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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묵상 8/12/2021 목요일 [사사기 5장 1-18절]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8-12 09:45
조회
214

8. 12. 목요일. 오늘의 말씀묵상

찬양링크 “나의 하나님”: https://youtu.be/h5BE5uLNwYc

[본문: 사사기 5:1-18]
1.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이르되
2.이스라엘의 영솔자들이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3.너희 왕들아 들으라 통치자들아 귀를 기울이라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4.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
5.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니 저 시내 산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도다
6.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길의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
7.이스라엘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쳤으니 나 드보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되기까지 그쳤도다
8.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그 때에 전쟁이 성문에 이르렀으나 이스라엘의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던가
9.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10.흰 나귀를 탄 자들, 양탄자에 앉은 자들, 길에 행하는 자들아 전파할지어다
11.활 쏘는 자들의 소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물 긷는 곳에서도 여호와의 공의로우신 일을 전하라 이스라엘에서 마을 사람들을 위한 의로우신 일을 노래하라 그 때에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도다
12.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너는 노래할지어다 일어날지어다 바락이여 아비노암의 아들이여 네가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갈지어다
13.그 때에 남은 귀인과 백성이 내려왔고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용사를 치시려고 내려오셨도다
14.에브라임에게서 나온 자들은 아말렉에 뿌리 박힌 자들이요 베냐민은 백성들 중에서 너를 따르는 자들이요 마길에게서는 명령하는 자들이 내려왔고 스불론에게서는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들이 내려왔도다
15.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 하니 잇사갈과 같이 바락도 그의 뒤를 따라 골짜기로 달려 내려가니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
16.네가 양의 우리 가운데에 앉아서 목자의 피리 부는 소리를 들음은 어찌 됨이냐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
17.길르앗은 요단 강 저쪽에 거주하며 단은 배에 머무름이 어찌 됨이냐 아셀은 해변에 앉으며 자기 항만에 거주하도다
18.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납달리도 들의 높은 곳에서 그러하도다

[본문이해]
[1-5, 드보라와 바락의 승전가 서문]
시스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날에 드보라와 바락이 승전을 기념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 찬양을 합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앞장서고 백성들이 기꺼이 전쟁에 참전할 수 있도록 역사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외칩니다. 열방의 왕과 통치자들에게 찬양하는 소리를 들으라고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진군하실 때 하늘과 땅, 그리고 모든 산들조차 진동하였다고 웅장하게 찬양합니다.

1절, “드보라와…바락이 노래하여 이르되”: 본문의 내용을 근거로 하면 드보라와 바락이 함께 부른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실제로 5장 전체의 내용을 통해서 보면 드보라의 노래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노래하다”라는 동사가 여성 3인칭 단수형으로 노래의 주체자는 여성 한 명임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또한 5장에 등장하는 “내가”, “나” 등등의 인칭대명사가 모두 드보라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절에 드보라와 바락이 함께 노래한 것으로 표현한 것은 바락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화답송의 형식으로 노래를 불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절, “이스라엘의 영솔자들이 영솔하였고”: 본문의 “영솔하다”라는 말의 히브리어 “파라”는 ‘인도하다, 영솔하다’라는 뜻으로 쓰인 용례가 구약성경에 없습니다. 히브리어 사전이나 70인역, 그리고 몇몇 학자들이 이 말은 ‘(머리를) 풀다’라는 의미에서 유래된 말이며, 명사로 쓰인 ‘영솔자’는 ‘머리를 풀어헤친 자’라는 뜻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힘을 발위하다, 힘을 과시하다’라는 의미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머리를 풀어 헤친 자’라는 의미가 구약 성경에서 힘을 과시하거나 발휘하는 행위로 사용된 용례가 없고, 또 전쟁에 나가면서 머리를 풀고 나갔다는 전승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힘든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학자들은 본문의 ‘영솔자’ 또는 ‘영솔하다’라는 “파라”라는 단어의 유래를 전사의 용맹함이나 힘을 과시하거나, 또는 인도자, 지도자의 의미로 생각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나실인의 행위와 관계가 있다고 주장합니다(민 6:1-8). 왜냐하면 나실인은 구별됨의 표시로 머리털을 자르지 않고 길게 자라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이해하기를 전쟁에 나가는 자들이 나실인과 같이 하나님께 구별되게 자신을 드렸다는 ‘헌신’의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솔자들이 영솔하였고”라는 의미는 ‘이스라엘의 헌신된 지도자(영솔자, 나실인 처럼 머리를 길게 푼 자들)들이 헌신할 때(영솔하였고, 머리를 풀 때)’란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즉 ‘지도자, 즉 헌신자들이 먼저 헌신하므로 백성들도 즐거이 헌신하게 되었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2절,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헌신하다”의 히브리어 “뻬히트낫데브”는 ‘자원하다’(출 35:21), ‘즐거이 드리다’(대상 29:17)란 뜻을 가진 동사의 재귀형입니다. 재귀형이기에 강요당하지 않고 자유 의사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전투에 참여했음을 의미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전력상으로 볼 때 시스라의 군대를 도저히 이길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일만 명의 이스라엘 군대는 믿음 안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헌신이 바탕이 되었기에 즐거이 자원할 수 있었으며, 자원하는 마음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4절,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에돔의 자손들의 족보를 말할 때에 창 36:30에 의하면 세일은 에돔 땅을 가리키는 동의어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이스라엘이 에돔을 지날 때의 사건(민 20:14-21, 신 2:1, 8)을 포함해서 애돔 광야 여정의 전체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 성경에서 이러한 표현은 단지 에돔 족속의 땅에 대한 기록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거닐었던 ‘광야’ 전체를 상징하는 표현으로도 쓰여지곤 했습니다.

4절, “하늘이 물을 내리고 구름도 물을 내렸나이다”: 비가 매우 많이 왔음을 시적으로 표현한 이 문구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바로 시내산을 비롯해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 동안에 비와 관련된 사건의 기록이 성경에는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물론 성경에 기록되지 않는 사건으로 구전으로 내려온 출애굽 이후의 사건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개연성을 제외하면 본문의 기록은 아마도 드보라가 시스라와의 싸움에서 있었던 21절의 “기손 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라는 기록처럼 비가 내려서 철병거가 움직임을 무력화시키고 승리한 기손강 전투를 염두에 두고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5절,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니”: 본절을 히브리어 성경을 따라 직역하면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흘러내렸고”라는 의미입니다. “진동하니”의 히브리어 단어 “노즐루”는 물리적 진동을 나타내는 의미가 아니라, ‘(물이) 흐르다, 넘치다, 쏟아지다”라는 뜻으로 물이 넘쳐 흐르는 것을 묘사하는 동사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 KJV은 ‘녹았다(Melted)’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드보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산들이 마치 ‘물처럼 흘러내렸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이러한 표현은 기손강 전투에서 큰 비로 인하여 산이나 계곡에서 쏟아져 내리는 흙탕물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6-8, 과거 압제를 당하던 암담한 상황의 묘사]
압제를 당하던 시절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대로를 버리고 인적이 드문 오솔길로 다닐 정도였으며, 이방의 침입으로 황폐화되었을 때에 드보라 자신이 어머니와 같은 이스라엘의 보호자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침략의 이유는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며, 침략을 당했을 때에 이스라엘 4만명 중에 방패와 창과 같은 무기를 가진 자가 없을 정도로 무력했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6절,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삿 3:31에 의하면 삼갈은 에훗 후에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여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던 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했다는 측면에서 보면 그도 사사의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사의 활동은 “~년 동안 태평했다”라는 문구나 “사사가 된지 ~년이라”라는 활동 기간이 언습되지만 삼갈의 결우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간단한 기록으로만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삼갈의 활약은 이스라엘 전체에 영향력을 미치는 활약이 아니라, 가나안 남서부 해안을 중심으로 활동한 블레셋을 물리친 국지적인 활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삼갈과 야엘, 그리고 드보라는 에훗 이후의 동시대의 인물들입니다. 즉 삼갈이 블레셋의 학대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했다 할지라도 국지적 영향력에 그쳤기 때문에 에훗 이후에 발생한 20년간 이어진 전국적인 야빈의 학대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삼갈의 날과 야엘의 날”이라는 표현은 결국 야빈의 학대를 받았던 20년 동안의 어려운 시기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 “대로가 비었다”라는 표현에서 “비었다”라는 히브리어 “호들루”는 ‘끊어지다, 그치다, 그만두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대로”(히, 오라호트)는 고대 근동 지역의 대상이나 장거리 여행자들이 다니는 이스라엘의 주요 지역에 걸쳐 나 있는 큰 길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길들이 더 이상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길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압제로 인하여 큰 길로 다니기를 사람들이 꺼려 했거나, 또는 법질서가 유지되지 않고 파괴되어 약탈과 폭행으로 큰 길로 다니는 것을 꺼려 했거나, 또는 대로인 큰 길에 사람들이 많이 다닌다는 의미는 상인들이나 여행객들이 많아서 경제활동이 빈번하다는 의미도 되므로, 반대로 대로가 끊긴 것은 경제가 핍절하게 되었다는 의미도 됩니다. 대로의 반대 의미인 “소로”는 ‘꼬불 꼬불한 길’을 의미하며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길을 의미합니다.

7절, “이스라엘에는 마을 사람들이 그쳤으니”: 본문의 “마을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페라존”은 ‘성곽 없는 촌락, 마을의 주민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을의 주민들이 그친 이유는 성곽이 없는 마을이므로 외세의 침략이나 약탈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민들은 자신들을 보호해 줄 성곽이 있는 성읍으로 옮겼거나, 또는 이스라엘 내의 작은 마을들은 힘이 없어서 약탈이나 침략에 사실상 폐허처럼 된 상태를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8절, “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본문에 표현된 “무리”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가운데 일부 모리만이 가나안의 우상을 섬기는 타락에 빠졌다는 뉘앙스를 줍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에는 “무리”라는 표현이 없고 7절 앞에 나오는 이스라엘을 인칭대명사로 받는 ‘그가’로 되어 있습니다. 즉 우상숭배에 빠진 자들은 이스라엘 중의 일부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8절, “이스라엘의 사만 명 중에”: 시스라와의 기손강 전투에 참여한 이스라엘 군대는 일만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만 명은 어디서 나온 숫자일까요? 혹자는 이 숫자가 스블론과 납달리 지파를 돕기 위해 나선 다른 지파에서 온 원군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타당한 근거를 찾기 힘든 주장이며, 하나님의 명에 의해 일만 명을 취하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만 명이 전쟁에 참여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 숫자는 아마도 납달리 자손과 스블론 자손 가운데 당시 동원할 수 있었던 모든 군사의 대략적인 숫자를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만 명’ 중에서 ‘일만 명’ 만을 동원하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9-12, 구원하신 여호와의 의로우신 행사를 찬양함]
드보라가 헌신적으로 전쟁에 참여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치하하면서 이들을 감동시키고 또 이들을 통해 승리를 주신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빈부 귀천을 막론한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승리를 선포하는 찬양에 동참하라고 전하며 압제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게 하신 하나님의 구원 행동에 대해 찬송할 것을 촉구합니다. 승리의 두 주역인 드보라는 자신을 더욱 각성하여 하나님을 찬송할 것을 스스로 촉구하고, 바락에게는 승리의 기쁨과 아울러 포로를 확실하게 포로를 끌고가는 사후 처리를 강조합니다.

9절, “방백을 사모함은”: 방백이란 ‘법을 세운 자, 다스리는 자’를 뜻하며 당시의 군사적 지휘관들을 언급하는 말입니다. 또한 “사모함은”으로 표현된 말 “레”는 전치사로 “~을 향하여”라는 표현인데 한글성경이 의역하여 번역한 단어입니다. 드보라의 마음이 이스라엘의 지휘관들을 향했다는 말은 곧 드보라가 그들을 귀하게 여겼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 이유는 지휘관들의 헌신과 열심이 지극했기 때문이며, 병력과 무기에서 크나큰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향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신한 방백들이기 때문입니다.

10절, “흰 나귀를 탄 자들, 양탄자에 앉은 자들, 길에 행하는 자들”: 세 부류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당시에 나귀는 타는 것은 귀족들의 여행 수단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매우 귀하고 값비싼 흰 나귀를 탄다는 것은 지도층이나 최상류층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양탄자에 앉은 자들은 부자들이나 중상류층을 의미하며, 길에 행하는 자들은 일반 서민들이나 하류층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드보라는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구원하신 여호와를 전파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1절, 활쏘는 자들의 소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물 긷는 곳에서도”: 본문의 표현 중에서 “활 쏘는 자들”이라는 번역은 매우 난해한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여러 번역성경들이 서로 다양한 뜻으로 다르게 번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의 히브리어 분사 “메하체침”의 의미는 ‘나누는 자들, 분할하는 자들’라는 의미로서 영어성경 NASB는 ‘(가축 떼를) 나누는 자들’로 원문대로 번역하고 있고, 히브리어 사전 중에 Gesenius 사전은 ‘(전리품을) 분배하는 자들’로 번역하고, 또 다른 히브리어 사전 Holladay은 ‘(물을) 분배하는 자들”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RSV는 ‘악사들의(of musicians)’로 번역하고, NIV는 ‘노래하는 자들의(of singers)’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KJV과 한글성경은 유대 전승과 아람어 성경 Targum을 따라 “Archers(활 쏘는 자들)”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의 학자들이 동의하는 본문의 번역은 문맥으로 볼 때에 여호와의 공의를 전파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활쏘는 자들의 소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물 긷는 곳”을 공의가 실현되야 하는 장소로 볼 때에 이스라엘의 대적 곧 하솔 왕 야빈의 군대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활 쏘는 자들’을 히브리어 원문을 따라 “나누는 자, 분할하는 자’로 직역하여 본문을 ‘야빈과 시스라의 군대가 이스라엘의 물 긷는 우물들을 점령하고 그곳에서 노략한 전리품들이나 가축 떼를 나누면서 웅성거리던 그들의 소리와 시끄럽게 울어대는 가축 떼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곳’에 여호와의 공의를 전하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는 동시에 이미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었으므로 더 이상 노략한 전리품이나 가축 떼를 나누는 소리가 없을 것이며, 우물을 차지한 대적자들이 없으므로 마음껏 물을 길으러 가도 된다는 의미도 됩니다.

[13-18, 야빈와 시스라의 군대와의 전쟁에 대한 각 지파들의 태도]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함께 시스라의 군대를 치기 위해 기손강으로 향하였으며, 여호와께서도 이스라엘의 대적을 치기 위해 함께 하셨음을 밝힙니다. 에브라임, 베냐민, 므낫세, 스불론, 잇사갈 지파가 전투에 참전하여 열심히 싸웠음을 밝힙니다. 하지만 르우벤, 길르앗, 단, 아셀 지파는 참전하지 않았음을 비난하며 밝힙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는 생명을 아끼지 않고 전투에 참전했음을 칭송합니다.

14절, “에브라임에게서 나온 자들은 아말렉에 뿌리박힌 자들”: 전쟁에 참여한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경은 원래 아말렉 족속이 거주했던 지역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14절, “베냐민은 백성들 중에서 너를 따르는 자들이요”: 본문에서 “너”는 앞에 나오는 에브라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따르다”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직역하면 “베냐민은 에브라임 백성 중에 섞였으며”라는 표현입니다. 즉 본문에서 베냐민 지파가 에브라임 지경내에 있었다는 것은 곧 베냐민 지파에서는 소수의 병력만 참가하여 군대 편성상 에브라임 지파에 포함되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14절, “마길에게서는 명령하는 자들이 내려왔고”: 창 50:23, 민 26:29-33에 의하면 마길은 므낫세의 아들이고 그에게서 므낫세의 온 지파가 나왔기 때문에 ‘마길’은 곧 ‘므낫세’를 지칭하는 말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므낫세 지파는 요단 서편과 요단 동편에 나뉘어 거주하였으므로 전투에 참가한 므낫세 지파는 서편에 거주한 지파라 볼 수 있으며, 동편 므낫세 반 지파는 17절에 의하면 참전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5절, “잇사갈과 같이 바락도 그의 뒤를 따라 골짜기로 내려가니”: 본문의 번역은 영어성경들 마다 서로 다른 해석을 하기 때문에 영어 성경의 표현이 통일되지 않아 난해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의 직역은 “잇사갈이 (드보라와 함께 했던 것과 같이) 바락과도 함께하여”라는 의미입니다. NIV에서 “Yes, Issachar was with Barak, rushing after him into the valley”라고 번역하므로 원문의 의미를 가장 잘 살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잇사갈은 하나님의 사사인 드보라의 따라 전쟁에 참여한 것이며, 동시에 드보라의 뜻을 따라 바락과도 함께하여 전투에 참여한 것입니다. 시스라의 군대와의 전투에서 싸움을 직접 지휘한 군대의 총지휘관은 바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 했다는 점은 그녀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실질적인 지휘관으로, 또 하나님의 사사로 인정했음을 표현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락과 함께 하면 그냥 인간의 군대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사사와 함께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싸우는 ‘여호와의 군대’가 되이기 때문입니다.

15절,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도다”와 16절, “네가 양의 우리 가운데에 앉아서 목자의 피리 부는 소리를 들음은 어찌 됨이냐”: 본문 “르우벤 시냇가”라는 말은 비교적 시내가 많았던 요단 동편의 지경에 거주한 르우벤 지파의 지경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르우벤 지파가 전쟁에 참여할 것인지에 대해 큰 논의가 있었음을 나타내지만, 16절 말씀의 표현이 목축을 하는 일상생활에 대한 질책이기에 결국 불참을 결정하고 자기 생활에 안주해 버린 안일함과 무책임을 역설적으로 강력하게 질책하는 말입니다.

17절, “길르앗은 요단 저쪽에 거주하며”: 민 26:29, 30, 수 17:1에 의하면 사람으로서의 길르앗은 마길의 아들이며, 므낫세의 손자로서 길르앗 족속의 조상이 됩니다. 또한 지역으로서의 길르앗은 요단 동편의 야르묵강과 아르논강 사이에 위치한 지방으로서 이 지방을 차지한 갓 지파, 또는 그 중심 성읍이 바로 길르앗입니다. 때때로 길르앗은 요단 동편에 거주한 이스라엘 지파를 지칭하기도 합니다. 본문에서는 앞에 이미 르우벤 지파가 언급되었으므로 르우벤 지파를 제외하고 므낫세 반 지파와 갓 지파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7절, “단은 배에 머무름이 어찌 됨이냐”: 단 지파는 지중해 연안을 서쪽 지경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단 지파의 지역에는 욥바 항을 중심으로 페니키아나 다른 나라들과 해상 무역을 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본문에서 “배에 머물렀다”라는 표현은 르우벤 지파가 양떼를 치는 일상 생활에 안주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단 지파 역시 하나님을 위한 싸움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자기들의 생업에만 매달렸음을 표현하는 말이라 볼 수 있습니다.

17절, “아셀은 해변에 앉으면 자기 항만에 거주하도다”: 아셀 지파 역시 항구에서의 생업에 종사하고 있은 채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표현하고 있는 말입니다.

[묵상 및 적용]
오늘의 본문은 시스라의 군대를 물리쳐서 승리한 기손강의 전투 승리를 기점으로 20년간 지속된 가나안 왕 야빈의 압제를 끝내고 여호와의 구원을 찬양하고 선포하는 여선지자 드보라의 찬양시입니다.

드보라가 누구입니까? 그녀는 구약성경에 드물게 등장하는 여자 리더들 중에 한 명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였다고는 하지만 고대 근동 지방의 시대적 정서로 볼 때에 여자가 뭇백성들의 위에 선다는 것은 용납되기 어려운 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를 놓고 볼 때 드보라는 이스라엘의 지도자 역할을 어느 누구보다도 훌륭하게 수행해 냈습니다.

여선지자 드보라처럼 인류 역사 속에 빛나는 여자 지도자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들 중에 중세 프랑스의 쟌 다르크가 있습니다.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고 백년 전쟁에 참여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샤를 7세가 프랑스 국왕이 될 수 있도록 도왔던 공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1430년 5월경에 잡힌 쟌 다르크는 잉글랜드 종교 재판에서 반역과 이단으로 사형 언도를 받아 화형에 처해져 죽는데 그 때의 나이는 만 19세였습니다. 그녀의 사후 25년 후에 다시 종교 재판이 열려서 그녀에게 씌워졌던 모든 혐의가 벗겨져서 무죄라고 판명되었고, 프랑스의 국민들은 그녀의 정신과 행동을 기려 영웅으로 기리게 되었으며, 로마 카톨릭에서는 1920년에 성인의 반열에 올렸습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프랑스의 영웅 쟌 다르크와 여선지자 드보라를 비교해 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명의 걸출한 여자 리더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공통점이 있다면 두 사람 모두 나라를 구하기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쟌 다르크도 천사를 통한 신의 음성을 듣고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한 사람이며, 드보라 선지자도 하나님께서 사사로 부르시고 세웠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나안 왕 야빈에 맞서 전쟁에 참여하였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차이점이 있습니다. 쟌 다르크는 직접 칼을 들고 나섰던 것이며, 드보라는 전투에 나서지만 직접 칼을 들고 싸운 것은 아니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계시를 받고 전쟁에 참여했던 두 사람의 “관심이 어디 있었는가?”에 있습니다. 쟌 다르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프랑스를 구원하기 위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에 더 중요한 관심이 있었지만, 여선지자 드보라의 관심은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가르치는 것’에 더 중요한 관심이 있다는 점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여선지자 드보라의 관심은 전쟁에서의 승리 보다도 ‘하나님이 말씀에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관심은 승리나 패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에 주된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의 말씀 선포를 살펴 보면 어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패망을 선포하기도 하고, 포로가 될 것을 선포하기도 하며, 적국에게 대항하기 보다는 오히려 순응하여 따르라는 식의 말씀을 선포하기도 합니다. 외양적으로 보면 결코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를 위한다고 볼 수 없는 예언이나 말씀을 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선지자의 ‘관심’이 나라나 국가, 민족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라나 민족의 패망을 선포하면 그대로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전하는 사람이 바로 선지자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여선지자 드보라는 프랑스의 영웅 쟌 다르크와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물론 드보라의 기록을 담고 있는 사사기에서는 승리하는 선지자로 기록되었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드보라에게 예레이먀 선지자처럼 나라의 패망과 포로됨을 선포하라고 했다면, 드보라 선지자는 주저함이 없이 그대로 전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연약한 자를 들어 큰 일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큰 일”이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말하며, 세상적인 기준에서 볼 때의 ‘좋은 것, 유익한 것, 무조건 이기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연약한 우리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는 것은 선지자의 사명과 똑같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승리에 있으면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망하는 것에 있으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성도에게 있어서 승리는 방패와 창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기준에서 승리와 성공을 원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직’이라고 말씀하시면 기다려야 하며, 때로는 연단 속에서 인내하면서 참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스가랴서에서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말씀하셨듯이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라는 말씀처럼 세상의 기준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수 많은 믿음의 선진들에게 말씀하시고 뜻을 이루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의 승리가 뜻을 이루고 목적을 이루고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참 승리요 성공임을 믿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와 주의 뜻이 이 땅에, 그리고 나의 삶 속에 임하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고, 세상 부귀와 명예는 사라지지만 오직 하나님의 뜻과 말씀은 사라지지 않고 이루어짐을 믿습니다. 아버지! 우리 안에 살아갈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을 더하여 주옵소서. 거룩히 살아갈 힘을 주시며, 두렴 없는 믿음을 주셔서 세상을 이기는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연약한 우리를 세우셔서 영육간에 강건케 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승리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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