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나눔

오늘의 말씀묵상 2/16/2021 화요일 [본문: 마태복음 14:1-12]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2-16 10:23
조회
799

2. 16. 화요일. 오늘의 말씀묵상

찬양링크 “우리 이 땅에 몸으로 태어나”: " target="_blank" rel="noopener">

[본문: 마태복음14:1-12] 1.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2.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하더라
3.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4.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5.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하더니
6.마침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7.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하거늘
8.그가 제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9.왕이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 명하고
10.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11.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그 소녀에게 주니 그가 자기 어머니에게로 가져가니라
12.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

[본문이해]
(1-2, 예수님의 소문으로 인한 헤롯 왕의 반응과 두려움)
본 단락은 분봉왕 헤롯이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을 때에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보인 반응을 살펴 볼 때에 그가 세례 요한을 목베어 죽인 것에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분봉 왕 헤롯은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인데, 아버지 헤롯 대왕의 여러 부인들 중에 한명인 말타케의 소생으로, 역사 기록에 의하면 BC 4년에 갈릴리와 베뢰아의 ‘분봉왕’으로 임명받아 AD39년까지 다스린 인물입니다. ‘분봉왕’이란 ‘왕’이라는 말이 붙여져 있지만, 헬라어 ‘테트라아르케스’는 숫자 ‘4’(텟사레스)를 의미하는 단어와 ‘주관하다, 다스리다’(아르코)라는 말의 합성된 말로 그 의미는 ‘한 나라의 4분의 1의 지역을 다스리는 자’란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분봉왕은 실제로 ‘4분의 1을 다스리던 자’라는 말도 되고, 또는 ‘분할 통치를 하는 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역사에 기록된 그는 대체적으로 무난하게 통치를 했지만, 복음서에는 그가 세례 요한을 목베어 죽이고(마 14;1-12, 막 6:14-29, 눅 9:7-9),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예수님을 만나 군인들과 함께 희롱했던 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눅 23:8-12).

마태가 기록하고 있는 세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요한의 죽음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고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져서 분봉왕 헤롯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다는 사실에 더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즉 당시에 복음의 퍼지는 정도가 갈릴리 지역의 한 무리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헤롯에게싸지 그 소문이 퍼져서 들리는 양상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3-12, 헤롯의 반응에 대한 보충 설명으로서의 세례 요한의 순교 이야기)
3-5절은 헤롯이 자신의 불의한 일에 대해서 바른 소리를 냈던 세례 요한을 체포하여 감옥에 구금하여 죽이고자 하지만 민중을 두려워 하여 죽이지 못했다는 내용이며, 6-11절은 세례 요한이 처형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으며, 12절은 요한의 제자들이 시체를 장사한 후에 예수님께 그 사실을 고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4절에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라는 문장에서 ‘말하다(헬, 엘레겐)’라는 말은 과거의 일이 반복되어 발생하는 미완료 능동태입니다. 헬라에서는 과거에 단 일회적으로 일어난 일을 묘사할 때는 부정과거형을 사용하는데, 본문에서는 미완료를 사용했다는 것은 세례 요한이 왕에게 계속 말했다는 것입니다. 즉 세례 요한이 간음을 하였으며 정당한 사유없이 부인을 버리고, 형제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취한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헤롯의 범죄를 한번만 지적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하여 지적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분봉왕 헤롯이 세례 요한을 가두게 된 이유입니다.

12절의 표현은 세례 요한의 생애가 메시아 되신 예수님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암시하는 기능을 합니다. 세례 요한이 마 11:2-6에서는 한때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확신하지 못한 적도 있었으나, 결국 그의 제자들도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러 왔다는 자기들의 스승의 뜻을 깨닫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쫓는 무리 가운데 합류하였음을 암시합니다. 실로 세례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자신의 사역을 훌륭하게 마치고 역사의 장막 안으로 사라졌으며, 이제 역사의 무대에는 구속사의 주역이신 예수님 만이 남아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묵상 및 적용]
세례 요한에 대해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내용들은 ‘주의 길을 예비하러 온 자’,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사는 자’,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 자’, ‘회개하라’라고 강력하게 메시지를 전한 자 등등의 내용입니다. 보여지는 현상으로만 판단한다면 그는 주님의 평가나 사람들의 평판처럼 대단한 자요, 하나님 뜻을 감당해냈던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약간 달리해서 생각해 본다면, 즉 인간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과연 누가 그 길을 감히 선택해서 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 생애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이나 전승에 의하면 세례 요한의 사역은 대략 일년 정도이며, 어떻게 보면 짧다라고 할 수 있는 시간 동안 사역을 하다가 마케루스 성의 차가운 지하 감옥에서 홀로 고독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사람입니다. 그 죽음도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불의한 죽임이요, 무모한 도전이요, 세치 혀를 잘못 놀려서 죽을 수 밖에 없는 무가치한 죽음이라 여겨질 수 있는 죽음입니다.

‘의인의 최후가 고작 이런 것입니까?’라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위하여 자신의 유익을 조금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말하고 행동하였던 사람의 최후가 고작 악인의 흥을 돋우기 위한 구경거리로 자신의 머리를 내놓아야 하는 이런 것이냐고 따져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항변이나 세상적인 관점에서 세례 요한의 죽음을 평가하는 것은 성도의 죽음의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비롯된 어리석은 항변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항변하는 자들의 주장처럼 ‘모든 것의 끝’이나 ‘허무하고 덧 없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도에게 죽음이란 참된 해방과 안식이 영원토록 보장된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아무리 비참한 모습이나 세상적인 관점으로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 듯 보이지만 그것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성공한 것이요, 패배한 것이 아니라 승리한 것이며, 슬퍼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할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일한 시간의 길이나 그 일의 분량에 있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 처럼 짧게 사명을 감당했어도 그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예수님의 활동 무대를 만들어 놓고는 주인공의 활동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일찌감치 자리를 비켜 준 선지자요, 성도요, 우리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처럼 짧은 성도의 생애를 살았던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수 많은 순교자들 중에는 예수를 영접하고 믿은지 얼마 안되어 잡혀서 죽음을 맞이했던 이름도 모르는 수 많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왕명이나 세상의 법을 어기고 감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세상의 눈과 똑같이 성도의 인생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한 인생의 성공과 실패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했느냐, 믿음을 잘 지켜 냈는냐에 달려 있는 것이지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 크고 많은 것을 이루었느냐, 얼마나 풍족하게 쓰고 누리면서 살았느냐, 얼마나 명예와 이름을 남겼느냐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자들의 죽음에 대한 새로운 믿음의 인식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죽음이란 모든 것의 마침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해방과 영원한 안식에로 나아가는 통로이며, 하나님께 함께 하는 장소의 변화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소망하며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언제나 죽음 그 너머에 있는 참된 해방과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며 죽음에 대한 기대와 소망 가운데 살았음을 빌 1:20-21, 23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내가 그 둘(죽음과 사는것)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게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죽음의 위협이 거세질 수록 더욱 열심으로 주의 일에 힘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나, 또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가져다 주는 질병이나, 생활의 의.식.주에 대한 염려나, 앞으로의 삶에 대한 걱정이나, 세상 고난과 환난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런 것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 때문에 우리의 신앙을 놓쳐 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더욱 열심히 주를 섬기고 주께서 인도하실 우리의 앞길을 기대하면서 기도의 끈을 붙잡고,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그 어떤 때보다 말씀과 기도의 시간입니다.

“말씀으로 나를 읽고 기도로 길을 묻는다”라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세례 요한의 죽음을 다루는 말씀 앞에 숙연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죽음 앞에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없듯이 주를 위하여 한 때를 살아온 일꾼의 죽음 앞에 잠잠하여 아무 말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여! 어제 사랑하는 장로님께서 주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주일날 뵙고 어르신들을 챙겨야 된다면 주보를 챙기셨던 주의 일꾼을 주께서 먼저 데려 가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지만, 하늘에서 주의 뜻이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주의 뜻이 이루어 지게 하여 주옵소서. 특히 함께 가까이 있던 유가족들을 우리 주님께서 돌보시고 함께하여 주옵소서. 주의 위로가 아니면 눈가의 눈물을 지울 수 없으니 주께서 매순간 함께 하여 주옵소서. 성도의 죽음 앞에 살아 있는 성도들이 다시 한번 하늘을 올려다 보며 주의 다시 오심과 천국을 소망하면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죽음을 이기시고 산자와 죽은자의 소망이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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