도 역시 삿 9:53의 기록에 의하면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어 죄의 대가를 치루게 됩니다.

이러한 성경에 기록된 일련의 과정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한 가지 발견할 수 있는 점이 있습니다. 사사기는 아비멜렉과 세겜의 사태를 서술하면서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거나,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즉 서로 망해 가면서 그 누구도 죄에 대한 회개도, 또는 책임을 뼈저리게 통감하는 모습도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성경은 그들의 죄를 기록하였고, 그리고 비참한 죽음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적 심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깨닫게 되는 바는 ‘어리석음이 심판의 때를 깨닫지 못하게 한다’라는 점입니다. 이 ‘어리석음’이란 지식적인 한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지금이 회개할 때인가, 아니면 심판의 때인가를 깨닫지 못하는 영적 무지함이요, 하나님의 존재와 살아계심을 인식하지 못하는 신앙의 부재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 시대를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운 ‘마지막 때’라고 말하곤 합니다. 마태복음 24:5-12에 주님께서는 심판의 때, 마지막 때를 알려 주는 징조를 말씀하셨습니다. 기근과 지진 등의 자연 재해와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끼리의 전쟁,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 등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심판의 징조, 주님이 다시 오실 징조에 대해서 충분히 말씀하셨으며, 성경의 곳곳에 마지막 때에 대한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고, 이러한 징조들이 지금 이 시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자’는 지금 이 때가 어떤 시대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 시대인지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심판의 때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곧 준비하지 않고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듣고도 대비히 않는 자는 노아 시대의 사람들과 소돔 성을 떠나라는 경고를 들었으나 순종하여 행치 않았던 롯의 사위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심판이 닥친 후에야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심판이 닥친 후에는 아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벳의 아들 가알의 선동과 충동질에 넘어간 세겜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가알의 선동에 충동적으로 반응한 세겜 사람들은 ‘자신들은 힘이 세며 충분히 아비멜렉을 이길 수 있다’라고 맹신하고 맙니다. 그래서 결국 가알의 선동에 동조하여 자신들의 위치와 힘의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세겜 사람들의 어리석은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지 묵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 우리들도 사단의 미혹이나 세상의 유혹에 마음이 혹하지 않습니까? 혹시 우리 스스로의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내 자신의 힘과 능력을 맹신하거나, 내 능력으로 무엇인든지 할수 있다고 어리석은 결정을 하는 모습은 있지 않습니까? 잘못한 것이나 죄를 지은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냥 슬쩍 지나가지는 않습니까? 회개할 때를 깨닫지 못하거나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꿈에서 조차 잊고 지내는 것은 아닙니까?

이 세상은 반드시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지배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 악을 행한 사람은 악의 열매를 거두고, 선을 행한 사람은 선의 열매를 거둡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악을 행하고도 일평생을 평안하게 보내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데도 세상에서 남 부러울 것이 없이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인생의 행위를 지켜 보고 계십니다. 설령 누군가는 이 땅에서는 심판의 때를 겪지 않을지라도 “여호와의 날”, 즉 최종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본문에서 악을 행한 세겜 사람들의 마지막 비참한 모습을 보여 주었듯이 “여호와의 날”이 임하는 그 때에는 악을 행한 사람은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세에 존재하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거나, 그로 인하여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악인의 형통은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더욱 쌓아가는 과정임을 알고 조용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 가운데 있는 죄에 대해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지 말고, 능동적인 자세를 취하여 악과 싸우거나, 제거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라고 적극적으로 능동적인 자세를 취했듯이, 여러분은 죄의 소욕을 없애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죄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을 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생각을 바꾸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갈 5:16) 신령한 지혜가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사해 주신 예수님! 이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내가 지은 죄를 깨닫지 못하여 회개의 때를 망각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하시고, 주의 긍휼하심과 사랑을 은혜를 좇아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가 되게 하시고 회개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악인을 심판하심을 믿사오니, 고통과 환란의 때에 악인의 득세함을 인내하게 하옵소서. 악의 활개침에 분노하거나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믿음의 시선이 오직 하나님만 바라 보게 하시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주께서 다시 오신다는 그 약속을 믿고 소망하며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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