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나눔

오늘의 말씀묵상 4/27/2021 화요일 [출애굽기 10:1-11]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4-27 09:54
조회
894
[본문: 출애굽기 10:1-11]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의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하게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2.네게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3.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되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하지 아니하겠느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라
4.네가 만일 내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면 내일 내가 메뚜기를 네 경내에 들어가게 하리니
5.메뚜기가 지면을 덮어서 사람이 땅을 볼 수 없을 것이라 메뚜기가 네게 남은 그것 곧 우박을 면하고 남은 것을 먹으며 너희를 위하여 들에서 자라나는 모든 나무를 먹을 것이며
6.또 네 집들과 네 모든 신하의 집들과 모든 애굽 사람의 집들에 가득하리니 이는 네 아버지와 네 조상이 이 땅에 있었던 그 날로부터 오늘까지 보지 못하였던 것이리라 하셨다 하고 돌이켜 바로에게서 나오니
7.바로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되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 하고
8.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로 다시 데려오니 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갈 자는 누구 누구냐
9.모세가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 노소와 양과 소를 데리고 가겠나이다
10.바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와 너희의 어린 아이들을 보내면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함과 같으니라 보라 그것이 너희에게는 나쁜 것이니라
11.그렇게 하지 말고 너희 장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가 구하는 바니라 이에 그들이 바로 앞에서 쫓겨나니라

[본문이해]
(1-2절, 여호와께서 바로를 완강하게 하신 이유를 말씀해 주심)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바로를 찾라고 말씀하시며, 바로가 완강하게 된 이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행한 표징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후손들에게 전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알려 주시고, 그 결과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여호와이신 줄 알게 될 것이라 말씀해 주십니다.

1절, “완강하게 함은”: 이 단어의 히브리어는 “카바드”로서 “무겁다, 무디게하다, 둔하게하다”라는 뜻입니다. 결국 바로가 자신의 영광과 명예, 그리고 자신의 권좌를 계속 유지하려는 욕심 때문에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통찰력으로 판단하는데 둔해지고, 재앙의 심각성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짐을 의미합니다. 첫번째 피의 재앙으로부터 일곱번째 우박의 재앙에 이르기까지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만하여 회개할 줄 모르고 거듭 악행하는 길로 치닫는 바로와 그 신하들을 권면하시지 않고 오히려 생명과 구원의 길에서 떠난 상태로 그대로 내버려 두심으로써 영원히 회복할 수 없는 멸망의 길로 빠지도록 하신 그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일 것입니다.

2절, “내가 애굽에서 행한”: 한글 개역성경은 히브리 성경을 완곡하게 번역하여 “행한”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 단어의 “히트할랄르티”라는 단어는 “조롱하다, 욕보이다, 모욕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모두 13회만 사용되었는데 한글성경은 모두 “행하다”라고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 성경의 의미를 유념에 두고 생각하면 애굽을 철저히 조롱하고 욕보이는 하나님의 행위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리신 재앙들은 바로와 애굽인들, 그리고 그들이 믿는 우상들에 대한 하나님의 수치와 모욕을 담은 징계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영어성경 중에 NASB는 원문의 의미를 그대로 표현하여 “I made a mochery of Egyptians”(내가 애굽인들을 조롱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6절,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찾아가 메꾸기 재앙을 경고함)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찾아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낼 것을 요구하면서 이 제안을 거절하면 애굽에 메뚜기 재장이 임할 것을 경고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메뚜기 재앙은 우박의 재앙을 면하고 남아 있는 것들을 먹으며 애굽 전역을 초토화시킬 것이라고 전한 후에 돌이켜 나옵니다.

3절, “겸비하지”: 이 단어의 영어 표현은 “humble”로 한글로는 “겸손”을 의미하지만, 히브리어 “레아노트”는 “괴롭게 하다, 학대하다”라는 히브리어 “아나”라는 말에 ‘자기 스스로’를 나타내는 재귀용법이 추가되어 “스스로 괴곱게 하다, 자기 스스로 학대하다”라는 뜻이 됩니다. 성경에서는 “자기 고난”의 의미로 말씀에 순종하는 자기 고난(119:107), 금식으로 인한 자기 고난(시 35;13), 메시야가 자기 백성의 죄를 인하여 당하는 자기 고난(사 53:7)을 타나내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겸비하다”라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는 과정의 자기 부정이 필수적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면서 바로에게 요구한 것은 자신의 교만함과 강팍함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한 철저한 ‘자기 고난, 자기 부정’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복종과 굴복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겸손, 겸비”(humble)의 의미로 이 단어의 히브리어의 의미를 충분하게 전달하기는 한계가 있습니다.

4절, “메뚜기”: 구약 성경에 메뚜기를 표현할 때 사용된 히브리 단어가 9개나 있지만, 그 중에서 본절에 기록된 히브리어 “아르뻬”가 24회에 언급되고 있는 가장 널리 보편적으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메뚜기를 의미하는 “아르뻬”의 말의 어원은 “많다, 증가하다”를 뜻하는 “라바”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말로 “메뚜기”의 수효가 매우 많았을 때에 성경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근동 지역에서 발견되는 메뚜기는 종류만 91종류가 있지만, 애굽의 재앙에 등장하는 메뚜기의 습성을 지닌 기동성이 뛰어나고 번식력이 뛰어난 메뚜기는 ‘사막 메뚜기(학명: Schistocerca gregaria)’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사막 메꾸기는 엄청나게 많은 수가 떼를 지어 옮겨 다니며 3일 동안 쉬지 않고 날수도 있고, 무려 2000km를 이동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메뚜기 떼가 한번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곡식이며 초목이 완전히 황폐화된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자연 발생적으로 간간히 등장하는 메뚜기 떼의 침입이 이 정도인데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해서 애굽 전역에 임한 메뚜기의 재앙이라면 그 가공할만한 파괴력은 어느 정도일지 가히 짐작하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5절 말씀에 “메뚜기가 지면을 덮어서”라는 표현이 있는데 실제로 학계의 보고에 의하면 메뚜기 떼가 2600km2에 달하는 지역을 뒤덮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애굽 전역을 덮는 메뚜기 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을 것입니다. 또한 6절에 메뚜기가 “사람의 집들에 가득하리니”라고 기록하고 있으니 메뚜기 떼들이 식물만을 공격하는 현상에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개입되어 사람들의 주거지까지 침입하여 일상 생활까지 모두 마비시킬 정도로 심각하게 임할 것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7-11절, 신하들의 간청으로 타협안이 제시되지만, 결렬되어 모세와 아론이 쫓겨남)
바로의 신하들이 애굽이 초토화될 것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낼 것을 바로에게 간청합니다.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다시 불러 누구를 보내야 하는지에 관해 묻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전체는 물론 그 모든 가축까지 가야 한다고 답합니다. 하지만, 바로는 여자와 아이들은 남겨두고 장정들만 가도록 허락하여 결국 타협안은 결렬되고 모세와 아론은 쫓겨나고 맙니다.

7절, “바로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되”: 지금까지 일곱 차례의 재앙이 지난가는 동안 바로의 신하들은 바로에게 단 한마디의 조언도 하지 않았었습니다. 단지 세번째 이의 재앙에서 “하나님의 권능입니다(출 8:19)”라고 말한 적이 있고, 일곱번째 우박의 재앙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몇몇 신하들이 재앙에 두려워 종들과 가축을 들에서 피난시킨 적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침묵을 깨고 왕에게 진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들의 가축들이 죽고, 농작물이 피해를 당하고, 자시들과 가족들까지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바로에게 간청하게 된 것입니다.

7절,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함정’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모케쉬’로 “덫을 놓다, 올무를 놓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모세의 요청이 바로의 신하들이 덫에 걸리고, 올무에 걸리도록 하여 자신들을 멸망하게 하는 ‘함정’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즉 모세가 자기 백성들을 바로와 애굽에서 절대로 보내지 않을 것을 알면서 그것을 미끼로 바로와 바로의 신하들과 애굽을 멸망시키려는 함정으로 계속 꽤어 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며 바로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시에 더 이상 피해를 입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냥 보내 주자고 하는 요청입니다. 7절 하반절에는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라고 말하며 바로의 신하들은 애굽의 참담한 상황을 말하면서 자신들을 보호하지 못한 애굽의 신들과 바로에게 대책을 촉구하며 항변의 의미까지 담고 있습니다.

8절, “갈자는 누구 누구냐”: 얼핏 들으면 바로가 모세의 요구와 신하들의 청원을 들어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바로는 또다시 교묘하게 자신의 속셈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일곱 차례의 재앙이 임하는 동안 여러 번에 걸쳐 출애굽 대상이 이스라엘 민족 전부라는 것을 명명백백히 밝혔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른체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아직도 바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9절,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히브리 성경에는 “앞에”와 “지킬”라는 단어가 없고 영어성경이나 한글성경이 의역하고 있는 문장입니다. 직역하면 “우리가 남녀노소와 양과 소를 (여호와 절기)를 위해 데리고 가겠나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해석의 걸림돌은 “절기” 제도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절기 준수의 명령을 받은 시내산 이후 부터라는 것입니다. “절기”란 단어의 히브리어 “하그”는 구약에서 주로 이스라엘 민족의 3대 주요절기인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시점은 시내 산 율법을 받기 전이므로 “절기”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절기”라는 번역보다 “희생 제사”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그”라는 단어는 “절기”라는 뜻 외에 “춤추다, 절기를 지키다”라는 “하가그”에서 유래한 “축제”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맥상 “절기”로 번역하는 것이 무리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그(절기, 축제)”는 단순한 ‘희생 제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녀 노소 및 모든 가축이 함께 참여하고, 가야하는 이스라엘 ‘민족적 축제, 절기’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NIV 영어성경은 본절의 “절기”를 “Festival(축제)”라고 번역하고 있고, KJV, NASB 영어성경은 “Feast(잔치, 축제)”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10절, “너희의 어린 아이들을 보내면 여호와를 너희와 함께하게 함과 같으니라”: 본절의 “여호와를 너희와 함게하게 함과 같으리라”라는 말은 히브리 문장을 직역하면 “여호와는 너희들과 함께 있으리라”라는 뜻으로 축복을 기원하는 문장입니다. 하지만 앞의 조건절의 ‘만약 내가 너희의 어린 아이들을 보낸다면…’라는 말이 있으므로 축복을 기원하는 인사가 아닙니다. 조건절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 축복을 기원하는 인사는 결코 성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바로의 빈정거리는 투의 말로서 어린 아이들은 절대로 보낼 수 없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한 말입니다. 그래서 한글 공동번역은 아예 본문을 의역하여 “야훼께 빌어 보아라 내가 너희를 보낼 성 싶으냐?”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11절, “장정”: 이 단어의 히브리어 “께베르”는 ‘강하다, 우세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에서 유래되어 “남자, 대장부, 장정”을 의미하여 일반적으로 ‘힘이 절정에 있는 남자”를 뜻합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성인 남자들 가운데 아내와 자식 등 딸린 식구가 있으므로 대략 30세 이상은 되는 결혼한 장정을 의미합니다. 문맥상 바로가 이렇게 요구한 까닭도 처자식이 있는 정장들로 하여금 제사를 드린 후 처자식과 가축이 있는 애굽 땅으로 다시 돌아고게 하고자 하는 계산이 있기 때문입니다.

[묵상 및 적용]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명확하게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과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모세를 통하여 바로에게 “하나님을 백성을 내 보내라”라는 여호와의 뜻을 전달하면서 애굽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닫게 되기를 원하는 목적을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일곱번째 재앙인 우박의 재앙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시는 것” 입니다. 즉 바로와 그의 신하들, 그리고 애굽 온 땅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도 하나님이 우상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하시고 절대자이신 “하나님”으로서의 그 이름 “여호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또 다른 이유가 등장합니다. 그 두번째 목적은 모세로 하여금 애굽 땅에 나타났던 이적들을 그 후손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하고 이해시켜 결국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했던 그 언약을 성취하시는 여호와이심을 후손들로 하여금 알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스라엘 민족들의 후손들에게 애굽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이적들이 전해짐으로 민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하고” 또한 “찬양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목적은 신명기 32:1-47의 ‘모세의 찬송’이나 여호수아 24:1-15의 ‘여호수아의 고별 설교’ 및 시편 68, 77, 78, 81, 114, 135, 136편에 속속들이 드러나 있습니다.

특히 본문 2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기 위함이라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라고 말하면서 “하나님 여호와를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는 것”은 지식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히브리 문화에서 “앎”이란 “지식과 행동의 하나됨, 일치”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안다면 당연히 행동으로 실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곧 행동으로 실천되지 않으면 아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단순히 지적 때달음이나 추상적 차원에서의 인식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마음으로 느끼면서’ 하나님의 능력 행하심을 ‘몸으로 체험하여’ 아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과정의 십대 재앙을 통해서 애굽과 바로,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거듭되는 하나님의 이적의 재앙을 통하여 첫째로는 바로와 애굽이 그들이 그토록 섬기던 각종 우상들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며, 각종 신들이 철저하게 무너지고 파괴되어짐을 통하여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분명하게 체험하여 알리는 것이며,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됨을 보여 줌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여호와가 누구이신가”를 목도하여 체험함으로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온 세상의 택함 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즉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 뿐만 아니라, 신약시대의 성도들에게까지 애굽에 내리신 재앙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심, 그 분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 되심을 깨달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남겨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출애굽 당시의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똑같은 출애굽의 체험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한 고난, 아픔, 역경, 시험, 질병, 그리고 사단의 유혹과 도전 속에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역사하셔서 돌봐주신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바로 “우리가 경험하여 알게 된 하나님”을 후손들에게 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기도의 자리에서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의 자녀들에게 가르치기를 힘쓰겠다는 결단의 기도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알리는 것”이 우리의 자녀들에게 영원한 삶의 “열쇠”를 남겨주는 부모의 사명임을 깨닫고 이 일에 주저함이 없는 결단의 기도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기도]
세상과 세대, 역사를 관통하여 살아 움직이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온 세상 뿐만 아니라, 우리 가정들 속에도 살아 움직이는 능력으로 역사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심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고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상과 죄악이 가득찬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지셨듯이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시시기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깊이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사랑과 주를 향한 믿음이 우리와 후손들의 삶 속에서 변질되거나 퇴색되지 않도록 영원한 삶의 기준과 생명줄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주옵소서. 다음 세대가 믿음 위에 세워지기를 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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