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나눔

오늘의 말씀묵상 8/15/2021 주일 [사사기 6장 11-24절]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8-15 07:44
조회
385

8. 15. 주일. 오늘의 말씀묵상

찬양링크 “샬롬”: https://youtu.be/0g3oQ9_DttY

[본문: 사사기 6:11-24]
11.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12.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13.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14.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
15.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
16.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
17.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18.내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 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너 돌아올 때까지 머무르리라 하니라
19.기드온이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리매
20.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무교병을 가져다가 이 바위 위에 놓고 국을 부으라 하니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라
21.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병에 대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
22.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알고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하니
23.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4.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본문이해]
[11-16, 기드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과의 대화]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의 눈을 피해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큰 용사’라 부르며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전합니다. 기드온이 만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면 어찌 이런 압제를 당하고 있는지, 또한 출애굽 당시에 보이셨던 이적들은 지금 다 어디 있느냐며 반문하며, 결국 현재 이스라엘이 당하고 있는 고통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 때문이라고 항변합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사사의 사명을 주시며 자신은 미약하다고 말하는 기드온에게 하나님께서 반드시 동행하시며 미디안을 능히 감당하게 될 것이라고 격려하십니다.

11절, “여호와의 사자”: 본문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사자는 8절에 등장하고 있는 익명의 ‘한 선지자’로 보이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라는 호칭이 14절에는 ‘여호와’로 바뀌면서 그 호칭들이 본 문맥에서 번갈아 사용되어 집니다. 또한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의 요구에 대해 이적을 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21절에는 홀연히 사라진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나타나심”, 즉 “신현(神顯), 또는 현현(顯現)”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삼위 하나님 중에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라 볼 수 있으니 성육신하시기 이전의 성자 하나님으로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성자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사자로 등장하는 기록들은 종종 등장합니다.

11절,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 본문의 “아비에셀”이라는 말의 히브리어 “아비 하에즈리”라는 말은 ‘나의 아버지는 도움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아비에셀은 므낫세 지파의 일족입니다(수 17;2, 삿 6:15). 지명 “오브라”의 의미는 ‘새끼 사슴’이라는 뜻인데 그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지만 므낫세 지파의 땅에 속한 이스르엘 골짜기 근처의 어딘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곳은 기드온이 ‘여호와 살롬’이라는 단을 쌓고, 죽은 후에 묻어 장사지낸 곳이며, 기드온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아비멜렉이 그의 칠십 형제를 죽인 비극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11절,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기드온”이란 이름의 뜻은 ‘나무 자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므낫세 지파에 속한 아비에셀 사람으로 요아스의 아들입니다. 또한 본문의 “알리지 않다”라는 표현의 동사 히브리어 “누쓰”는 ‘도망가게 하다, (안전한 장소에) 숨기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번역성경들은 후자의 의미인 ‘숨기다’의 의미로 번역하여 밀을 미디안 사람의 눈을 피해 안전한 장소에 숨기는 의미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당시 양식이 있기만 하면 미디안 사람들에게 약탈당하는 상황에서 밀을 안전한 장소에 숨기려고 했다는 상황을 고려하면, 기드온이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한 것은 미디안 사람에게 발각되지 않고, 안전한 장소에 숨겨 두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밀은 넓고 평평한 마당에서 타작하거나 밭에서 타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포도주 틀은 보통 집 안에 두었으며 소량의 곡식밖에 타작할 수 없었음에도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한 것으로 보아 기드온이 용기와 대담성을 타고난 용사의 성향이 있기 보다는 적군을 두려워하거나, 소심한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 “큰 용사”: 11절의 표현에 의하면 기드온은 미디안 사람을 두려워하여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했던 소심한 사람인데 여호와의 사자는 그을 향하여 ‘큰 용사’라 지칭하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비웃기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사로 세우셨으므로 그리고 그와 함께 하시므로 ‘큰 용사’가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사용한 호칭이라 볼 수 있습니다.

14절,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본문의 표현은 실제로 기드온이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해 낼 능력과 힘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라 볼 수 없습니다. 15절에 기드온은 자신의 미약한 힘을 하나님께 하소연하며, 16절에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함께 하심으로 미디안을 이길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때에, 본문의 표현은 문맥상으로 ‘기드온을 통하여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힘’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5절, “나의 집…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 본문에 표현된 “집”이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원형 “엘레프”는 창 20:16, 출 18:21에서는 숫자 1,000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으나, 본문에서는 지파를 세분한 단위인 ‘씨족’을 가리키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표현인 “집”이라는 표현은 가장이 한 명인 한 가정을 의미하는 ‘집’이 아니라, 기드온이 속한 씨족으로서 아비에셀 족속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기드온은 자기 집안이 므낫세 지파 중에서도 가장 내세울 것 없는 보잘것 없는 씨족의 일원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리고 자신도 아버지 집에 속한 자들 중에서 가장 어리고 쓸모 없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17-21, 여호와께 표징과 그 응답]
기드온이 자신이 정말 사사의 직분을 감당할 은혜를 얻었다면 하나님의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의 요청대로 표징을 얻기 위해 예물을 가지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가지고 온 예물들, 즉 고기와 무교병을 바위 위에 놓고 국을 쏟으라 명한 후에 지팡이 끝으로 불을 내어 젖은 예물을 태워서 하나님의 표징을 보여 주십니다.

17절,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아마도 기드온은 지금 그에게 말씀하고 있는 자가 미디안을 칠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신지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없었던 것 같아 보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히브리어 성경의 표현에 지금까지 “여호와”, 또는 “여호와의 사자”라고 표현하고 있다가 17절 본문에서 한글성경은 “주”로 표현하고 있지만, 원문에는 일반 사람으로서의 상대방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앗타”로 바뀌어져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본문을 직역하면 “나와 말하고 있는 이가 당신이라는 표징” 입니다. 물론 “당신”이라는 표현의 “앗타” 사용이 문맥상으로 볼 때에 하나님을 지칭하겠지만, 본문에 “주”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아도나이”를 사용하지 않고, “앗타”를 사용한 것은 기드온 자신의 불확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17절, “표징”: 이 단어의 히브리어 “오트”는 ‘(구별하는) 표시(mark)’라는 의미로서 ‘주장의 확실성을 보증하는 표시’ 혹은 ‘~의 능력을 보여 주는 기적적인 표시’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단어입니다. 기드온은 자기와 함께하는 분이 기적을 행하여 애굽에서 조상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이며,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18절, “예물”: 이 단어의 히브리어 “미느하”라는 말은 세속적 의미로 사용될 때는 ‘공물’이라는 뜻이 되며, 왕이나 윗사람에게 바칠 때는 ‘예물’이라는 뜻이 있고,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는 여호와께 곡물을 드리는 ‘소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창 4:4에는 아벨이 양의 첫 새끼를 하나님께 드렸을때의 ‘제물’이라는 단어로 쓰였으나, 이 구절을 제외하고는 동물 제사를 가리키는 말로 성경에서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염소 새끼가 예물에 포함되어 있고, 무교병이 등장한다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으로 보기 보다는 기드온이 표적을 바라고 대접하는 음식이나 선물의 성격이 강한 예물의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19절,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병을 만들고”: 밀을 곱게 갈아서 만든 밀가루 한 에바의 양은 약 22.7리터에 해당되며, 이는 약 12되로서 9.6kb에 달합니다. 그런데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의 빵을 만들기 위해 22.7리터의 밀가루를 사용하고, 염소 새끼 한 마리를 잡았다는 것은 한 사람이 먹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양입니다. 따라서 기드온이 준비한 음식은 여호와의 사자를 배불리 채우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표적을 보기 위한 예물로 가지고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21절, “불이 바위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병을 살랐고”: 본문의 “나오다”의 히브리어 “왓타알”은 연기, 식물, 사람등이 땅이나 낮은 곳에서 높으로 올라가는 모양을 시각적으로 묘사하는 동사입니다. 즉 ‘(연기가) 나다, (식물)이 나오다’등의 뉘앙스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사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왓토칼”의 ‘(불이 나서) 살랐다, 태우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음식을 먹다’라는 뜻입니다. ‘불로 사르다’의 표현을 나타내는 동사 “사라프”를 쓰지 않고 “왓토칼”을 쓴 점은 바위에서 올라온 불이 그 위에 있는 예물을 사람이 음식을 전부 먹어버리듯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태워버렸음을 강조하는 의미라 볼 수 있습니다.

21절,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 한글성경의 뉘앙스는 여호와의 사자가 떠났기 때문에 보이지 아니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 원문의 직역은 ‘여호와의 사자는 그의 눈 앞에서 사라졌다’라는 뉘앙스로서 기드온이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눈 앞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사라짐으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로 사람이 할 수 없는 이적과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22-24,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은 기드온]
기드온이 자신과 말씀하신 이와 여호와의 사자인 줄 깨닫고 두려워하자 여호와께서 그를 안심시키십니다. 기드온이 그 곳에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살롬’이라 칭하니 그 단이 사사기를 기록하던 당시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었습니다.

22절, “슬프도소이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 표현은 “아하흐”로서 동사가 아니라, 그냥 큰 슬픔을 나타내는 ‘감탄사’ 입니다. 출 33:20에 의하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라고 기록하며 하나님을 본 자는 죽게 될 것이란느 표현이 있습니다. 조상들로부터 신앙 교육을 받았던 기드온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본 것을 깨닫고 자신의 운명에 대해 두려워한 것입니다. 기드온이 자신이 요청한 표징을 확인한 후에 기쁘기보다는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슬퍼하며 “아하흐”라는 슬픔의 감탄사로 표현한 것입니다.

23절, “너는 안심하라”: 한글 성경은 본문을 명령형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히브리어 원문은 “살롬 레카”라는 문구로서 “너에게 평강!”이라는 구호와 같은 감탄문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려워하는 기드온에게 ‘살롬’하고 선언하시면 안심시켜 주신 것입니다. 24절에서 기드온이 단을 쌓고 그가 쌓은 단의 이름을 “여호와 살롬’이라고 지칭한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와 하신 말씀이 ‘살롬’, 곧 ‘평강’이었기 때문입니다.

[묵상 및 적용]
성경에서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가장 많이 설교되어진 사사가 있다면 ‘삼손’과 ‘기드온’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두명의 사사는 정말 대조적인 사사입니다. 삼손은 강한 자요, 힘이 있는 자요, 대적자들을 두려워 하지 않는 용사로서의 이미지가 굳혀 있는 사사인 반면, 기드온은 오늘 본문에 표현되고 있는 것처럼 약한 자요, 소심한 자요, 뒤로 물러서는 자의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미디안의 손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기드온을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적으로 강한 자, 혹은 능한 자를 사용하시기 보다는 바울이 고전 1:27-28절에 고백하고 있듯이 세상의 미련한 자들, 약한 자들, 천한 자들, 멸시받는 자들을 택하여 오히려 지혜 있는 자들과 강한 자들과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이기게 하심을 성경의 예들을 통해서 종종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에 그가 애굽의 왕자로서 강력한 힘과 지혜와 용맹성을 지니고 있을 때에 부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생의 황혼기이 짙어갈 무렵인 80의 나이에 묵묵히 양이나 돌보는 보잘 것 없는 목동에 불과하였을 때에 부르셔서 애굽의 손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꾼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신정 왕국의 최고의 군왕인 다윗을 부르실 때에 소년 다윗은 아버지와 형들 조차도 알아 주지 않는 하찮은 목동에 불과했을 때 였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약한 자와 힘이 없는 자를 부르실까요? 그 이유는 약하고 힘이 없기 때문에 더욱 더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 아닌가 생가됩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강하고 능한 자들보다는 약하고 무능한 자들을 들어서 크게 쓰시고 그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스스로 강한 자와 능한 자가 되려 할 때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를 약한 자와 무능한 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할 때에 오늘 본문 14절에 “내가 너를 보냈다”라고 말씀하시고, 또 16절에 “내가 반드시 너화 함께 하리라”라고 말씀하시며 용기와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사명을 주실 때에 능력도 함께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다짐과 용기, 위로와 격려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은 여전히 불안해 하며 여호와의 ‘하나님 되심’을 확신하지 못하는 모습이 오늘 본문 17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표징을 보여 주심으로 기드온은 ‘정말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확인하는 그 증거를 ‘여호와 살롬’이라는 제단을 쌓으므로 확증하게 됩니다.

우리가 약할 때에, 힘이 없을 때에,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 잡혀 있을 때에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 그리고 함께 하심을 보증하는 말이 본문에 등장하는 23절의 “안심하라”라는 표현입니다. 이 말을 히브리 성경에 표현된 한 단어로 표현하면 “살롬!” 입니다.

유대 문화에서 ‘살롬’은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인사말 ‘안녕하세요?’처럼 자주 쓰이는 일상적인 인사말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살롬’이라는 위로하며 하신 이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 평강’을 기원하면서 하는 ‘살롬’의 인사와는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기원은 단순히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라는 소원이나 희망을 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찾아 오셔서 선언하셨던 ‘살롬’, 즉 “하나님의 살롬”은 평강의 근원되시는 분이 직접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평강의 근원’ 이십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평강, 살롬’을 기원한다고 반드시 상대방의 삶이나 마음에 ‘평강’이 실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말은 그냥 ‘인사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안심하라”라고 말씀하시며 ‘살롬’을 선포하시면 반드시 ‘평강’이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에 사람이 말하는 ‘평강’과는 근원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 선포하시면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민수기 23:19의 개역한글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개역개정,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하나님께서 ‘살롬’을 선언하시면 그대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선언하시는 ‘살롬’이 사람의 인사말과 다른 이유를 “살롬”이라는 단어를 구약성경이 언제 사용했는가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들을 곰곰히 묵상하면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는 일치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이사야 9:6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평강의 왕”이 바로 “살롬의 왕”으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또한 학개서 2:9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살롬”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학개서에 등장하는 ‘평강’은 구속사적으로는 성전의 진정한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날 영광과 평강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드온에게 “살롬!”, 곧 “안심하라”라고 말씀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선언은 단순히 두려움과 염려, 근심과 걱정을 몰아내는 단순한 ‘평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근원적이고 구속사적으로는 ‘메시야의 구원을 통하여 완성되고 이루어지는 진정한 평강’으로 연결되어 확장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기드온이 제단을 쌓으며 불렀던 “여호와 살롬”의 능력과 역사가 여러분의 삶 속에 실현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 삶 속에, 또는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염려와 근심, 고통과 어려움, 두려움과 불안을 몰아내는 것에 국한되는 ‘샬롬’이 아니라, 그것들을 모두 몰아내고 동시에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살롬의 평강’을 누리는 경이로운 역사가 풍성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기도]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위로와 함께 하심을 찬양합니다.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며,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있는 자를 건지시며, 두려움과 불안 가운데 있는 자에게 살롬의 위로로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은 세상과는 다른 평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물질과 명예와 이생의 자랑들로 누리는 평강을 아니라,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참 평안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오늘 거룩한 주의 날에 세상이 주는 것들로 부터 우리를 구분하여 거룩하게 하시며, 주의 성전에서 참 평강과 위로를 통하여 사명을 갖고 힘차게 일어나는 주의 아들과 딸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평강을 선언하신 살롬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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