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나눔

오늘의 말씀묵상 4/4/2021 부활주일 [마태복음 28:1-20]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4-04 09:08
조회
742

4. 4. 주일. 오늘의 말씀묵상


[본문: 마태복음28:1-20]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11.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12.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13.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14.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15.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16.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본문이해]
(1-10,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에게 부활 소식을 알리는 천사와 그들 앞에 나타나신 부활의 예수님)
유월절 안식일이 지나고 그 이튿날 새벽 무렵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보려고 찾아왔습니다. 큰 지진과 함께 천사가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같고 옷이 눈 같이 희어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파수꾼들조차 무서워 떨고 있을 때에 천사가 여인들을 안심시킨 후 예수님이 여기 계시지 않고 생전에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음을 선포하고, 주께서 먼저 갈릴리로 가신다는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말합니다. 여인들이 두려움과 기쁨의 혼란 가운데서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여인들은 무릎을 꿇고 경배하였고, 주님은 안심시키며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날 것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절,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마가복음 16:1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24:10에 의하면 또 다른 여자들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온 여인들은 이름이 밝혀진 여인들 외에 더 있다고 추정됩니다.

2절 “주의 천사”: 지진과 함께 등장한 천사에 대해서 각 복음서는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천사로 기록하고 있으며, 마가는 16:5에 “한 청년”으로, 누가는 24:5에 “두 사람”으로, 요한은 20:12에 “두 천사”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점은 복음서의 저자들이 ‘천사’라는 영적 존재를 자세하게 묘사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발생하였음을 전하고 부활을 알리는 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여 집니다.

9절 “평안하냐”: 한글 개역성경은 ‘평안하냐?’라는 의문문으로 표현되어 있고, 영어성경은 인사말인 “Greetings”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본문의 헬라어 ‘카이레테’라는 말은 의문문이나 인사말로 표현되어 있지 않고 명령문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평안하냐?’라는 표현이 아니라, “너희는 기뻐하라!”라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16:20에서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의 성취이며, 이제는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근심할 필요가 없다는 위로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10절 “갈릴리로 가라”: 마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천사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갈릴리로 가라”라는 말씀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대위임령으로 알려져 있는 마태복음 28:18-20을 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의 행동강령을 갈릴리에서의 대위임령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11-15,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은폐 음모와 매수된 자들의 거짓 소문 유포)
여인들이 떠난 뒤, 무덤을 지키던 파수꾼들이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상황을 보고합니다. 대책을 의논한 유대 지도자들은 일어난 사건을 은폐하기로 음모를 꾸밉니다. 그래서 돈으로 군병들을 매수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이 밤에 시신을 훔쳐 갔다고 소문을 퍼뜨리도록 시킵니다. 돈에 매수된 군병들은 일이 총독에게 알려 지더라도 유대 지도자들이 처벌받지 않도록 약속했기에 시키는 데로 거짓 소문을 유포합니다. 마태는 이런 정황과 경위를 기록하여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거짓 소문이 퍼지게 된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11절,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한글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헬라어 성경에는 문장의 맨 앞에 “보라!(헬 idou, 영 Behold)”라는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즉 “보라! 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라는 구조입니다. 이 단어는 주의를 환기시키는 기능을 하는 헬라어의 감탄사입니다. 마태는 이 단어를 사용하므로 경비병 중 몇 사람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무덤에서 있었떤 일을 분명히 알렸다는 사실을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즉 예수 부활의 증거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것이 아니라, 경비병들을 통해 유대 지도자들에게도 알려진 사실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며, 그들의 소문이 거짓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16-20,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리리에서 재회한 후 주님이 남긴 지상 최후의 명령)
열한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명한대로 갈릴리로 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 중에는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부활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졌음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최후의 지상 명령인 ‘대위임령’을 말씀하십니다. 곧 세상의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주께서 생전에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모든 것을 새로 제자로 삼은 자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남기십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간 이 세상에 머무시면서 행하신 여러 가지 행적들을 기록해 놓고 있지만, 마태는 본 단락에서 제자들과 만난 장면을 제외하고 다른 여러 행적의 기사들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마태의 집중적인 관심은 ‘대위임령’이라는 복음을 전파하는 명령에만 맞추어져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의 결과로 보면, 이는 본 단락이 마태복음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예수님의 최후의 유언이며, 기독교의 역사가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며, 오늘날까지 뜻있는 성도들에 의해 계속 수행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진실한 제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성경의 다른 부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기록들을 참조하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막 16:12-13, 눅 24:13-32),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예수님(눅 24:34, 고전 15:5), 도마가 없을 때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막 16:14, 눅 24:36-43, 요 20:19-25), 다시 도마가 있을 때 나타나신 예수님(요 20:26-31, 고전 15:5), 갈릴리 바닷가의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 물고기를 잡도록 하신 예수님(요 21:1-25)에 대한 기록들입니다. 이러한 여러 사건들을 전부 생략한 마태의 의도는 독자들의 관심을 좀 더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집중시키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17절,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옛날 개역한글 성경에는 이 문장이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라고 단수로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새로 번역되어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 성경에는 복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복수의 번역이 헬라어 성경을 잘 표현하고 있는 바른 번역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이 성경에서 알려진 것처럼 도마 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참조로 ‘의심하다(헬, 에디스타산)’라는 말은 신약 성경 전체에서 딱 2번만 사용되고 있는 단어입니다. 다른 한 곳은 예수님께서 바람을 보고 두려움에 사로 잡혀 물 위를 걷다가 빠져 버린 베드로를 책망하시면 하신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는 말씀입니다. 곧 완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하여 주저하고 있는 상태로 근본적인 불신은 아니지만, 아직 머뭇거리고 있는 의심의 단계입니다.

19절,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2인칭 복수 명령형인 이 단어가 지칭하는 ‘너희’는 직접적으로는 승천 직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보다 궁극적으로는 주님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합니다. 본 문장에서 “민족”(헬, 에드네)이라는 말은 마태복음 24:14에도 사용되는 단어로 나라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인종을 이루는 단위 개념의 민족을 가리킵니다.

19절 “세례를 베풀고”: 이 문장을 직역하면 “너희가 그들에게 계속해서 세례를 베풀면서…”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한글 성경 문장 구조에서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라고 표현되어 있어서 제자로 삼은 후에 세례를 주는 것의 시간적 순서를 정할 수 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헬라어 성경이나 영어성경의 번역의 시간적 순서는 약간 반대적 개념입니다. 즉 세례가 제자를 삼는 수단처럼 사용되어서 세례가 계속적으로 시행되는 과정을 통해서 제자를 삼을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례가 담고 있는 기본적인 의미가 단순히 의식적인 행사가 아니라,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이 죽으심과 장사됨과 부활하심에 함께 참여한다는 영적 의미가 있으며, 또한 동시에 죄씻음과 죄사함의 의미가 들어 있으므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제자가 되는 길에 가장 중요한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묵상 및 적용]
오늘은 부활절 아침입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다녔던 잠실의 옥토교회에서 맞이했던 부활절 아침이 기억이 납니다. 새벽예배를 드리고 모두 교회 4층 옥상으로 올라가서 해맞이를 했던 기억입니다. 그런데 2021년 4월 4일, Pacifica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햇빛이 없어서 아쉽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청명하고 맑은 공기가 코 끝을 청량하게 스치는 부활절의 아침입니다.

성탄절이나 부활절에 자주 공연되는 찬양들 중에 으뜸은 아마 오라토리오 헨델의 “메시야”라고 생각됩니다. 헨델의 메시야를 공연했던 세계의 유명한 지휘자들과 오케스트라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 대학때에 처음 들었던 헨델의 “메시야” CD의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다른 유명한 공연들 보다 귀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공연 CD가 있는데 최근에 유투브에서 발견해서 위에 링크를 걸어 함께 나눕니다. 특히 칼 리히터의 지휘와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존 엘디스 합창단의 전곡 공연을 담고 있고, 노래가 바뀔 때마다 화면에 설명과 가사도 곁들어 있고, 유투브 자세한 설명을 보는 버튼을 두르면 듣고 싶은 노래만 클릭해서 들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어서 듣는 분들에게는 좋은 공부도 되어서 나누니 시간이 되실 때에 감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28장! 이 장을 떠올리면 어떤 성경구절이 가장 먼저 떠 오르십니까? 글쎄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저도 역시 19-20절에 나오는 지상 대명령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을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암송하기도 하는 이 구절은 워낙 유명해서 1-17절에 나오는 모든 내용을 기억나지 않게 할 정도로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지했는지 저자 마태도 천사와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갈릴리로 가라”라는 말씀을 통해서 독자들이 갈릴리에서 과연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궁금증을 자아내게 합니다. 그리고 그 궁금증은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의 말씀이 19-20의 ‘대위임령’의 말씀으로 종지부를 찍습니다.

‘전도, 선교’라는 주제를 떠 올릴 때마다 빠질 수 없는 ‘대위임령’은 주님이 남기신 최후의 지상 명령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씀을 어떻게 마음에 담을 것인가를 묵상하다가 부활의 소식을 알리는 천사와 예수님이 남기신 짧은 대화 속에서 큰 은혜가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알리러 온 천사는 여인들에게 말하기를 7절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길리로 가시나니 거시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부활의 소식을 알리려고 제자들에게 달려 가고 있는 여인들을 만나서 10절에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길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동일한 내용이지만, 천사의 말과 예수님의 말에는 현저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천사는 제자들을 표현할 때에 “그의 제자들”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고, 예수님은 “내 형제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자를 대할 때에 천사의 말처럼 제 3자의 위치에 있는 3인칭으로 표현하는 것과 예수님의 말처럼 1인칭 소유격 “나의”라고 표현하며 주님과 직접 관련있는 형제로 표현하는 것은 감정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예수님이 “나의 형제들”이라고 부르는 제자들이 어떤 자들이었습니까? 주께서 잡히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거나, 숨거나, 사명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각자의 고향이나 삶으로 돌아갔던 자들입니다. 하지만 “내 형제들”이라는 주님의 언급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버린 제자들을 수용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구속 사건으로 말미암아 ‘제자’에서 ‘형제’로 조정되어 “하나님의 가족(God’s family)’에 속한 형제가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의 표현이 “주의 제자들”이라고 표현하지 않은 것에 대해 웬지 논란이 있을 것 같지만, 오히려 이 표현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의 중함을 생각할 때에 어떤 마음의 자세와 태도를 가진 사람이 복음의 최전선에 뛰어 들 수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할 여지를 주기 때문에 오히려 감사한 단어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마음 가짐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냥 의무와 책임감만 가진 사람과 “마음”이 움직여서 사명을 가진 사람은 분명히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은 복음을 전파할 지역이나 대상, 즉 하나님이 찾으시는 영혼을 바라보는 “마음가짐”입니다. 천사의 표현처럼 제3자로 바라보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3자는 바라보는 대상과 멀리서 지켜보는 대상은 될 수 있으나, 예수님의 말씀처럼 “내 형제”가 되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입니다.

선교의 현장에서 몸과 생명을 바치며 피를 뿌리며 희생한 믿음의 선진들은 영혼들을 바라볼 때에 제3자의 입장에 있는 “그는, 그녀는, 그들은(He, She, They)”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한 영혼, 한 영혼을 1인칭으로 “나의 형제”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내어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부활절에 주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합하였으면 좋겠습니다. 한때 주의 곁을 떠났던 제자들을 향하여, 그리고 우리들을 향하여 “나의 형제여~”라고 불러 주시는 주의 사랑과 은혜를 마음에 깊이 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우리 주변에 “복음, 기쁜 소식(Good News)”이 필요한 사람들을 제3자가 아니라, “나의 형제, 자매”로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가족을 확장해 나가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죽은 자들과 산 자들에게 부활의 소망과 확증이 되신 예수님!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에 감사하며, 찬양과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부활을 통하여 이루신 구원의 능력과 복음의 능력이 이 시대의 어둠을 물리치게 하시고, 연약하고 병든 자에게, 그리고 스스로 절망이라고 생각하여 소망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위로와 힘과 능력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주께서 남기신 지상 최후의 명령을 사명을 마음에 담고 삶으로 전하는 능력의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5월 1일에 하나님의 가족들을 찾아서 초청하는 귀한 시간을 갖습니다. 이 일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혼들을 보게 하시고, 찾을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부활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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