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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묵상 8/17/2021 화요일 [사사기 6장 33-40절]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8-17 09:07
조회
156

8. 17. 화요일. 오늘의 말씀묵상

찬양링크 “나는 믿네”: https://youtu.be/HkAYK8Ln7VY

[본문: 사사기 6:33-40]
33.그 때에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요단 강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
34.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35.기드온이 또 사자들을 온 므낫세에 두루 보내매 그들도 모여서 그를 따르고 또 사자들을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 보내매 그 무리도 올라와 그를 영접하더라
36.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37.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38.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찍이 일어나서 양털을 가져다가 그 양털에서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39.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쭈되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원하건대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40.그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

[본문이해]
[33-35, 미디안 연합군과 기드온의 군사 소집]
미디안 연합군이 요단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칩니다.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임하여 그가 나팔을 불어 아비에셀 가문이 다 모여서 그를 좇습니다. 그리고 기드온이 사자를 므낫세, 아셀, 스불론, 납달리에 보냈더니 그 지파들이 기드온을 좇았습니다.

33절, “이스르엘 골짜기”: 이 골짜기는 갈릴리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을 구분하는 계곡으로 그 뜻은 ‘씨를 뿌리다, 심다’라는 의미의 동사 “자라”라는 히브리어와 ‘하나님’을 의미하는 “엘”이 결합된 말로서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심으신다”라는 뜻입니다. 한글성경은 “골짜기”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넓은 평지로 이루어져서 ‘에스드라엘론’ 또는 ‘므깃도 평원’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스르엘 골짜기는 물이 풍부하여 팔레스탄인에서 가장 비옥한 지억이기도 하며, 애굽으로부터 갈릴리와 수리아를 거쳐 베니게에 이르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여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종종 등장합니다. 미디안, 아말렉, 그리고 동방 연합군이 요단을 건너와 이런 전략적 요충지에 전초 기지로 세움으로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기선을 제압하고, 원활한 공격과 재정비를 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한 것입니다.

34절, “나팔”: 이 단어의 히브리어 “쇼파르”는 ‘수양의 뿔’을 가리킵니다. 고대 근동 사람들은 수양의 뿔을 잘라 나팔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나팔’로도 번역됩니다. 나팔은 국가적인 중요한 절기(시 81:3), 왕이 등극할 때(왕상 1:34), 대적이 쳐들어 올 때(렘 4:19, 겔 33:4), 군사를 모집할 때(느 4:20, 삿 3:28), 전쟁 시작의 신호를 알릴 때(수 6:20, 삿 7:19) 등등에 사용되었습니다.

35절, “므낫세, 아셀, 스불론, 납달리”: 기드온은 일차적으로는 나팔을 불어 오브라 성읍에 있는 아비에셀 족속의 군사를 모집했습니다. 그리고 나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곳에는 따로 전령을 보내 모병합니다. 자기가 속한 므낫세 지파 뿐만 아니라, 이스르엘 골짜기 주변과 북쪽에 거주하는 스불론, 납달리, 아셀 지파입니다. 이들을 모집 대상으로 삼은 것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인근 지파였을 뿐 아니라, 미디안 연합군이 있는 이스르엘 평원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전쟁의 진행 상황에 따라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지파였기 때문입니다.

35절, “그 무리도 올라와 그를 영접하더라”: 본문의 “영접하다”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리크라탐”의 의미는 한글성경의 표현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뜻은 “만나다”란느 의미로 직역하면 “그 무리가 그를(기드온) 만나기 위하여 올라왔다”라는 뜻입니다.

[36-40, 승리의 확신을 위한 기드온의 표적 구함]
기드온이 하나님께 타작 마당에 양털 한 뭉치를 두어 양털에만 이슬이 있으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확신하겠다고 말하며 표적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요청에 그대로 응답하셔서 아침에 양털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할 정도였습니다. 기드온이 한 번 더 표적을 구하여 이번에는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 이슬이 내리기를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요청을 들어 주셔서 양털만 마르고 사면이 다 이슬로 젖게 되는 표적으로 응답하십니다.

37절, “이슬이 양털에민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본절의 히브리어 직역은 한글 성경이 표현하지 못한 자세한 부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직역하면 “만약 이슬이 그 양털 조각의 윗부분에만 있고 그 모든 땅 위는 마르면”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양털이 놓여 있는 땅 아래 부분도 이슬 없는 마른 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땅에 놓인 양털 윗부분에만 이슬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이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표적을 체험하고, 우상을 깨뜨리고도 살아 남았고, 더우기 여호와의 신으로 충만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명을 재확인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기드온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표적을 얻어야만 사사로 출전하겠다고 할 정도로 매우 신중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소심한 기질이 있음을 볼 수 있으며, 다른 면으로는 그 만큼 당시 미디안의 세력이 너무나 강했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확실한 보증이 없이는 쉽게 나서지 못하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39절,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두 번째 표적은 자연적으로 발생하기 힘든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 표적에 대해서 양털과 땅에 이슬이 다 내렸어도 땅이 이슬의 물기를 금방 흡수하여 양털만 젖은 것으로 보일 수 있다고 의심하거나, 윽박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번째 양털만 마르고 땅은 이슬로 축축해 지는 표적은 자연 현상으로도 불가능한 초자연적인 이적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묵상 및 적용]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께로부터 사사로 부르심을 받고 아비에게 속한 바알의 단과 아세라 상을 훼파한 기드온이 침략해 온 미디안 연합군을 물리치기 위하여 이스라엘 여러 지파에서 군대를 소집하고 출전을 준비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34절에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신의 감동을 받아서 출전을 준비하고 있는 기드온이지만 객관적인 군사력을 비교해 볼 때 너무나도 열세에 있는 자시들의 처지를 알기에 승리의 확신을 가지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군대가 미디안 연합군과 싸워서 승리할 수 있는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압제에서 구원할 것인지에 대한 표적을 구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인간의 연약함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으며, 동시에 그러한 인간의 연약함까지도 이해하시고 표적을 연거푸 보여 주신느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기드온의 연약한 모습, 그리고 표적을 구하는 모습을 ‘다른 각도로 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기드온에게 두려움도 있고, 불안함도 있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승리의 보장을 더 확실히 다짐받고 싶은 의도와 마음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재 확인의 과정을 “자기 의지의 포기”의 과정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입니다.

인간은 갑자기 닥친 극한의 어려움이나 위기에 좌절하거나, 자포자기하기도 하지만, 뒤로 물러설 수 없는 배수의 진의 상황에서 때로 마지막 용기를 내기도 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곧 어차피 물러설 곳이 없고, 어차피 죽을 수 밖에 없다면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 할지라도 던져나 보자!’라고 마지막 항전의 의지를 불태우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예로 AD 598-614년까지 총 4차에 걸쳐서 중국의 수나라 문제와 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합니다. 4차에 걸친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끝나지만, 그 중에 수 양제에 의함 2차 전쟁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록들을 참조하면 수나라의 병력이 113만 3천 8백명이며, 선두와 후미의 군대 거리고 40리나 되었고, 순서대로 출발해서 마지막 부대가 나서는데 40일이나 걸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투병이 백만 대군이든, 아니면 보급군과 지원군을 합한 숫자가 백만 대군이든 학자들 마다 주장하는 바는 다르지만 수 나라의 군대의 숫자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세계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수 나라 군대의 규모에 비하면 고구려 군대는 숫자적으로 비교할 바가 되지 못했습니다. 정말 바람 앞의 등불이요, 배수진의 진을 칠 수 밖에 없는 극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데 그 상황 속에서 고구려 군은 좌절이나 절망, 패배감이 아니라, 도리어 ‘이길 수 있다’라는 용기를 갖고 똘똘 뭉쳐서 지략과 지혜와 용맹함을 갖춘 을지문덕의 지휘하에 수 나라의 최고 정예 별동대 30만 5천명을 물리치고 승리합니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으로 알려진 이 전승사에 의하면 살수(청천강)를 빠져나와 압록강에 도착한 수나라의 군인이 겨우 2,700명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극한 상황에서 인간은 용기를 내기도 하며, 그 용기가 바탕이 되어 역전 드라마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후대에 전하는 전승사들 중에서 이와 같은 ‘인간의 불굴의 의지와 용기, 최후의 도전’이 만들어 내는 빛나는 기록들은 더욱 더 반짝이며 후대에 전해지게 됩니다. 하지만, 총과 화약으로 무장된 근대식 무기가 나오기 전까지 전력상 열세인 소수가 전력 우세의 다수를 이기는 전투의 승리는 수 많은 전투의 횟수와 비교한다면 새 발의 피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만큼 전력상 소수가 다수를 이기기 힘들고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용기를 내 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용기는 최후 항전의 용기로 비장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용기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진정한 용기는 무엇일까요?

세상이 말하는 용기를 떠 올리면 ‘꺽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 굳은 의지, 죽음도 불사하는 담대함’ 등등의 수식어와 단어가 생각나곤 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굳은 의지를 내재적으로 속에 지니고 있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의지가 밖으로 ‘발휘’되어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용기를 발휘하는 자를 칭찬하고 그 사람의 굳은 의지에 갈채를 보내 줍니다. 그러므로 자기 안의 굳은 의지, 불굴의 의지를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 활용하거나, 또는 밖으로 표출하여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용기는 그 출발점이 자기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용기란 “자기 의지의 실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세상이 말하는 ‘용기’의 기본 정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기드온의 모습을 보면 전혀 ‘용기 있는 사사’의 모습이 아닙니다. 불확신에 불안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재 다짐하며 하나님께 표징을 구하는 모습은 웬지 소심해 보이기도 하고, 약해 보이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드온의 모습을 ‘다른 각도로 보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의 ‘용기’는 세상적인 관점의 용기와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이 하나님께 재확인하는 과정이 그의 불안함과 불확신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른 각도로 묵상해 보자면 “진정한 용기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자기 의지의 실현이 아니라, 자기 의지의 포기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한 기드온은 당장 나팔을 불며 군사를 모집했습니다. 그리고 군사 모집이 성공적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비록 미디안 연합군에 비하면 숫자적으로, 전력상으로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군사를 모집할 수 있다는 것은 “싸우리라!”라고 용기를 발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군사 모집은 효과적이었습니다. 아비에셀 족속이 따랐고, 므낫세, 아셀, 스불론, 납달리 지파도 동참했습니다. 기드온을 따른 자들은 전력상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발휘한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36절 이하의 기록을 보면 하나님께 표적을 구합니다. 거의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는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군사를 모집하며 “싸우리라”라고 용기를 냈던 그가 왜 갑자기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일까요?

혹시 하나님을 시험하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시험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므낫세, 아셀, 스불론, 납달리 지파들이 자신의 요청에 따라 군사들이 모여 들었고, 또 나팔 소리에 아비에셀 족속이 모여 들자 ‘그래! 이 정도면 해 볼만 하지 않을까?’라는 자신감과 지나친 자만감이나 무모한 용기에 혹시라도 빠질 수 있는 “자기 실현의 용기”에 급제동을 걸어서 “자기 의지를 포기”하는 과정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묵상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기드온은 분명히 두번의 표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이스라엘과 함께 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을 것입니다. 두번의 표적을 구하는 모습은 연약해 보이고, 불확신과 소심해 보이는 측면이 있을 수 있지만, 동시에 기드온 자신으로 하여금 모여진 이스랑레 군사력이나 자신의 사사로서의 권위가 아니라, 진정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깨닫게 해 주는 응답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정한 용기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자신의 의지와 판단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코 믿는 자의 용기란 자신의 의지를 주장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의지와 판단을 굽히지 않고 그것을 끝까지 실현해 나가는 것을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인본주의적 오만이 될 수 있는 위험성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의 용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용기는 오직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기드온 처럼 자신의 모든 의지와 판단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절대 순종하며, 하나님의 손을 힘을 빌어서 행하려고 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자신의 의지와 판단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 용기있는 자이며,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런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시몬이 눅 5:5에서 예수께 말하기를 “주님,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그물을 내리면 수고를 했어도 얻은 것이 없지만, 당신의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대답했듯이 인간적인 계산에 의한 생각과 판단을 따르거나, 인간의 굳은 의지를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의 뜻을 따르는 참 용기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오늘 하루도 주님만 바라 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주님, 하루, 일주일, 한달, 일년,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감당하기에 힘든 어려움들이 밀려 왔는데 물러나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래도 믿음 안에서 주님만 바라 보기를 원합니다. 내 의지를 실현하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믿음의 사람 되게 하여 주옵소서. 찬양의 가사처럼 내게 허락하신 시련을 통해 나의 믿음 더욱 강하게 자라나게 하옵소서. 험한 산과 골짜기 지나는 동안 주께 더 가까이 나를 이끌어 주옵소서. 주의 능력으로 내 삶이 새롭게 되기를 믿사오니 나로 하여금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믿음으로 연약함과 시험을 이기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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