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나눔

오늘의 말씀묵상 2/21/2021 주일 [마태복음 15장 29-39]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2-21 10:18
조회
942

2. 21. 주일. 오늘의 말씀묵상

찬양링크 “나 오직 주님만을”: " target="_blank" rel="noopener">

[본문: 마태복음15:29-39]
29.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30.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31.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32.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33.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35.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36.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37.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38.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39.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시니라

[본문이해]
오늘의 본문 29-31절에서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숫가 지역에서 각종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32-39절은 칠병이어의 기적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9절은 예수님이 어느 지역에 계신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병행구절인 막 7:31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방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두 구절을 비교해 볼 때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의 딸을 고치신 두로에서 북쪽으로 올라가서 시돈에 이르렀고, 데가볼리 지방을 통과하여 남동쪽으로 내려가 갈릴리 호수에 이른 것입니다. 주님이 통과하신 지역은 분봉 왕 빌립의 영토들입니다. 이러한 행로를 볼 때 당시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죽이고 예수님에 대해서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경계하고 있는 헤롯 안티파스의 통치 지역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갈릴리 호숫가도 헤롯 안티파스의 지경이 아닌, 분봉 왕 빌립이 다스리던 갈릴리 북동부 지역이라 추정됩니다.

이 지역에서의 사역을 다루고 있는 마가복음 7:32-36절의 병행구절에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치실 때에 ‘에바다’란 말씀으로 하심으로 고치시는 사건만 기록되어 있지만, 마태는 각종 병 걸린 자들을 고치시는 주님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태는 31절에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라는 표현을 통해서 구약 성경의 메시아 사역에 대한 예언대로 주님이 모든 종류의 병자를 치유하시며, 또한 이 일이 갈릴리와 이방 땅에서 일어났음을 밝힘으로써 주님이 메시아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떡 일곱개와 작은 생선 두 마리로 성인 남자 사천명을 먹이신 칠병이어 사건은 오병이어의 이적과 유사한 점이 많이 있어서 혼동할 수 있지만, 본문을 자세히 읽어 보면 두 사건 사이에는 여러 다른 점들이 있습니다. 우선 떡의 숫자가 ‘다섯개’와 ‘일곱개’로 다르며, ‘물고기 두 마리’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다르며, 남은 양은 ‘열두 바구니’와 ‘일곱 광주리’로 다르며, 먹은 사람 수는 ‘오천명’과 ‘사천명’으로 다르고, 이적 사건 후에 가신 장소가 ‘게네사렛’과 ‘마가단’으로 다르며, 그리고 끝으로 무리들이 앉은 장소도 ‘잔디’와 ‘땅’으로 다릅니다. 또한 한글성경은 똑같은 단어를 사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14:13-21의 오병이어에 사용된 단어와 본문의 칠병이어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상에 차이가 있으며, 오병이어 사건은 잔디가 등장하는 계절이므로 유월절이 임박한 초봄으로 잔디가 돋아오르는 계절로 추정되지만, 본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을 거쳐서 갈릴리에 도착한 때이므로 잔디가 없어진 건기라고 추정됩니다. 그러므로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사건은 서로 비슷한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세한 부분에서 다르기 때문에 마태와 마가가 두 사건을 혼동하여 기록했다고 보기에는 이적이 일어난 때, 장소, 상황 등이 다르며 차이점이 분명한 것들이 있으므로 서로 다른 사건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37절에서 ‘광주리(헬, 스퓌리스)’로 표현된 단어는 갈대나 식물 줄기 등을 얽어서 만든 크고 튼튼한 바구니로서 사도행전 9:25에서는 바울이 다메섹에서 탈출할 때에 성벽으로 달아내렸던 바구니와 같은 단어입니다. 하지만 마 14:20의 오병이어에 나오는 ‘바구니(헬, 코피노스)’는 휴대용 작은 바구니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광주리’라는 말은 성인 남자가 들어가도 버티는 튼튼하고 어느 정도 크기가 있는 바구니이므로 칠병이어의 기적에서 남겨진 조각의 양이 ‘일곱 광주리’이지만, 전체 양으로 보면 더 많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이 광주리는 주로 이방인들이 곡식이나 음식을 담는데 사용하는 용기이므로 칠병이어의 이적은 이방인이 많이 거주하던 분봉왕 빌립이 다스리던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며,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었던 벳새대와는 다른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39절의 “마가단”은 병행구절인 마가복음 8:10에는 ‘달마누다’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동일한 지역입니다. 어떤 헬라어 성경에는 ‘마가단(Magadan)’이라는 말로 기록되어 있고, 또 다른 사본의 헬라어 성경에는 ‘막달라(Magdalene, KJV)’로 나옵니다. 즉 이 두 헬라어 표현은 같은 뜻의 말로서 ‘막달라’는 아람어에서 유래된 말로 ‘망대, 탑’을 뜻하며, ‘마가단’은 ‘망대’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믿달(Midal)’의 음역입니다. 참고로 성경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막달라’ 지역의 마리아라는 뜻이며, 마가단(막달라)은 갈릴리 호수 서북쪽 약 5 km 지점에 위치한 길벳 메즈델(Khirbet Mejdel)로 알려져 있으며, 예수님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준 막달라 마리아의 고향이라고 추정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마가복음 8:10의 ‘달마누다’ 지방은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길벳 메즈델로 불리우는 갈릴리 지역들 중의 한 곳이라고 추정됩니다.

[묵상 및 적용]
초등학교 2-3학년 때에 경기도 반월면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반월면이 사분오열되어 의왕시, 안산시, 수원시, 군포시 등등으로 쪼개져서 사라져 버렸지만, 1970년 후반에 반월면은 작은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시골 마을에 매일 새벽과 수요일, 금요일, 주일예배를 알리는 새벽종이 달린 교회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그 때 열렸던 부흥회의 기억을 떠 올리면 평소 예배때 보다 몇배나 많은 사람들이 와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고, 말씀을 들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평소보다 몇배난 많은 사람들은 이웃 마을들에서 온 타교회 성도들 이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약 5-60명이 들어가면 꽉 찰것 같은 교회에 수백명의 성도들이 여기 저기서 모여 들어 교회 마당에 자릴 펴고 앉아서 목사님의 얼굴을 볼 수 없어도 귀로 열심히 말씀을 들었던 어른들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아마 요즘은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 듣기를 사모하는 장면을 보기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난 2019년에 북인도 단기선교를 갔을 때 또 그런 장면을 경험하였습니다. 티벳과 네팔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 주일날 참석하였습니다. 어른이 10명 정도 들어가면 더 이상 앉을때가 없는 작은 방과 그 방에 딸린 더 작은 방에 3-40명이 모여 앉아 있는 것입니다. 다닥다닥 붙어 앉아서 전후좌우로 다른 사람과 닿을 수 밖에 없는 가정 교회에서 1시간을 찬양을 하고 2-30분 말씀을 나누고, 또 1시간을 간증을 나누고, 또 1시간을 찬송과 기도를 합니다. 예배를 사모하고 말씀을 사모하는 성도들의 열정이 아직도 눈에 생생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칠병이어의 기적의 사건이 일어났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떠 올랐습니다. 32절은 표현하기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라는 말씀이 가슴에 먹먹하게 다가 왔습니다. 이 구절의 말씀을 통해서 느낀 감정은 주님이 그들에 대해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라고 말씀하신 긍휼의 감정과는 다른 것입니다. 제가 느낀 감정은 주님의 마음이 아니라, 그토록 간절히, 그리고 열심히 주님을 사흘 동안이나 따라 다닌 군중들, 무리들에 대한 감정입니다.

물론 그들 가운데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따라 다닌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며, 병든 사람도 있었을 것이며, 또한 주님이 선포하시는 권위있는 말씀에 삶의 고민과 염려가 사이다 같이 가슴이 뻥 뚫리는 회복을 원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을 따라 다니는 이유는 사람들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주님을 따라 다녔다”라는 그들의 열심과 간절함입니다.

어렸을 때 시골 교회 부흥회에 참석하시던 어른들의 모습들 처럼, 티벳 네팔 사람들의 간절한 예배의 감동처럼, 오늘의 본문 속에서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어느 산 등성이에 모인 수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품고 있는 간절함이 참으로 저에게 감동과 그리움, 그리고 부러움으로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따르는 성도는 ‘종교인’이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간절함과 목마름이 사라지면 ‘종교인’이 되어 버리는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32절에 사흘을 따라 다닌 무리들을 상상해 보면, 밤이 되면 변변한 잠자리로 없이 심한 추위를 견뎌내야 했고, 팔레스타인 땅의 들판에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분의 행동 하나 하나를 보기 위해 사흘을 머물러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사모했는지 잘 보여 줍니다.

그 무리들이 각자의 이유로 주님을 따라 다니는 이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간절함과 열심입니다. 그 간절함과 열심이 환경적인 조건이나 육체적인 한계도 아랑곳 하지 않고 주님 곁에 머물게 했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들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예배가 1시간을 넘어가면 벌써 몸과 눈빛이 반응을 하고, 설교시간이 3-40분을 넘어가면 얼굴빛이 달라집니다. 더우기 설교의 메시지가 듣기에 거북한 내용이 있거나 원하지 않는 내용일 때는 아무리 말씀이라 할지라도 시간에 상관없이 마음이 닫혀 들으려고 조차 하지 않습니다. 사흘을 주님을 따라 다닌 그들이 비정상이 아니라, 예배와 말씀에 갈급함과 열심을 잊어버리는 우리가 비정상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날은 진리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사라지는 시대입니다. 바울은 그런 시대를 표현하기를 딤후 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세대이며, 시대입니다. 그렇다고 시대의 흐름이나 세태가 그렇고 그렇다고 마냥 흐지부지하게 할 수 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에게 도전하고 경고를 해 보면 어떨까요? 말씀에 비추어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한 자이며 진리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라면 어느 곳이든지 따라가서 언제까지든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기를 바랍니다. 또한 혹시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착각하고 있는 ‘종교인’이 아닐지 겸허하게 자신을 돌아 보기를 원합니다. 실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타종교에 신자들과 똑같은 종교인이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참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나고, 성숙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배를 더 사모하고, 찬송을 더 입에 담고, 기도의 자리를 더 간절히 찾는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시편 기자가 42편 1절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라고 고백하였듯이 우리들의 삶에도 신앙의 간절함과 열심이 더욱 뜨거워지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 내 안에 있는 외식과 게으름과 나태함을 주의 긍휼하심을 따라 용서하여 주옵시며, 주의 권능으로 물리쳐 주옵소서.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던 세속적인 생각과 행동을 물리치시고, 내 안의 중심에 예수님께서 좌정하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내 뜻이 아니라 주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성령의 권능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말씀의 사모함이 회복되게 하시고, 찬송의 열심이 회복되게 하시고, 기도의 꾸준함과 간절함이 회복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르 긍휼히 여기셔서 영육간에 풍성함으로 채우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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