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나눔

오늘의 말씀묵상 2/26/2021 금요일 [마태복음 18:1-9]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2-26 09:39
조회
748

2. 26. 금요일. 오늘의 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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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태복음18:1-9]
1.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5.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본문이해]
마태복음 18장은 ‘공동체 훈화’로 알려져 있는 본문으로 공동체 생활, 즉 하나님의 백성들 간의 대인관계의 관점에서 본 장을 볼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전체 35절은 1-4절은 성도들의 교만하지 않고 겸손함에 대해서, 6-10절은 작은 자들을 실족하게 하지 말고 영접해야 할 것에 대해서, 12-14절은 작은 자들 중에서 잃어버린 상태로 두지 말고 찾아야 할 것에 대해서, 15-20절은 범죄한 자를 사랑으로 권징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 21-35절은 회개하는 자를 용서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1-4절, 어린 아이를 통해 겸손을 가르치심)
“천국에서 누가 크니이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가운데 세우시고 상징적인 교훈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철이 없다거나, 어리석다거나, 보챈다거나, 쉽게 속아넘어간다는 의미로 세우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모델과 부모에게 의존적이고 순조하는 성향과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성향을 따라 모델로 세운 것입니다. 겸손한 자는 자신을 알고 자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기 자신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에게 주신 은사를 부인하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어린아이처럼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결코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이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여부가 인간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는 말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님을 천국의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결정된다는 것이 마태복음의 전체에 전제되어 있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는 말은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말씀이라기 보다는 이미 천국의 백성이 된 자들의 성품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처럼 겸손하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의존하는 자가 천국에서는 ‘큰 자’ 입니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큰 자’가 아니라,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자가 큰 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누가 크니이까?”라는 질문을 가장 적게 하는 사람이 사실 가장 큰 자입니다. 마태복음 20장 20-28절의 교훈에 의하면 천국의 통치질서는 집권자들이 백성을 마음대로 주관하는 세상 권세와는 다르며, 오히려 천국 시민들 중에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며,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섬기는 리더쉽은 천국의 모습이며, 예수님은 이러한 겸손이 구속사역의 목적에 부합되는 것이라고 마태복음 20:28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1절의 “그때에”란 마태복음에 의하면 성전세를 내신 때이고(마 17:27), 마가복음에 의하면 가버나움에 이르러 한 집에 계실 때이며(막 9:33), 누가복음에 의하면 주께서 두번째 수난 예고를 하셨으나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고 서로 누가 크냐고 논쟁할 때(눅 9:43-46) 입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서의 내용을 종합해서 보면 당시 유대 상황으로 볼 때 성전세는 매년 아달월(태양력 2,3월) 15일경에 내므로 니산월(태양력 3,4월)에 있는 유월절, 즉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약 1달전쯤의 상황입니다. 1절에서 “천국에서 누가 크니이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직 제자들은 예수님이 세우실 ‘천국’의 진정한 의미를 오해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주님의 나라는 이 땅에 정치적으로 이루어질 지상 왕국일 것이라는 생각 아래 질문했다면 아직도 메시아 사역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5-9절, 영접하는 것에 대한 가르치심과 작은 자를 실족케 하는 죄의 심각성을 가르치심)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작은 자를 영접하는 것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동일시하면서 작은 자를 환대할 것을 교훈하십니다. 본문에 기록된 ‘작은 자(헬, 미크론, micron)’은 한글개정에는 ‘소자’로 표현되어 있으며 ‘키, 연령, 양, 부피, 세력, 지위 등등에 있어서 미약한 자’라는 뜻으로 신약 성경에 사용되고 있는 표현입니다.

‘작은 자’를 영접하는 것은 간단하게 한 절로 말씀하시고 실족케 하지 말라는 것은 7-10절까지 4절에 걸쳐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대인관계에 있어서 실족케 할 가능성이 그만큼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서로 어울려 살아가면서 손, 발, 눈으로 표현되는 죄의 본성 때문에 상대방을 실족케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본 단락의 7절의 “실족케 하다”라는 말과 8-9절에서는 “범죄케 하다”라는 말은 똑 같은 헬라어 “스칸달리조(Skandalizo)”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본문에서 ‘실족케 하는’ 것은 ‘범죄케 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실족(헬, 스칸달론)’은 영어로는 ‘Stumbling block’이라고 표현되며, ‘올무, 함정, 걸림돌, 장애물’ 등등의 뜻으로 성경에 사용되는데 이는 말이나 태도나 행동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걸려 넘어져 범죄하도록 하건, 자기 스스로 범죄에 빠지는 것도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런 범죄할 가능성을 제공하는 손, 발, 눈을 비유하면서 세 가지 죄의 심각성을 지적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로는 작은 자를 실족케 할 바에는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6절)라고 말씀하십니다. ‘연자맷돌’은 여인이 곡식을 빻기 위해 사용하는 손으로 돌리는 작은 맷돌이 아니라, 소나 나귀가 돌리는 큰 맷돌이므로 깊은 바다에 빠지면 결코 빠져나올 수 없이 신속하고 확실하게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즉 실족하게 하는 자에게 이런 화가 임한다는 문맥입니다.

둘째로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과 유혹으로 들끓는 세상 때문에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할 경우 실족케 하는 사람과 세상에 화가 임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범죄케 하는 본인 자신도 화를 입고, 세상(또는 공동체)도 화를 입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7절). “세상에 화가 있도다”라는 말은 끝에 감탄사가 붙어 있는 감탄문입니다(KJV, Woe unto the world!). 즉 실족케하는 이 세상은 화를 절대 피할 수 없음을 강렬하게 표현하는 셈입니다.

셋째로는 다른 사람을 실족케 하거나 자신을 실족케 하는 것이 ‘지옥’에 들어갈 죄라고 말씀하십니다(9절). 본문 9절에 “영생”라는 단어는 ‘영원한 생명(eternal life)’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원문에서 ‘생명(life, 헬, 조에 zoe)’의 뜻입니다. 즉 영원히 지속되는 삶이라는 시간적이고 양적인 개념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의 참 생명을 의미하는 질적인 개념입니다. 즉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누릴 수 있는 참 생명을 가리키고 있는 셈입니다.

[묵상 및 적용]
어느 봄 날, 장난꾸러기 소년들이 연못가에서 놀면서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연못 속에 살고 있는 많은 개구리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던진 돌들이 개구리들을 다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나이 많은 개구리가 아이들에게 ‘제발 돌을 연못에 던지지 말아줘’라고 부탁했습니다. 소년들은 ‘우리들은 다만 놀고 있을 뿐이야’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노인 개구리가 “그건 알고 있지만, 제발 돌을 던지는 것은 그만둬 줘. 너희에게는 놀이인 것이 우리에게는 죽음이 되거든’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짧막한 이야기로부터 나온 영어 속담이 “A frog is hit by a stone thrown inadvertently and dies(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라는 말입니다. 생각없이 내 뱉은 말이나 행동들이 어떤 사람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 ‘작은 자’들에 상처를 입히는 일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가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은 표현하기를 이 ‘작은 자’들이 ‘나를 믿는’ 자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즉 순수하고 어린 신앙을 소유한 믿음이 약한 자이지만 명백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결국 실족케 하면 죄가 된다는 것이며, 더욱 강하게 경고하기를 9절에 “지옥 불에 던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역으로 좀 강하게 생각하면 ‘실족케 하는 죄’는 지옥에 떨어질 수 있는 죄라는 것입니다. 매우 강렬한 성경의 표현입니다.

“지옥에 떨어질 수 있는 죄!”라는 말은 가슴을 섬뜩 섬뜩하게 합니다. ‘지옥(헬, 게엔난, Geennan)’이란 단어는 예루살렘 남쪽 ‘게이 힌놈’(‘힌놈’의 골짜기)에서 유래된 말로서 왕하 23:10, 대하 28:3, 렘 7:31, 32:35에 의하면 아이들을 몰록신에게 불로 태워 바쳤던 곳이며, 왕하 23:10에 의하면 불로 쓰레기를 태우고 벌레가 들끓었던 곳입니다. 불과 연관되어 있는 장소에서 유래된 지옥은 마귀와 악령들과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심판의 불’의 장소입니다. 동일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막 9:47-48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으며 사람을 불로써 소금 치듯 하는” 장소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 갈 수 있는 죄라면 정말 눈뜨고 다시 스스로를 겸손하게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실족케 하는 자들에게 손, 발, 눈이 실족케 하는 도구가 되면 잘라내거나 빼어 내버리는 것이 범죄케 하는 손, 발, 눈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이토록 ‘작은 자들’을 고의로 범죄하도록 이끄는 사악한 행위와 그들을 영접하기를 거절하는 완고한 행위, 또는 순수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진 자들을 넘어지게 하는 모든 행위를 ‘실족’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죄의 대가를 지옥 불에 던지우는 종말론적 형벌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심각한 죄이며, 돌이킬 수 없는 화가 됨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실족케 하는 죄나 작은 자를 영접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살피는 것도 좋은 묵상이 되겠지만, 위에 언급한 것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생각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라는 영어 속담처럼 무심코 내 뱉은 내 한 마디의 말에 상처를 받거나 마음 문을 닫은 아내나 남편, 자녀들이나 친구, 성도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있을까요? 무심코 재미로 던진 유머나 농담이 그들에게 상처가 되거나 걸림돌이 되었던 적이 있을까요? 나 스스로는 괜찮다고 생각해서 조언이나 충고를 했는데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 보니 상처나 아픔이 되거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경우가 있었을까요?

성경이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실족케 하거나, 범죄케 하도록 하지는 않았을지라도, 혹이라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오늘 말씀 묵상을 통해서, 또는 개인 기도의 골방에서 하나님께서 용서의 은혜를 주시고, 또한 그 누군가에게 “미안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선한 용기와 은혜를 주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생명은 언제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실지 모릅니다.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관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헤어지기 전에, 이별하기 전에, 다시 볼 수 없기 전에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라고 좋은 말과 베품과 환대를 마음껏 할 수 있는 회복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예수님! 주의 은혜와 사랑, 베푸신 온유함에 감사드리며 찬송과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나의 입술의 모든 말이 더럽고 거룩하지 못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 입술을 정결케 하셔서 주께 열납될 수 있는 선한 말을 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 주의 말씀을 늘 읊조리는 묵상의 입술이 되게 하옵소서. 딱딱하고 완고한 나의 마음과 입술을 부드럽게 하셔서 가족들과 친구들 이웃들에게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어린아이과 같은 믿음의 성숙함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나의 생각과 고민을 들어주시는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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