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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묵상 8/28/2021 토요일 [사사기 10:10-18]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8-28 08:53
조회
88

8. 28. 토요일. 오늘의 말씀묵상

찬양링크 “동행”: https://youtu.be/OkfQL1Mv9qE

[본문: 사사기 10:10-18]
10.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
11.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12.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
13.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14.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하신지라
15.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고
16.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17.그 때에 암몬 자손이 모여서 길르앗에 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자손도 모여서 미스바에 진을 치고
18.길르앗 백성과 방백들이 서로 이르되 누가 먼저 나가서 암몬 자손과 싸움을 시작하랴 그가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 하니라

[본문이해]
[10-16, 배교에 대한 이스라엘의 회개와 여호와의 책망]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김으로 범죄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스라엘 구원하신 사건들을 말씀하시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른 신을 섬긴 것을 책망하시며 더 이상 구원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섬긴 우상들에게 구원을 요청해 보라고 말씀하시며 우상의 헛됨을 지적하시고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을 거듭 질타합니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뉘우치고 구원을 간구하며 이방신을 없애고 여호와를 섬기기 시작하니 이를 보신 여호와께서 그들의 고통을 보시고 동정하시게 됩니다.

10절, “범죄하였나이다”: “범죄하다”라는 말의 기본형 “하타”는 단순히 세상의 제도권에 의해 정해진 법을 어기는 것을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범죄’란 그 의미가 ‘길을 잘못 가다, 목표를 빗나가다’라는 뜻이므로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따라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가지 않고 정도를 벗어나 다른 길로 걸어가는 것이 ‘범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2절,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 본문에 표현된 “시돈 사람”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지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습니다. 다만 삿 4:2-3의 가나안 왕 야빈을 가리키는 정도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빈의 근거지였던 가나안 북부는 시돈으로 불리워지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빈의 학대를 여사사 드보라를 통해서 구원하셨습니다. “아말렉 사람”은 미디안 족속 및 동방 족속과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괴롭혔으나 기드온에 의해 격퇴된 족속입니다(삿 6:3-4). “마온 사람”에 대해서 ‘마온’이라는 말이 갈렙 족속의 인물로도 나오고, 유다 지파가 물려 받은 지명으로도 나오고, 사사시대 이후의 기록인 역대기에는 모압과 암몬과 함께 이스라엘을 공격한 부족으로도 등장합니다. 하지만 사사시대를 고려할 때에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LXX)에 “마디암(Madiam)”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기드온에 의해 아말렉 사람과 함께 격퇴된 ‘미디안 족속’으로 추정됩니다.

16절,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이 단어의 히브리어 원형 “케레브”는 ‘중앙’이란 뜻으로서 사람의 집단이나 사회 구조의 내부를 의미하기도 하며(레 20:3, 신 26:11), 사람의 중심이나 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렘 9:8).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 있었던 우상들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 속에 있었던 우상까지도 정리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우상을 제하여 버린다’라는 표현을 썼을 때는 일반적으로 우상 숭배의 장소와 제의 도구를 모두 파괴하는 과정을 동반합니다. 이러한 방법을 고려해 볼 때에 지금까지 섬겼던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기 위하여 공들여 지은 신전이나 우상들을 부수고 훼파하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결단이었을 것입니다.

16절, “여호와께서…마음에 근심하시니라”: “근심하다”라는 말의 히브리어 기본형 “카차르”의 원래 의미에는 시간이나 거리가 짧아진다는 뉘앙스가 있으며, 민 11:23, 사 50:2에서는 이 단어가 수사적 표현으로 ‘여호와의 팔이 짧다’라는 뉘앙스로, 미 2:7에는 마음이 성급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본문에서는 ‘마음’과 연결되어 직역하면 ‘마음이 짧아졌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이 짧아진다는 것은 일종의 비유적 표현의 ‘신인동형론적 표현’으로 하나님의 마음이 걱정으로 조마조마하고 견딜 수 없게 되었다는 뉘앙스이기에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17-18, 암몬과 이스라엘의 대치]
그 때에 암몬 자손이 요단 동편의 길르앗에 진을 치고, 이스라엘 자손은 미스바 곧 길르앗 라못에 진을 치고 서로 대치합니다. 길르앗 백성과 방백들이 암몬과의 전쟁에서 선두에 나서는 자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삼겠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17절, “암몬 자손”: 암몬 자손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둘째 딸의 자손들로서 근친상간에 의해 생겨난 족속입니다. 롯의 둘째 딸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낳고 ‘내 친척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벤암미”로 불렀으며(창 19:38), 그가 바로 암몬 조곡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조상 아브라함과 롯의 관계를 생각하여 가나안 정복 당시에는 암몬 족속을 공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als 21:24, 신 2:19, 37). 그렇다고 해서 암몬 족속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을 만큼 정결하거나 하나님을 잘 믿은 족속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밀곰”이라고 불리는 자신들의 우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부정한 우상을 지속적으로 섬겨 오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속적으로 괴롭혔습니다. 결국 사사 시대에 패역하였던 암손 자손은 입다에 의해 참담한 패배를 당합니다.

[묵상 및 적용]
오늘 본문에는 사사기 11장에 사사 입다가 등장하기 전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방 민족의 손에 붙여 징계하시기로 시기로 작성하십니다. 어찌나 하나님의 분노가 컸는지 본문 13절에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15-16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회개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들의 삶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던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으로 돌아오니 “여호와께서 마음에 근심하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3절의 “다시는 구원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다짐하신 하나님께서 마음에 번민하시며 근심하신다는 표현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분일까요? 그러나 13절과 16절의 표현은 모순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자기 백성이 범죄하고 그 범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는 공의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그 백성이 죄에서 돌이키고 다시 여호와의 마음에 합한 모습으로 돌아오면 받아들이시는 것도 바로 ‘하나님의 공의’의 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대로 모든 것을 결정하시고 추진하시는 폭군과 같은 분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죄에서 돌이켜서 의롭고 바른 길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노하신다면, 그것은 공의로운 하나님이 아니라, 자비가 없는 전제주의 폭군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감찰하셔서 받아 주시는 분이시며,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자비가 있으며, 그 분의 본성 가운데 부인할 수 없는 성품인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개혁을 보셨으며, 그들의 곤고함을 불쌍히 여기시며 근심하신 하나님께서 암몬 자손이 길르앗에 진을 치고 공격 태세를 갖추는 것을 허용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를 받아 주셨다면, 외적의 침입을 막아 주셔야 하지 않았을까요? 물론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분히 그럴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심판이나 징계를 하실 때 허용하셨던 이방 민족의 침략을 허용하셨을까요?

이 질문의 대답을 묵상하다 보니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며, 사람을 세우시는 세밀한 모습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 암손 족속이 쳐들어와서 대치한 상태가 되었을 때, 18절에 “길르앗 백성과 방백들이 서로 이르되 누가 먼저 나가서 암몬 자손과 싸움을 시작하랴?”라는 자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사사기 11장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표현이며, 당시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 속에서 질문을 통하여 하나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누가 선봉이 되어서 싸울 것인가?’라는 이 질문은 ‘그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요소를 담고 있는 말로서 당시 이스라엘이 처한 형편과 처지에서는 매우 심각한 질문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이스라엘의 형편과 처지에서 그 일을 감당할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는 뜻이 되며, 또한 과연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인가에 대한 길르앗 백성과 방백들, 그리고 나아가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의구심’이며 ‘한탄’이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난관에 봉착했을 때에 해결책을 쉽게 찾아 내거나, 그 일을 충분하면서도 능히 감당할 사람을 당연하게 떠올릴 수 있다면, 난관은 더 이상 ‘어려운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길르앗 백성과 방백들이 “누가 싸울 것인가?” “누가 없을까?”라고 질문을 던졌다는 것은 난관을 헤쳐 나갈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한 것이며, 적합한 인물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캄캄한 어둠 속에서 단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을 만큼 힘들고 어려울 때에 가장 간절한 것은 바로 ‘빛’ 입니다.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는 빛! ‘걸을 수 있다’는 소망을 갖게 하는 한 줄기의 빛이 가장 간절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12에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능력과 결단이나 결심만으로는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따르거나, 도저히 약속과 계명을 지켜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가 가득한 이 땅에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 빛은 작은 고을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아주 비천한 곳에서 시작했지만 하나님의 뜻과 그 분의 사랑을 펼치는데에 전혀 부족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충분하고 완전하셨습니다.

어둠에서 빛을 고대하듯이, 오늘 본문에서 “누가 먼저 나가서 싸울 자가 없을까?”라는 막연한 소망의 질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방백들과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제시하는 인물을 간절히 소망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서 충분히 상상할 수 있듯이 현재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을 위해 나가 싸울 사람은 다른 사람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특별한 재능이 있거나,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이스라엘 사람들과 방백들이 당연히 그 사람을 떠 올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여러분~ 드디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인물을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 제시하셨습니다. 바로 “입다”라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제시한 문제 해결사, 한 사람의 사사를 백성들은 간절한 소망 가운데 기다렸습니다. 우상을 제거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토록 이스라엘을 구원할 인물을 기대하고 고대하고, 또 기다렸는데 등장한 인물 입다는 어떤 사람입니까?

사사기 11:1절은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름아닌 기생의 아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삿 11:2에는 길르앗의 정실 부인의 아들들이 기생의 아들 입다를 쫓아내면서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라고 집에서 쫓아낸 사람이며, 삿 11:3에는 집에서 쫓겨난 입다는 잡류들(방탕한 자들, 인생의 목적이나 방향이 없이 사는 자들)들과 어울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만약 입다와 같은 조건을 가진 사람이 여러분 공동체의 지도자가 된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아마 그런 인물을 지도자로 허용하는 사람은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더우기 요즘 사회에서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정말 엄격한 과정을 거쳐서 임명을 받거나 그 자리의 직임에 오르게 됩니다. 청문회를 하기도 하고, 대중 매체의 기자들에 의해서 신상이 탈탈(?) 털리기도 합니다. 그렇게 엄격하게 공동체로 부터 검증을 받은 후에 지도자의 위치에 서거나, 직임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제시한 입다라는 인물은 우리의 상식적인 사고를 뛰어넘는 사람이었습니다. 재주가 비상하거나 탁월했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적인 기준에서 너무 형편없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가까운 자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을 다시 한번 묵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할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간절한 질문에 대한 해결책을 주신 ‘입다’라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세우시는가를 다시 한번 분명하게 우리에게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세우시고 쓰시는 하나님의 방식은 무엇일까요? 첫째, 삼상 16:7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은 결코 사람의 외모를 취하시는 분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고전 1:27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라고 말씀하시며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고후 4:7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시며 질그릇과 같이 투박하고 연약한 존재이지만 능력이 하나님께 있으므로 감당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입다 뿐만 아니라, 사사기에 등장하는 사사들은 한 가지 공통된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셨을 때에 힘과 능력을 발위했다는 점입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능력이나 조건이 사명을 감당하고, 난관을 헤쳐나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함께 하셨을 때에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도대체 누가 우리의 인도자가 될 것인가?’라는 질문이 있다면, 그 대답을 오늘의 본문에 비추어 대답한다면 매우 간결합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사람” 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의 깊은 수렁, 지속되고 있는 어려움과 고난, 해결되지 않는 난관과 회복되지 않는 육신적인 연약함들을 해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키워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두 글자로 “동행”이라 말합니다. 지난 세월 우리와 동행하신 하나님! 어두운 시절에도 우리를 떠나지 않고 한 줄기 빛을 비추어 주시면 동행하신 하나님!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외면치 않으시고 동행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다가올 미래에도 늘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기도]
나의 구원자 되신 여호와 하나님!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듯이 나의 삶도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세상을 향하여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나와 늘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따스한 주의 온기와 나와 똑같이 내 옆에서 땅을 내딛는 주의 발자국 소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영적으로 깨어 있게 하옵소서. 오늘 우리 주변에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간절히 필요한 영혼들이 있사오니 저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주께서 함께 하여 주옵소서. 주와 동행함에 치유가 있고, 회복이 있고, 해결의 열쇠가 있음을 믿사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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