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나눔

오늘의 말씀 묵상 2/9/2021 화요일 [본문: 마태복음 12장 1~21절]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2-09 09:09
조회
1010

2. 9. 화요일. 오늘의 말씀묵상

찬양링크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 target="_blank" rel="noopener">

[본문: 마태복음12:1-21]
1.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3.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5.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6.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7.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8.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9.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10.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1.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2.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3.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14.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15.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16.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17.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9.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1.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생명의 삶 온라인 링크] http://qt.swim.org/user_utf/life/user_print_web.php

[본문이해]
11장이 메시아에 대한 올바르지 못한 반응을 제시한 후에 겸손하게 메시아를 수용하는 올바른 반응으로 마감한다면, 12장은 올바르지 못한 반응으로 안식일 논쟁과 귀신을 쫓아내는 논쟁과 표적 논쟁을 통해서 성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올바른 반응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반응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가 교훈이 됩니다.

(1-8)
1-2절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은 제자들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비난이며, 3-6절은 구약의 경우를 예로 들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동에 대한 변호이며, 7-8절은 바리새인들의 영적 무지에 대한 책망 및 안식일의 주인으로서의 자기 선포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과 함께 밀밭을 지나가시는데 제자들이 시장하여 밀 이삭을 잘라먹은 것을 두고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고 항의합니다. 이것이 안식을 논쟁의 계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항의에 대해서 두가지를 지적하십니다.

첫째는 다윗의 경우 시장할 때에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음(삼상 21:1-6)으로 율법을 어겼다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예수님의 지적에 의하면 ‘사람이 굶주리면 금지법이라도 범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며, 또한 ‘사람이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법을 어겨도 되는가?’를 바리새인들에게 되묻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 예수님의 질문에 그들이 ‘그렇다’라고 대답하면 사람들이 급할 때에는 성경의 규정을 얼마든지 어길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행동에 대해서 구약성경 어디에서도 정죄하고 있는 부분이 없으므로 주님의 질문에 바리새인들은 대답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다윗의 예를 통해서 율법 이해의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사장 외에는 진설병을 먹을 수 없다(레 24:8-9에 의하면 12지파를 상징하는 성소에 진열해 놓은 12개의 떡은 매 안식일 마다 한번씩 교체해야 했고, 교체되어 나온 진설병은 아론 계열의 제상장만 먹을 수 있습니다)”라는 것은 제사와 관련된 규정이지만, ‘다윗이 시장하여 그 진설병을 먹은 것’은 자비와 관련된 것이라는 관점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6:6에 하나님께서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라는 말씀을 인용하시면 자비와 제사가 충돌할 경우 자비가 우선이라는 원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제자들이 시장하여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은 것은 안식일 규정보다 자비의 원리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논리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5절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예외법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해가 되기 쉽게 현대로 생각하면 ‘범인을 추격하는 경찰이 교통법규를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라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즉 안식일의 기본법은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10)’의 내용이지만, 그 안식일에 제사장들은 제사를 드려야 하므로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성전에서 예배하는 일을 위한 행위는 안식일 규정에 위반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식일의 법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자신이 ‘성전보다 더 큰 자’라고 말씀하시며 “성전 안”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기에 주님과 함께 있는 자들이 행한 행동은 예배의 주체가 되시는 분과 함께 있는 것이요, 만나는 것이기에 죄로 성립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신성시하는데 바리새인들이 생각할 때에 예수님은 나사렛 목수의 아들에 불과한데 주님이 성전보다 크다고 말씀하시니 아마 기가 막힐 노릇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주님의 대답은 14절에 신성모독으로 판단해서 예수님을 죽일 논의로 이어지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안식일 논쟁을 통하여 저자 마태는 참 안식일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며,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주일을 지키는 성도들의 마음가짐에 도전을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모든 날의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또한 주일의 주인이시기도 합니다. 주일을 지키는 원리는 주인 되시는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중심으로 주일을 지켜야 하는 것이며, 제사보다 자비가 우선한다는 원리 하에서 주일을 지켜야 하며, 다음에 나오는 손 마른 자를 고쳐 주시는 사건을 통해서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라는 원리에 따라 지켜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9-13)
본 단락은 안식일의 치유에 관한 논쟁으로 손 마른 자를 치유하시는 이 사건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은 사건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답변이며, 동시에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라는 질문에 대해 답변하시며 고쳐 주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질문에 도리어 질문하시므로 답변을 하십니다. 즉 ‘구덩이에 빠진 양을 구하겠냐?’라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사람들은 “예”라고 답변할 수밖에 없는 질문입니다. 이런 당연한 사실에 근거하여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귀하냐?”라고 질문하시므로 그들의 입을 막으시고, 안식일에 양은 구덩이에서 건져내면서 사람은 왜 병에서 치료하지 못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는 것이라고 매듭을 지으면서 병을 고치는 행위가 선을 행하는 것이므로 옳은 것이라고 논쟁을 마무리 하십니다.

(14-21)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논쟁에서 예수님의 논리를 반박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의견이 자신들이 지금까지 지켜왔던 기존의 관념들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죽일 의논을 합니다(14절). 자기 자신의 고정관념이 문제가 있을 때에는 자기반성과 자기혁신을 통해서 개선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고정관념’이라는 말 자체가 의미하듯이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전통과 관념에 도전하는 예수님을 제거하기로 잘못된 결정을 하고 만 것입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의 흉계를 아시고 그곳을 떠나 사람들의 병을 치유해 주시면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16절)”고 경계하십니다. 주님의 경계하심은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그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한 사람들이 자신을 병만 고쳐주는 ‘기적을 행하는 선지자’로만 보아서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성인 ‘메시아’이심을 오해하는 것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사역은 정치적 메시아도 아니고, 기적을 행하는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이 땅에 오셔서 그 뜻을 행하는 참된 메시아로서의 사역입니다. 참된 메시아, 곧 그리스도로 이 땅에서 사명을 마칠 때까지의 과정 속에서 사람들의 오해를 막으시겠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을 나타내지 말라는 메시아 비밀(Messianic secret)에 관한 주님의 경고의 말씀은 오해하는 자들에게는 바로 깨달을 때까지 은닉하시고, 깨닫는 자들에게는 더 깨닫도록 하시며, 동시에 깨달을 수 있는 때까지 기다리시는 계시의 원칙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주님은 직설적 말씀 외에 비유로 말씀하셨고,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도 때가 되었을 때에 비로소 말씀하신 것입니다. 단지 대중의 인기와 기대에 부합되는 승리의 메시아로 드러나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의 메시아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순종의 메시아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본 단락에서 마태는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을 ‘여호와의 종’에 관한 이사야 42:1-7의 예언의 내용 중에서 인용하여 본문 17-21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묵상 및 적용]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2000년 전의 바리새인이나 종교지도자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해석과 적용에 반박할 수 없기 때문에 분해서 받아들이지 어려운 점도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6절에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당시의 종교적 환경 속에서 예수님의 주장은 개혁적이거나 혁명적이기 보다는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혁명가인가? 개혁자인가?”를 논하는 책을 예전에 읽은 적이 있습니다. ‘혁명’이란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서 국가의 기초, 사회의 제도, 경제의 조직을 근본적으로 고치는 것”을 뜻합니다. 만약 예수님을 혁명가라고 말한다면 주님의 삶과 말씀, 그리고 행동들이 이스라엘 나라의 사회제도, 경제조직, 정치질서, 그리고 나라의 근간을 이룬 법, 즉 율법을 뜯어 고치기 위함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혁명가’의 길은 아니라, “급진적이거나 본질적인 변화가 아닌 새롭게 고침”을 뜻하는 ‘개혁’의 길과 더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선포하신 말씀이나 가르침, 그리고 행동은 혁명이 아니라, 새롭게 해석하여 참 뜻과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며, 왜곡되어 비뚤어진 노선에서 바른 길로의 방향전환이며, 밝혀지지 않은 진리를 새롭게 발견하도록 인도하시거나 때로는 강제하여 명령하시는 개혁자의 말씀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의 가르침이 당시의 상황과 배경 속에서 이미 고정관념화 된 율법해석이나 신앙관의 관점으로 볼 때 ‘혁명적’으로 보였을 수 있습니다. 사실 주님의 의도는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율법의 근본적인 의미를 가르치시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하는 것인데 사람들의 눈에 ‘혁명적’으로 보였다는 것은 그 만큼 시대적 상황이 하나님의 진리와 뜻에서 멀리 벗어나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 시대는 어떨까요? 혹시 이 시대도 2000년전의 유대 땅의 상황과 같이 하나님의 뜻과 진리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스스로가 5년, 10년, 20년, 30년, 아니 평생토록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고정화되거나, 굳어진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진리에서 벗어난 것이 혹시 있지는 않는지 말씀 앞에 비추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뜻과 진리 위에 서 있다’라는 확증은 내가 믿고 따르는 어떤 분인가로 내가 알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바르게 믿고 있는 것이 기준이요, 척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에서 인간을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개역한글, 등불)’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만, 실제로 갈대는 주로 호수나 개울가에 서식하는 식물로 그다지 유용성이 없는 식물입니다. 그런데 이런 갈대가 ‘상한 갈대’라면 불쏘시개 외에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꺼져 가는 심지’로 묘사된 인간이란 메마른 영혼이요, 열정이 식어가고 있어서 더 이상은 기대할 수 없는 인가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생을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로 묘사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를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감사한 것은 이와 같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의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사람들은 갈대를 마구 베어내고 꺽지만, 주님은 베어지고 꺾어져 버린 ‘상한 갈대’조차 불쌍히 여기시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주님은 다시 타오를 희망이 없는 꺼져 가는 등불의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인자로우신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심판의 그 날까지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를 지키시고 보존시켜서 승리케 하시는 분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라고 말했던 것처럼 이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 “우리 주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고 확증한 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말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확증하십시오. 기도하고 찬양 속에서 만난 주님을 확증하십시오. 그런 시간들을 만들어가는 시간, 시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저는 상한 갈대입니다. 꺼져 가는 심지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제 몸과 마음을 지켜 주셔서 흔들리지 않고 견고한 믿음 위에 세워 주옵소서. 주님! 우리 주변에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심지처럼 힘들고 지쳐 있고 병들어 있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저들을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시며, 치료하여 주옵소서. 자비와 인자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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