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나눔

오늘의 말씀묵상 4/30/2021 금요일 [출애굽기 11:1-10]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4-30 09:39
조회
889
[본문: 출애굽기 11:1-10]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내보내리라 그가 너희를 내보낼 때에는 여기서 반드시 다 쫓아내리니
2. 백성에게 말하여 사람들에게 각기 이웃들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 하시더니
3.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
4.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5.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은 왕위에 앉아 있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와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죽으리니
6. 애굽 온 땅에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이 있으리라
7.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8. 왕의 이 모든 신하가 내게 내려와 내게 절하며 이르기를 너와 너를 따르는 온 백성은 나가라 한 후에야 내가 나가리라 하고 심히 노하여 바로에게서 나오니라
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기적을 더하리라 하셨고
10. 모세와 아론이 이 모든 기적을 바로 앞에서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나라에서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본문이해]
(1-3, 여호와께서 출애굽 준비를 명하시고 애굽 사람들의 반응)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한 가지 재앙이 있은 후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낼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그러니 백성들에게 전하여 애굽인에게서 은금 패물을 구하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사람들의 은혜를 받게 하시고, 모세는 바로의 신하와 애굽인들의 눈에 위대한 인물로 보이도록 하셨습니다.

출 11~12:36까지 애굽의 10대 재앙 중 열번째 재앙인 장자의 재앙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출애굽이 최종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고, 유월절과 무교절의 규례 등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1절, “반드시 다 쫓아내리니”: 이 문장의 표현은 사람들 사이의 실제적이고 완전한 ‘분리’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절대부정을 나타내는 ‘반드시’가 같이 사용되므로 “꼭 그렇게 하겠다”라는 강한 의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바로가 열번째 재앙을 당한 후에는 스스로 이스라엘을 내보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될 것임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절, “구하게 하라”: 이 단어의 히브리어 “웨이쉬알루”는 물질에 대한 청구(출 3:22, ‘구하여’), 어떤 정보에 대한 질문(창 32:17, ‘묻기를’), 탄원자의 간구(잠 20:4, ‘구걸할지라도’)까지도 나타내는 매우 포괄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데 KJV 영어성경은 ‘빌리다(Borrow)’로 번역했지만, 대부분의 영어성경들은(NIV, RSV, LB) ‘요구하다(Ask)’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맥에 맞는 가장 바람직한 뉘앙스는 ‘구하다’라는 의미보다는 삿 8:24처럼 ‘요청하다, 청구하다(Request)’의 번역이 적절한듯 싶습니다. 그 근거는 사사기에서 기드온이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그 대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탈취한 금 귀고리를 요청하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인들에게 은금을 구하는 것은 KJV의 번역의 ‘빌리다’라는 표현이나, 불법적인 탈취나 비열한 구걸이 아니라, 지금까지 애굽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승리함으로 당연한 요청이며, 노동한 임금에 대한 정당한 청구이기 때문입니다.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청하여 구한 은금 패물은 성막을 짓는 재료로 사용됩니다.

3절,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이 문장의 히브리 성경에는 “눈 안에”라는 말이 담겨 있으므로 직역하면 수동태가 아니라 능동태로 “여호와께서 그 백성에게 애굽 사람들의 눈 안에 은혜를 주셨다”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라는 명령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 명령이 이루어 지도록 여건도 함께 조성하신 것입니다. 즉 애굽인들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시각을 바꾸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스라엘을 향한 태도와 시각이 바뀌자 떠나는 것조차 반대했던 그들이 은금 패물의 요청에 응하여 물질까지 주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가깝게는 출 3:21의 약속의 성취이며, 멀게는 창 15:14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예언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3절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 이 문장의 번역에 대해 한글성경이나 NIV, LB 영어성경은 수동태 형식으로 모세가 위대한 사람으로 여겨졌다고 번역하여 애굽 사람들의 평가에 중점을 두고 “was highly regarded”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KJV, RSV 영어성경은 히브리 성경을 직역하여 능동태로 모세가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적인 면을 강조하여 “was very great”라고 표현합니다. 즉 히브리 성경의 의미는 모세가 위대하지 않은데 위대한 사람처럼 보여졌다는 의미 보다는 실제로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라는 표현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출 7:1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같이 되게” 하신다라는 말씀의 성취라고 볼 수 있습니다.

(4-10, 마지막 열번째 재앙 장자의 죽음의 예고)
모세가 바로에게 최후의 장자의 죽음의 재앙을 예고합니다. 밤중에 애굽 가운데 들어가셔서 바로의 장자로부터 몸종의 장자와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다 죽게 될 것이며, 장자의 사망으로 애굽 전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게 될 것이라는 여호와의 경고를 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은 구별하여 재앙을 면하게 해 주실 것이며, 결국 바로의 신하들의 간청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나가게 될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모세가 심히 노하여 바로에게 경고하고 나온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바로가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 말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바로가 최후의 경고를 듣고도 강팍하여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4절,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지금까지의 아홉 가지 재앙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통하여 행하셨다면, 마지막 재앙은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오신다는 표현입니다. 본절의 “들어가다”라는 말의 히브리어 “요체”의 의미는 원래 ‘들어가다’의 의미가 아니라 ‘나가다’의 의미입니다.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나가다(go out)’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출애굽기에서 단순히 ‘나가다’라는 뜻으로만 사용되지 않고 주로 ‘인도해 내신다’라는 의미로 출 3:10, 6:13, 26, 13:3, 9, 14, 14:11, 20:2에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직접 애굽 땅에 들어오셔서 그 대적을 징벌하시고 그 백성을 ‘나가게’ 하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들어오셔서 죄를 멸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하셔서 구원으로 나가게 한다’라는 구원사역과 같은 맥락입니다.

5절, “맷돌 뒤에 있는 몸종”: 이 문장의 히브리어 직역은 “두 맷돌 뒤에 있는 여종” 입니다. 맷돌을 복수로 표현하고 있으므로 하나가 아니라, 두개임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애굽의 맷돌은 고정된 하나의 맷돌 위에 돌아가는 맷돌을 올려 놓고 돌려서 마찰을 이용하여 곡식을 빻는 구조로 우리나라의 맷돌의 원리와 같습니다. 맷돌을 돌리는 사람은 주로 천민이나 노예였습니다.

5절,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죽으리니”: 한글성경은 가축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히브리어 성경의 “뻬헤마”라는 단어는 “짐승, 가축”을 모두 가리키는 뜻이므로 가축인지, 넓게 모든 짐승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 뿐만 아니라, 짐승까지 심판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재앙이 얼마나 무섭고 피할 수 없는 심판인지를 보여 줍니다.

7절, “개도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한글성경이나 KJV, LB 영어성경의 번역은 히브리 성경을 그대로 직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직역하면 의미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NIV는 의역하여 ‘짖다(bark)’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개 한 마리도 짖지 않는다’라는 표현입니다. 천재지변이 있으면 동물들의 청각, 후각, 촉각들이 민감하게 반응하여 이상 징후를 먼저 감지하고 위험을 알리곤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땅은 개들 중에 어느 한 마리라도 애굽에 임하는 심판의 징후를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하게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8절, “내려와”: 이 단어의 히브리어는 “야레두”인데 그 뜻은 매우 다양합니다. 일차적인 의미는 “흘러내려가다, 상륙하다, 높은 곳에서 내려오다”란 뜻이 있으며, 두번째 의미로는 “죽다, 망하다, 무너지다, 파괴되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가 사용되는 배경은 교만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패하고, 무너지고, 망하게 된 바로의 신하들이 자신들의 상태를 깨닫고 하나님께 내려와야 함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9절, “나의 기적을 더하리라”: 애굽에 대한 열번째 재앙은 지금까지 내려진 아홉 번의 재앙에 한 가지를 ‘더한다’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이제 행해질 열번째 재앙은 이제까지 주어진 어떤 재앙보다도 더욱 크고 심하여 엄청난 피해를 가져오므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더욱 크게 드러낸다는 표현입니다.

[묵상 및 적용]
출애굽기에 기록된 재앙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혹 “하나님께서 왜 그리 잔인하실까?”라는 생각이 드시나요? 아니면 “수많은 가축들이 죽고 사람들이 고통과 피해를 당해 어려움을 겪도록 하시는데 하나님의 사랑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심지어 마지막 10번째 재앙에는 죄도 없는 장자를 죽이시는데 어찌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하지 않으십니까?

정말 그럴까요? 혹시 그런 의문이 생긴다면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는 어디까지여야 하겠습니까?”라는 질문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든 자기 백성이 아니든 죄인들에 대해서 오래 참으시는 인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인내한다’라는 것은 결국 한계가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인내라는 단어는 영원을 염두에 두고 있는 말이 아니라, 끝날 때가 있고 상황이 바뀌는 때가 있음을 염두에 두고 참는 것입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에는 분명히 그 한계가 있습니다. 즉 인내가 멈추는 때에 죄에 대한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애굽에 임한 재앙들을 바라보는 관점을 약간 다르게 보면 어떨까요? 물론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고 거절하는 바로와 애굽 땅에 임한 이적으로서의 재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단 한번에 바로의 강팍함을 꺽을 수 있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경고하시고 재앙을 시행하시는 과정을 일일히 밟고 계십니다. 왜 단번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내도록 강력한 이적의 재앙을 행하지 않으셨을까요?

이런 질문을 생각해 보니, 바로와 애굽 땅에 임했던 재앙들을 ‘심판이라고 보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바로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한 일종의 경고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첫번째 애굽의 강물이 피로 변하는 재앙이 실현된 이후로 마지막 재앙이 임하는 시기까지 약 5달 정도가 지났습니다. 결코 어떤 한 가지 요구 사항을 제안하고 이루는 과정 속에서 결코 짧다고 볼 수 없는 기간입니다. 한달, 두달, 세달, 네달, 그리고 다섯달에 이르면서 하나님은 바로의 회개를 기다리지 않으셨을까요? 회개의 기회를 바로에게 주고자 하였음을 고려해 본다면 각각의 징벌과 재앙에는 ‘회개를 촉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이 내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죄인에 대해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은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이 한이 없이 크고 깊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베드로후서 3:9)

이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다 회개하고 구원얻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심지어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하고 괴롭게 했던 바로라 할지라도 그에게 경고하시고 기다리시며, 또 다시 경고하시고 기다리시기를 반복하시면서 그가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내가 끝이 나면 상황은 두려울 정도로 급변하게 됩니다. 바로가 끝까지 깨닫지 못하고 회개에 이르지 못하자 결국 최종적인 심판의 선언을 듣는 자리에 그가 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바로가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재앙을 경험했던 것을 분명히 뼈에 새기고 심장에 새겨 두었더라면, 모세로부터 ‘장자의 죽음의 재앙’에 대한 경고를 받는 즉시 그는 회개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겠다고 약속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고, 결국 하나님의 인내는 끝나고 이제는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오래 참으시는 자비로운 분이시지만, 동시에 심판을 결정하시고 행하시는 면에 있어서는 주저함이 전혀없이 매우 단호하시며, 시행함에 있어서 공의로우신 분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무한정한 것이 아니며, 죄인에 대해 오래 참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끝내 죄인이 회개하지 아니할 때에 심판의 채찍을 무섭게 드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노아 홍수의 기록에서 홍수를 예고하신 후 120년 동안이나 인내하시며 죄인들이 회개하시기를 기다리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회개하지 않자 단호하게 대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노아의 홍수 때의 세상 사람들에게, 출애굽 때의 바로와 애굽의 사람들에게 회개의 기회도 없이, 경고도 없이 무작정 심판이 임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실 기회를 주셨는데 이를 무시하거나, 외면하거나, 업신여긴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현대인의 성경 로마서 2장 4-5절에 표현하기를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서 사람이 회개하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오히려 그분의 넘치는 자비와 너그러움과 참으심을 업신여긴단 말입니까? 이런 사람은 고집이 세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 날에 받을 형벌을 스스로 쌓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5장에 이미 심판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크고 작은 재앙들을 통해서 지금까지 우리들에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경고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은 단순한 심판의 경고가 아니라, 그 속에 ‘돌아오라’라는 하나님의 자비와 너그러우심과 참으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경고를 도전이나 채찍으로만 받아들이면 결국 심판에 이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경고와 회개의 기회와 심판을 동일하게 적용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죄를 깨닫고 회개할 것을 우리에게 촉구하고 계십니다. 또한 동시에 죄에 대해서 여전히 오래 참고 계십니다. 하지만 때가 되어 하나님의 인내가 끝나면 긍휼과 자비의 상황은 공의와 심판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심판이 홀연히 세상에 임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죄를 내놓고 회개했던 적이 없으신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경고에 담긴 아버지 하나님의 속 깊은 뜻을 깨닫게 되시기를 원합니다. 채찍질 가운데, 고난과 환란 가운데 담긴 아버지의 사랑의 매에 담긴 사랑의 아픔과 깊이를 깨닫게 되시기를 원합니다.

간절히 원하기는 심판의 대상들 중에 여러분은 제외될 수 있을지라도 혹시 여러분의 자녀들이나 친구, 친척, 이웃이 해당되지 않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아직도 기회는 있습니다. 주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이 풍성하신 손을 잡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가운데 찬양으로 고백합니다. 주님은 나의 전부이십니다.

[기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 죄인된 우리를 왜 그토록 사랑하셨습니까? 나의 이익만 구하고, 나의 평안함만 찾고, 나의 것만 소중히 여기는 이 죄인의 적나라한 모습을 주께서 아시는데 어찌 나를 이토록 사랑하셨습니까? 주님! 내 자신을 오직 주님께만 내려 놓기를 원하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받아 주옵소서. 내 안에 이미 들어와 계신 예수님, 나보다 앞서 나를 찾아 주시고, 내 뻗은 두 손 위로 자비하심을 내어 주시고, 언제나 먼저 나를 위로하신 주님! 수 많은 사람 중에 나를 택해 잡으시고 눈물 거두어 빛살가루 채우신 주님! 주님만이 나의 찬양이십니다. 나의 전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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