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나눔

오늘의 말씀묵상 06/01/2021 화요일 [시편 1편 1-6절]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6-01 09:21
조회
1008

6. 1. 화요일. 오늘의 말씀묵상

[본문: 시편 1:1-6]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본문이해]
시편 1편은 시편 150편 전체의 서시로서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바른 삶의 자세에 대한 가장 원론적인 교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시편 전체의 핵심적인 내용을 여섯 절이라는 짧은 구절의 싯구에서 압축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신구약 66권이 담고 있는 가장 중요한 주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그 분의 뜻인 율법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율법의 가르침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삶의 길은 복에 이르는 지름길인 반면에, 하나님의 율법을 멀리하고 도리어 죄악을 도모하며 사는 삶의 길을 택하는 것은 스스로를 파멸에 내던지는 패망의 길임을 자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편에서는 복의 길과 멸망의 길을 가늠하는 분기점이 바로 ‘율법’에 대한 태도에 있다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대한 태도는 곧 ‘하나님에 대한 태도’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2, 악인과 대조되는 의인의 특징)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안지 않고 적극적으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 있는 사람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1절의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은 소극적인 면에서 복 있는 사람이 취해야 할 모습이라면, 2절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것은 적극적인 면에서 복 있는 사람이 지향해야 할 모습입니다. 시편 1편에서 첫 단어인 “복 있는”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첫 단어인 ‘알렙’으로 시작하고, 6절의 마지막 단어인 “망하리로다”는 히브리어의 마지막 단어인 “타브”로 끝나는 문학적 구조로서 마치 인생의 시작과 끝을 보여 주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기도 합니다.

1절, “복 있는”: 히브리어 “아쉬레”의 원래의 뜻은 “곧다, 똑바로 가다”이며, 이 원래의 뜻에서 파생되어 “번영하다, 성공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삶의 길을 똑바로 걸어가는 것 자체가 복이며, 또한 이런 삶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번영과 성공이 곧 복이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1절, “오만한”: 히브리어 “레침”은 본래 입을 삐쭉거리며 ‘조롱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오만한 자’들은 여호와의 진리와 공의를 조롱하는 자들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사는 자들을 비웃는 자들입니다. 또한 앞에 나오는 ‘악인’이나 ‘죄인’보다 더 적극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로 하나님을 직접 조롱의 대상으로 삼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삶의 태도를 버리도록 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2절, “율법”: 율법이란 말의 히브리어 “토라”는 본래 화살을 쏘거나 어떤 물건 따위를 던져 특정한 지시물을 가리키는 것을 의미하는 “야라”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그래서 방향을 모르는 자들에게 바른 방향을 지시해 주거나 그릇 행하는 자들에게 올바른 규범을 교훈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여호와의 율법은 모호하지 않고, 참과 거짓의 경계가 불분명하지 않으며, 항상 분명하게 옳고 그름을 가름해 주는 척도,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2절, “묵상하다”: 이 말의 구약적 의미는 무언가를 계속적으로 중얼거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여호와의 율법을 중단없이 입으로 되새기며 읊조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하게 입으로 말씀을 외우며 마음으로 그 의미를 되새기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감정적 즐거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생활 가운데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3-4, 의인과 악인의 대조되는 실상)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고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하여 형통하지만,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허무하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절, “시냇가에 심은 나무”: 시인은 의인의 번영을 시냇가에 심겨짐으로 인하여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 나무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땅은 건기와 우기가 뚜렷이 구분되는 지역입니다. 그리고 연평균 강수량에 해당하는 비가 모두 우기에 집중적으로 내립니다. 따라서 우기에는 물이 흐르나 건기에는 물이 말라버리는 간헐천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키가 작은 나무가 많지만, 본문에 표현된 '시냇가'라는 말의 히브리어 “팔르게 마임”은 팔레스타인에서 흔히 보는 간헐천이 아니라, 물이 풍성히 저장되어 있어서 항상 물이 흐를 수 있는 시내를 가리키거나, 또는 인공적인 관개수로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물이 메마르는 법이 없는 이런 시냇가에 심기워진 나무는 크게 자라고 사시사철 푸르며 많은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절, “형통하리로다”: 이 단어 히브리어 “야츨리아흐”의 원형 “찰라흐”는 거칠 것이 없이 앞으로 돌진하는 모양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앞길이 평탄하고 형통하며 번성하는 것에 관계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동사의 시제가 미완료형으로 표현되어 있어 시인은 의인이 하는 모든 일이 멈춤이 없이 계속하여 형통할 것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4절, “겨”: 히브리어 “모츠”로 표현된 겨는 바람에 힘없이 이리저리 날리는 쭉정이로서, 껍질만 있고 알맹이가 들어 있지 않으므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전혀 무가치한 것입니다. 또한 쭉정이는 알곡만 거두어 들여야 하는 농부들에게 도리어 수고만 가중시키기도 합니다. 세례 요한이 눅 3:17에 쭉정이는 심판의 날에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 태움을 당한다고 말했듯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쭉정이의 마지막은 불의 심판입니다.

4절, “바람”: 바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는 성경에서 “숨, 호흡, 바람, 마음, 신, 성령” 등등으로 매우 다양한 의미와 용례를 지니고 있는 단어입니다. 본문에서는 일차적으로 공기의 움직임을 통해 일어나는 자연 현상이 바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하면 ‘바람은 쭉정이, 겨의 정체를 밝히 드러내는 매개체’가 되기도 합니다. 즉 농부가 추수 때에 바람에 까불리는 키질을 통해서 알곡과 쭉정이 겨를 분리해 내듯이 하나님의 심판의 바람이 불어닥칠 때 악인은 그 정체가 드러나 의인들로부터 분리되고 결국 멸망당하게 될 것임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5-6, 의인과 악인의 대조되는 운명)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망하게 될 것이나,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신다고 말씀하시며 악인과 의인의 마지막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5절, “의인”: 이 단어의 히브리어 “찻디킴”은 죄가 전혀 없다는 의미에서의 의인이 아니라, 악을 피하고 적극적으로 율법을 준행하는 삶을 따름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인정된 자를 가리킵니다. 모든 인간은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행위로써 의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믿음과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의지를 아름답게 보시고 의인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6절,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시편 1편의 결론으로서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를 분명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인정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야다”가 기본형으로 ‘알다(know)’를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피상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에서의 앎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역으로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의 패역하고 죄악된 삶의 양식을 용납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들과는 어떤 관계도 맺지 않으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됩니다.

[묵상 및 적용]
150편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시편은 1장에서 “복 있는 사람”에 대하여 말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서 복을 마다할 사람은 없습니다. 유교 문화 속에서 복을 말할 때에 주로 ‘서경’의 홍범편에 나오는 오복을 말하곤 하는데 이는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收好德), 고종명(考終命)을 말합니다. 수는 장수를 가리키고, 부는 부유하고 풍족한 것을 가리키고, 강녕은 건강을 가리키며, 유호덕은 이웃이나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며 선을 권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이며, 고종명은 객지가 아닌 자기 집에서 편안히 일생을 마치는 깨끗한 죽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과거 우리 나라에서는 한자의 ‘복(福))’이라는 글자를 밥그릇, 숟가락, 옷장, 벽지, 방석, 베개, 이불, 옷 등등 눈에 띄는 모든 것에 새겨 놓음으로써 복받기를 간절히 희망하는 마음을 표현하곤 했습니다.

물론 성경도 육의 복을 무가치한 것으로 말하거나 무시하거나 부인하지 않습니다. 성경도 세속적 의미의 복을 인정하고 이런 복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는 것에 대해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도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라는 말을 흔히 하거나, 듣곤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세상의 복은 육의 소멸과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는 제한된 복입니다. 진정한 복은 사라지지 않는 복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속적인 복의 개념 속에서 진정한 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성경적 복의 개념은 이러한 세속적 의미의 복의 개념을 초월합니다. 한 예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1-12절에서 산상 수훈에서 말씀하고 있는 ‘팔복’은 성경적 복의 개념과 세속적 복의 개념이 얼마나 다른 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말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팔복’에 등장하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에 표현된 복의 개념들은 세속적인 복의 개념으로 생각해 보면 도저히 복이라 말할 수 없으며, 도리어 불행이라고 말해야 하는 개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에 대해서 복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육에 국한되지 않고, 영생 복락의 천국과 영원한 하나님과 하늘의 위로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하늘의 복은 세속적인 의미의 복과 같이 소멸하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며 무한한 복입니다. 때때로 성경은 이러한 영원하고 무한한 하늘의 복을 위해서, 또는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하여 세속적 의미의 복을 포기하라고 요구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복의 개념을 염두에 두고 생각한다면 시편 1편의 복은 세속적인 복을 추구하는 내용이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특별히 시편 1편에서는 복 있는 자의 길과 멸망하는 자의 길을 가늠하는 분기점으로 ‘율법에 대한 태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하신 그 분의 뜻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에 대한 태도는 곧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즉 시편 1편에서는 말씀(율법)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는가에 근거하여 은연중에 비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1편의 저자는 의인과 번영과 악인의 멸망을 선명하게 대조함으로써 이 시를 읽는 독자나 낭독되는 시를 듣는 청중들이 자신의 삶의 방향을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복 있는 자의 삶으로 독자나 청중들을 이끌면서, 동시에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개인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결정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조명함으로써 분명한 선택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은 우리 인생이 걸어가야 하는 ‘길’을 명백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길은 외견상으로는 여러가지 선택이 존재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걸어가야 할 길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오직 한 길, 곧 의인의 길이요, 이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삶이 복 있는 자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이 길을 자기 자신이라고 말씀하시며 요한복음 14:6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며 그 유명한 스스로의 정의를 남기셨습니다.

그러나, ‘복 있는 사람’을 우리 삶에 적용하여 의인으로서 사는 길은 말로 표현하는 것처럼 생활 속에서 지키기는 쉽지 않은 길입니다. 의인의 길은 마치 갈멜산에서 이방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에 대항해서 홀로 싸웠던 엘리야의 처지와 같습니다. 비록 혈혈단신(孑孑單身)이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선지자들과 홀로 싸워 나가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자가 의인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도 “함께”하면 없던 힘과 용기도 생기지만,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홀로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인은 더더욱 메마른 땅에서 시냇가로 옮기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혼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다른 의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에게 위로의 음성을 들려주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 분은 이세벨의 위협 속에서 두려워하는 엘리야 선지자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선지자 7,000명을 남겨 두신 분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 시편 1편에서는 악인들을 심판하시는 분(시편 1:5)이시며, 의인의 길을 인정하시는 분(시편 1:6) 이십니다.

여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태도를 지니고 그 뜻대로 살아가려는 주의 백성들의 희망과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의인의 길이 평탄한 것만은 아닙니다. 비록 시련도 있고 어려움도 있고, 때로는 울부짖으면 하나님께 탄원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해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유이며(하박국 2:4), 좁지만 명백한 의인의 길, 곧 복 있는 사람의 길을 택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2021년 6월 1일! 이 날은 우리 인생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단 하루입니다. 6월 2일은 내일 오고 우리 생각에 나도 그 6월 2일을 맞이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지나가고 있는 2021년 6월 1일은 다시 되돌릴 수 없습니다. 내게 주어진 하루 하루를 여호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 분만을 의지하여, 그 분이 주시는 위로와 평강, 용기와 능력을 경험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기도]
나의 구원의 근본이 되시는 예수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가 무위로 돌아가지 않고 내 삶을 진동하여 주께로 돌아가는 능력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저의 모습을 돌이켜 보니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듯이 악인의 꾀를 따르며,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았던 죄인입니다. 죄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고 죄인의 방식대로 살았습니다. 또한 생각이 생각으로만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도 드러난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주님, 이 죄인을 주의 인자하심과 보혈의 은혜로 씻어 주시고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의 삶을 시냇가로 옮겨 주셔서 시냇가에 심기어진 나무가 되게 하옵소서. 저 혼자는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이는 오직 주님 밖에 없음을 고백하오니 주께서 원하시는 열매가 사명을 준행하는 가운데 풍성하게 하옵소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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