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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묵상 10/30/2020 금요일 [본문: 예레미야 52장 12-23]

작성자
KCPC ADMIN
작성일
2020-10-30 14:03
조회
667

오늘의 말씀묵상

[본문: 예레미야 52장 12-23]
12.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열아홉째 해 다섯째 달 열째 날에 바벨론 왕의 어전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13.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과 고관들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14.사령관을 따르는 갈대아 사람의 모든 군대가 예루살렘 사면 성벽을 헐었더라
15.사령관 느부사라단이 백성 중 가난한 자와 성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와 무리의 남은 자를 사로잡아 갔고
16.가난한 백성은 남겨 두어 포도원을 관리하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
17.갈대아 사람은 또 여호와의 성전의 두 놋기둥과 받침들과 여호와의 성전의 놋대야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갔고
18.가마들과 부삽들과 부집게들과 주발들과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고
19.사령관은 잔들과 화로들과 주발들과 솥들과 촛대들과 숟가락들과 바리들 곧 금으로 만든 물건의 금과 은으로 만든 물건의 은을 가져갔더라
20.솔로몬 왕이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그 받침 아래에 있는 열두 놋 소 곧 이 모든 기구의 놋 무게는 헤아릴 수 없었더라
21.그 기둥은 한 기둥의 높이가 십팔 규빗이요 그 둘레는 십이 규빗이며 그 속이 비었고 그 두께는 네 손가락 두께이며
22.기둥 위에 놋머리가 있어 그 높이가 다섯 규빗이요 머리 사면으로 돌아가며 꾸민 망사와 석류가 다 놋이며 또 다른 기둥에도 이런 모든 것과 석류가 있었더라
23.그 사면에 있는 석류는 아흔여섯 개요 그 기둥에 둘린 그물 위에 있는 석류는 도합이 백 개이었더라

[본문이해]
1-11절이 시드기야 왕의 몰락을 통해서 다윗 왕권의 최후를 기록했다면, 본 단락 12-23절은 남 유다의 백성들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성전과 예루살렘의 파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삶을 살지 못한 백성들과 다윗 왕조의 실패는 그들로 하여금 선택받은 언약 백성으로서의 특권을 모두 상실하고 심판의 잔을 고스란히 마셔야만 했습니다.

13-14절에서는 다윗 왕조의 수도인 예루살렘 성의 파괴를 묘사하고 있으며, 15-16절에서는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흩어짐을 경험하게 되는 백성들의 모습을 예언하고 있으며, 13, 17-23절에서는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이며 백성들에게는 언약의 유효성의 가시적인 상징인 성전의 파괴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진실로 원하신 것은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라고 그들의 입술로만 고백하면서 안정과 평안을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언약이 요구하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 안에서의 안정과 평안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언약을 스스로 깨버리고 천국백성의 생활을 포기한 결과는 유다 백성들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해 왔던 성전과 예루살렘의 파괴로 막을 내리고 맙니다.

12절의 “느부갓네살 왕의 열아홉째 해 다섯째 달 열째 날”은 태양력으로 BC 586년 7월, 또는 8월 10일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본절과 병행 구절인 왕하 25:8에서는 ‘열째 날’이 ‘칠 일’로 다르게 나와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선발대의 도착시점과 주력 부대의 도착 시점 사이의 간격으로 볼 수도 있고, 도착 시점과 건물을 불사르고 성벽을 허문 시점 사이의 차이로 볼 수 있습니다.

15절의 “백성 중 가난한 자”와 16절의 “가난한 백성”은 내용상 서로 충돌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15절에서 가난한 백성들을 포로로 데려 갔다고 했는데 16절에 가난한 백성으로 하여금 농부가 되게 했다라는 말이 충돌하여 어떤 말이 맞는지 정확하게 의미를 파악하기 까다롭습니다. 하지만 히브리 원문에 나오는 전치사 ‘민(min)’라는 단어가 ‘전체 중 일부’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므로 포함하여 직역하면 두 구절의 번역은 “백성 중 가난한 자 중 일부”라는 뜻과 “가난한 백성 중 일부”라는 의미가 되므로 충동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21-22절에 등장하는 ‘규빗’이라는 단위는 일반적으로 가운데 손가락 끝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입니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 길이가 달라질 수 있고 시대나 지역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들면 학자들이 제시하는 기준치도 52.5cm, 49.5cm, 45.6cm, 44.7cm, 44.5cm 등등으로 차이가 많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때 만들어진 실로암 터널에서 발견된 비문에서 1200규빗이라 적혀있고, 실제 측량해 보니 이스라엘 기준의 규빗이 45cm에 근접하므로 계산에도 용이한 45cm를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23절의 “석류”는 솔로몬의 성전을 아름답게 장식했던 것입니다. 석류의 원산지는 팔레스틴 땅이 아니라 페르시아와 그 주변 나라들로 알려져 있지만, 신 8:8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부터 이미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구약성경 28번이나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이스라엘 땅에서도 구할 수 있었던 과실이었음을 뒷받침 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대제사장의 의복의 장식에도 사용되며(출 28:33, 34), 성전 기구의 장식(왕상 7:18-20, 왕하 25:17)에 석류가 사용되었습니다.

[묵상 및 적용]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에 매주 제한적인 요즈음과 같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과 성도의 교제가 간절하니 함께 모일 수 있는 교회가 주는 위로와 은혜에 잊고 있던 감사를 뒤늦게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들에게 성전이 주는 의미는 우리들 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했던 성전에서까지도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예례미야 시대에 그가 경고하며 드러내고 있는 메시지에서 성전은 더 이상 하나님의 거룩한 집이 아니요, 이미 더러워질대로 더러워진 언약을 깨버린 사람들의 악독함을 반영하는 상징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울러 성전은 백성들이 얼마나 불신앙과 교만함, 회개하지 않는 고집스러움에 빠져있는지를 반영하는 상징물이 되어 버리고 만것입니다. 당시에 유다 사람들은 우상을 성전에서 숭배하는 등 악행을 저질렀으면서도 자신들이 아무리 범죄하더라도 하나님 임재의 상징적 처소인 성전이 있는 한 예루살렘은 함락당하지 않을 것이란 미신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전의 기구들과 장식들이 하나 하나 탈취당하면서 그 아름다움과 위상이 추락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과 사랑하는 백성들이 서로 만나서 교제하는 임재의 자리인 성전까지도 불살라 없앰으로써 그들의 성전에 대한 미신적 신앙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지를 철저히 각인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들의 조상들에게 했던 약속들을 붙들고만 있었지 그 언약이 요구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삶을 살아내지 못하거나, 포기한 결과입니다. 어쩌면 포기보다는 알면서도 육신의 쾌락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아 갔었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예루살렘의 멸망이나 다윗 왕조의 패망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말씀이 요구하는 삶과 관계없는 삶을 살아가면 성전이나 교인이라는 신분 그 자체로는 우리에게 어떤 것도 보장해 주지 않음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미 선지자 예레미야는 7:3-4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서 성전을 향하여 ‘여호와의 전’이라고 말하는 것을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서 이렇게 말하면 성전을 ‘도적의 굴혈’로 취급하는 것이라고 렘 7:11에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과 그 배경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분노를 바라 보면서 안타까움과 두려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나는 어떠한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스스로에게 던져지면서 얼굴색이 붉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속에 한 줄기의 소망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파괴를 보면서 유대인의 심정에 절망할 수 있고, 또한 성전의 기구들과 장식들이 바벨론으로 옮겨지는 것에 울분을 토할 수 있지만, 성경의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과 귀환의 역사를 알기 때문에 깨닫게 된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파괴는 절망적이지만 성전의 기구가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에 소망이 있습니다. 성전 기구가 파괴되지 않았다는 것은 성전 제사가 다시 회복될 것이라는 소망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에 대해서 예레미야는 27장 22절에 “그것들이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내가 이것을 돌보는 날까지 거기에 있을 것이니라 그 후에 내가 그것을 올려와 이 곳에 그것들을 되돌려 두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고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성전 재건축이 허락되었을 때에 에스라 1장의 기록들에 의하면 고레스 왕이 여호와의 성전 기구들과 그릇들을 꺼내어 포로에서 귀환할 때에 가지고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말씀 묵상을 마무리 하면서 아버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음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심판과 진노의 잔이 지난간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직접 인도하시는 회복과 은혜의 강이 흐른다는 것을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가 보여주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시공간을 울리는 큰 소리로 쩌렁쩌렁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금 겪고 있는 현실 상황 속에서 오늘의 말씀이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면서 위로와 용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힘들어도 어려워도 아버지 하나님을 꼭 붙들고 믿음으로 견고하게 자리를 지키면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역사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주께서 기억하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지워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베푸신 은혜와 구원의 역사를 찬양합니다. 하루 하루의 삶 속에서 최선을 다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시고 말씀을 붙들고 용기를 갖게 하시고 연약한 이웃들을 주의 이름으로 위로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임마누엘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찬양: “여호와의 유월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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