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나눔

오늘의 말씀묵상 8/18/2021 수요일 [사사기 7:1-8]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8-18 09:27
조회
967

8. 18. 수요일. 오늘의 말씀묵상

찬양링크 “아무 것도 두려워 말라”:

[본문: 사사기 7:1-8]
1.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일찍이 일어나 하롯 샘 곁에 진을 쳤고 미디안의 진영은 그들의 북쪽이요 모레 산 앞 골짜기에 있었더라
2.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3.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만 명이었더라
4.여호와께서 또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 가로 내려가라 거기서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이 너와 함께 가리라 하면 그는 너와 함께 갈 것이요 내가 누구를 가리켜 네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너와 함께 가지 말 것이니라 하면 그는 가지 말 것이니라 하신지라
5.이에 백성을 인도하여 물 가에 내려가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개가 핥는 것 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들을 너는 따로 세우고 또 누구든지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들도 그와 같이 하라 하시더니
6.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의 수는 삼백 명이요 그 외의 백성은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지라
7.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 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을 네 손에 넘겨 주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자기의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
8.이에 백성이 양식과 나팔을 손에 든지라 기드온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각각 그의 장막으로 돌려보내고 그 삼백 명은 머물게 하니라 미디안 진영은 그 아래 골짜기 가운데에 있었더라

[본문이해]
사사기 7, 8장은 가나안 중부 지역 사사 기드온에 관한 내용으로 7:1-8:21절까지는 기드온의 미디안 전쟁에서의 승리에 대해 기록하고 있으며, 8:22-35절은 기드온의 과오와 죽음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1-3,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군대 축소를 일차로 지시하심]
이스라엘 진영은 하롯 샘 곁에 진을 쳤고, 미디안은 북쪽 모레 산 앞에 진을 쳤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스라엘 군대의 수가 너무 많으므로 이대로는 미디안 연합군을 그들의 손에 붙이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미디안에 승리한 원인을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능력에서 찾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지시를 따라 두려워 떠는 자를 돌려보내고 남은 자가 일만 명이었습니다.

1절, “하롯 샘 곁에”: “하롯”의 뜻은 ‘떨다’라는 뜻의 “하라드”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떨림’이란 의미입니다. 이스르엘 골짜기의 남쪽에 있는 길보아산의 서쪽 가장 자리에 위치한 것으로 유추되며 현재의 ‘아인 얄룻(Ain Jalud)’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1절, “모레산 앞 골짜기”: 모레산의 위치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스르엘 골짜기 주변의 낮은 언덕으로 된 산으로 추정됩니다. 본 절에 “산”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끼브아트”는 풀과 나무가 우거진 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조그마한 언덕을 뜻하기 때문에 이스르엘 골짜기 안에 있는 조그마한 언덕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절,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하나님은 여기에서 인간의 이성적 판단과는 매우 상반되는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미디안 연합군의 숫자는 7:12에 의하면 메뚜기 떼와 비교될 정도로 많고, 8:10에 의하면 135,000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군사는 32,000명으로 4분의 1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숫자가 많기 때문에 미디안을 그들의 손에 붙이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이번 전투를 철저하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끌어서 미디안을 물리친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인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시려는 목적을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3절, “길르앗산을 떠나 돌아가라”: 본문에 나오는 “길르앗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이견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진친 곳은 요단 서편 땅이고 길르앗산은 요단 동편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해설의 첫번째는 길르앗산이 요단 동편에 있었을 뿐 아니라 요단 서편에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요단 서편의 길르앗산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받아들이기 힘든 견해입니다. 둘째는 이 표현을 ‘집으로 가다’라는 의미를 지닌 속담과 같은 당시의 관용 표현으로 보는 의견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 RSV는 이 견해를 따라 본문을 의역하여 “let him return home”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확인할 수 없는 추정일 뿐입니다. 세번째로는 ‘길르앗’을 ‘기드온’으로 바꾸어 읽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 또한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많이 받아들여지는 견해는 ‘길르앗’을 ‘길보아’ 산의 오기로 보는 것입니다. 길보아산은 요단 서편 에스드라엘론 평원 남동쪽의 구릉 지대로서 고대 많은 전투가 벌어졌던 전략상 요충지역이기 때문입니다(삼상 28:4, 31:1,8, 삼하 1:6,21, 22:12).

[4-8, 여호와께서 군대 축소를 이차로 지시하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군대의 수자가 아직도 많으므로 물가에서 시험하여 군사를 선발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물먹는 자세로 군사를 두 종류로 구분하니 손으로 물을 떠서 핥듯이 마시는 자는 삼백 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무릎을 꿇고 마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물을 핥아 먹은 삼백 명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므로 나머지는 고향으로 돌려보내게 됩니다.

4절, “시험하리라”: 이 단어의 히브리어 “차라프”는 ‘녹이다, 단련하다, 시험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겔 22:20에 의하면 금속을 뜨거운 용광로에 넣어 불순물을 제거해 내는 제련의 의미를 지닌 ‘녹이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렘 6:29에는 풀무 불에 금속을 ‘단련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사 1:25에 의하면 사람들을 연단하여 그들 속에 있는 죄악을 제거하는 의미의 ‘씻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시 17:3에는 사람의 마음을 ‘시험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본문에서는 마치 용광로에서 불순물을 제거하여 순수한 것을 얻는 것처럼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들만 구별해 내는 의미의 ‘시험하다’라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5절, “개가 핥는 것 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와 6절,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 5절과 6절을 이해하는 데 물을 먹는 자세에 따라 구분법이 다른 면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5절과 6절을 묶어서 물을 먹는 방법에 따라 3가지로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첫번째 구분법에 의하면 물을 먹는 방법은 (1) 개처럼 혀로 핥아 먹는 자, (2)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는 자, (3)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아 먹는 자로 구분합니다. 그래서 (1), (2)은 모두 경계심이 부족한 자세이므로 타락한 것이고,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아 먹는 자들 만이 최종 선발된 300명이라 주장합니다.

두번째 구분법은 5절과 6절을 각각 분리해서 5절은 물먹는 자세를 언급한 것이며, 6절은 5절에 대한 결과로 선택된 자들을 언급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구분법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개와 같이 핥는 자세가 곧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와 같은 자세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고대 근동 지방 특히 애굽과 같은 지역에서 개는 경계심과 조심성이 강한 동물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일강과 같은 곳에는 악어가 많기 때문에 물을 마시는 개들은 언제나 위기감을 느끼면서 좌우를 살피면서 물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가 핥는 것같이 혀로 물을 핥는 자들”은 경계심이 강한 자들로 보는 것입니다. 즉 5절의 표현과 6절의 표현을 같은 행위로 받아들여 손으로 물을 움켜 떠서 개가 핥는 것 같이 물을 먹는 자라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또한 두번째 구분법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7절의 “물을 핥아 먹은 삼백 명”이라는 표현에서 히브리어 원문성경에는 “물을 마시다”라는 표현은 없고, 단지 “핥다”라는 히브리어 “라카크”만 표현되어 있는 것에 주목합니다. 그래서 7절을 직역하면 “그 핥아 먹은 삼백 명”이라는 뜻이 됩니다. 즉 7절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이 선택하신 300명의 기준이 ‘핥았다”라는 행위에 강조점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개와 같이 핥는 것”과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는 자”를 같은 행위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을 먹는 자세에 따라 학자들의 주장하는 바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2가지 자세이든, 3가지 자세이든 어떤 자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선택한 자세를 취한 사람들의 숫자가 300명이라는 것입니다. 각각의 자세에 대해서 여러가지 교훈을 풍유적이거나 비유적으로 적용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숫자에 이르도록 시험하셨으며, 원하시는 300명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8절, “이에 백성이 양식과 나팔을 손에 든지라”: 본문 “든지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카흐”의 기본적인 뜻은 ‘취하다, 붙잡다’라는 의미입니다. 한글 성경의 표현에는 단지 ‘양식과 나팔을 손에 들었다’라는 의미만 있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각각 자기들의 장막으로 돌아가게 될 군사들이 소유하고 있던 양식과 나팔을 최종 선발된 300명이 취하였다는 뉘앙스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직역하면 “이에 백성이 양식과 나팔을 취하여 손에 든지라”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묵상 및 적용]
오늘 본문은 너무나 유명한 기드온의 삼백 용사를 선발하는 과정이 기록된 본문 말씀입니다. 주일 학교에서 적어도 1년에 한번은 설교로든, 아니면 성경공부 시간에 들었던 적이 있는 본문 말씀이기도 합니다.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는 기드온의 삼백 용사의 전투 스토리가 진행되기 전에 32,000명 가운데 정예병을 뽑는 기상천외한 하나님의 방법이 본문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묵상하다가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 선발된 삼백 용사들의 심리상태가 어떠했을까?’라는 궁금점이 생겼습니다. 그들의 마음 상태를 한번 상상해 보면 어떨까요?

처음에는 32,000명이 모였었는데 하나님께서 두려워하는 자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해서 22,000명이 집으로 돌아 갔습니다. 남은 일만명의 군사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니, 22,000명을 왜 돌려보내지?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싸울 수 있는 의지와 힘을 넣어 주면 되지 않나? 그게 기드온 사사의 역할 아닌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 보다는 둘이 낫고, 둘 보다는 셋이 더 나은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고대 전쟁에서 전투에 나서는 군인의 숫자는 승리의 조건 가운데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만명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줄이라고 하십니다. 결국 기드온 사사는 한 술 더 떠서 물먹는 자세에 따라 9,700명을 또 다시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아마 남아 있는 300명 용사들은 생각하기를 10,000명으로 미디안 연합군 135,000명을 상대하려면 한 명의 군사가 최소한 13-14명을 물리쳐야 하는데, 300명으로 상대하려면 이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9,700명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심리적으로도 매우 불안해졌을 것입니다. 물론 300명의 용사들은 두려움에 떨지 않는 자요, 비전투 중에도 경계심도 늦추지 않는 준비된 자라 할지라도 대다수가 돌아가 버린 상황에서 그들 자신들도 고향과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불안한 심리 상태에 있는 군인은 전투에 나갈 수 없습니다. 또한 두려움에 떠는 자나 믿음의 확신이 없는 자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전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미디안을 두려워하는 자들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자들이 전투에 참여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그들은 오직 도망쳐 숨기에 급급할 것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사기를 떨어 뜨려서 결국 그 전투는 패배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두려움에 떨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두려움에 사로 잡혀 하나님께서 명하신 가나안 정복마저 포기하고 애굽 땅으로 다시 돌아 가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광야에서 그들의 생애를 마감해야만 했습니다.

기드온 사사는 이러한 심리상태에 있는 300 용사들의 마음이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할 수 있다!’라는 믿음과 확신 가운데 거하게 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심리적 불안감과 초조함이 있을 법한 상황을 해결하는 표현이 바로 8절의 “머물게 하니라”라는 말씀입니다.

한글성경의 표현은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남는다’라는 의미의 ‘머물다’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선택된 300명이 떠나지 않고 머물게 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성경의 의미는 좀 다른 표현입니다. “머물다”로 번역된 이 말의 히브리어 “하자크”라는 동사의 의미에는 ‘남다, 머물다’라는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동사의 기본적 의미가 “강하다, 강해지다, 강하게 하다, 도와주다, 수리하다, 붙잡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직역하면 “그 삼백 명을 강하게 하였다”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불안감을 남아 있을 법한 300 용사의 마음을 강하게 하였다는 뜻이며, 그들의 흔들림없이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강하게 붙들었다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움 가운데 있거나 불확신 가운데 있을 때에 가만히 내버려 두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상황에 우리가 처해 있을 때마다 우리를 붙들어 주시며, 강하게 하시며, 지켜 주시는 분입니다.. 그 예를 하나 들면, 창세기 19장의 소돔 성의 멸망 사건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9장에 하나님께서 소돔 성에 보낸 두 천사가 ‘여호와의 심판의 때를 피하여 속히 떠나라’는 권고를 룻에게 합니다. 하지만 뭐가 아쉬운지 롯은 소돔 성을 빨리 떠나지 못하고 지체하여 머뭇거리고 있을 때에 창 19:16에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표현된 “잡아”라는 의미가 오늘 본문의 “머물게 하다”와 같은 히브리어 동사 “하자크” 입니다. 또한 이사야 41:13에서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실 때에 본문에 기록된 “불들다”라는 말이 기드온이 삼백 명을 “머물게 하다”라는 말과 같은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8절에서 기드온은 최종적으로 선발되어 남은 300명의 용사들을 단순하게 머물게 한 정도로만 그친 것이 아닙니다. 기드온은 적극적으로 그들을 가지 못하게 붙들었으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강하게 용기를 북돋아 준 것입니다. 어쩌면 사사기 6장 16절에서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하신 약속의 다짐과 승리의 선언을 300명의 용사들에게 “여호와께서 반드시 너희와 함께 하리니 너희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라고 전해주며 그들을 안심시키고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오직 담대하게 하나님의 명령을 두려움 없이 순종하여 실행할 수 있는 자들 만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장’이라는 별명이 붙어있는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되어 있는 믿음의 선진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두려움없이 믿는 자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 뉴스에 ‘몇 명이 늘었다’라는 속보에 마음이 철렁 내려 앉아서 삶이 위축되고, 비지니스가 위축되고, 개인의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고 전후좌우로 마구 흔들립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 생활 마저 위축되거나 지체하며 머뭇거리곤 합니다. 이러한 현재의 상황, 시대적인 심리상태를 믿음 안에서의 담대함으로 물리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의하고 조심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눈에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마태복음 10:28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라고 말하고 있듯이 세상 것에 속아서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여 담대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욱 예배의 자리를 간절히 사모하는 깊은 영성과 거룩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응답을 많이 경험하는 삶의 풍성한 은헤의 자리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성도의 교제의 만남 속에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와 용기가 풍성하게 나누어지는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할렐루야,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주님! 오늘 하루 주 안에서 감사가 풍성하며, 기쁨을 누리며, 은혜를 경험하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좋은 일이 있을 때만 은혜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감사와 기쁨과 은혜를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안에 두려움과 불안함이 있다면 능력의 이름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쳐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라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담대한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기드온의 삼백 용사들처럼 믿음의 기백과 순종으로 이루어낸 승리를 경험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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