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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묵상 8/7/2021 토요일 [사사기 2장 11-23절]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8-07 08:55
조회
121

8. 7. 토요일. 오늘의 말씀묵상

찬양링크 “My Life is in Your Hands”: https://youtu.be/2bINXSDgb5s

[본문: 사사기 2:11-23]
11.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12.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13.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14.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넘겨 주사 그들이 노략을 당하게 하시며 또 주위에 있는 모든 대적의 손에 팔아 넘기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하지 못하였으며
15.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니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16.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사 노략자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으나
17.그들이 그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며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길에서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더라
18.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들을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거늘
19.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욱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그들의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20.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명령한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였은즉
21.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이방 민족들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22.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23.여호와께서 그 이방 민족들을 머물러 두사 그들을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셨으며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 주지 아니하셨더라

[본문이해]
[11-15, 이스라엘의 범죄와 여호와의 징계]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바알과 아스다롯 등의 가나안의 신들을 섬기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진노케 합니다. 진노하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대적의 손에 붙여 노략질 당하게 하시고 대적을 이기지 못하게 하시며, 징계로 재앙을 내리시니 이스라엘의 괴로움을 심하게 당합니다.

11절, “바알들을”: 한글성경에 복수형으로 표현된 것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바알 신은 당시 가나안 땅에 있었던 대표적인 신들 중에서 남성 신으로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던 우상입니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 “합베알림”은 정관사와 결합된 강조를 위한 복수의 용법으로 “가장 위대한 주”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어가 복수 용법으로 쓰였다고 ‘많은 바알들”이란 의미로 바알이 여러 명이라고 보기 보다는 가나안의 가장 높은 우상으로 대지의 신, 번개를 몰고 다니는 신으로 “신들 중의 신”임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당시 바알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신들이 각 지역마다 있었다는 시대적 배경의 상황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3절, “아스다롯”: ‘번영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아솨르”에서 유래하여 ‘증가, 번식, 번영’이란 의미의 아스다롯은 근동에서 풍요와 번식을 위한 여신으로 믿어졌습니다. 근동의 우상 숭배자들은 가문의 번성과 재산의 증가를 위해 아스다롯을 섬기는 신전에서 그곳의 신천 창기들과 성적 타락의 의식을 가졌으며, 바알 신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처럼 성적으로 타락한 이방 종교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신앙적인 죄악과 더불어 실제로 간음을 하는 도덕적인 죄악까지도 자연스럽게 행하게 된 것입니다.

15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법도에서 떠나 죄에 빠졌을 때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레위기 26:14-46과 신명기 28:15-6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6-19,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타락과 범죄의 반복, 그리고 사사들의 등장]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노략자들의 손에서 구원하시려고 사사를 세우셨으나 이스라엘은 사사들의 말도 듣지 않고 계속 우상을 섬기며 믿음의 길에서 떠납니다. 이스라엘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로움을 당하여 슬피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사사를 통해 구원해 주시지만, 구원자인 사사가 죽으면 또 다시 돌이켜 더 심하게 다른 신을 섬기는 패역한 행위를 반복합니다.

16절, “사사”: 한글성경에 “사사((士師))”로 번역된 히브리어 “쇼페팀”은 ‘재판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솨파트”의 분사 복수형으로 명사적 의미를 갖고 있으며, 복수형으로 표현되어 있으므로 사사가 한 두 명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었음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사”는 문자적으로 ‘재판하는 자, 재판관(judge)’이라는 뜻이 됩니다. 당시 사사의 역할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분쟁을 재판하고 쟁론을 그치게 하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군사 지휘관의 역할을 가지고 대적들의 공격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는 역할까지 담당했습니다.

17절, “그들에게 절하여”: 12절에도 표현되어 있는 이 문구는 히브리어 “절하다(히, 솨하)”라는 말의 동사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강조하며 뜻하는 재귀 용법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절하는 행위가 타인의 강요나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절했다”라고 직역할 수 있는 의미입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활했던 광야와 비교해 볼 때 물이 넉넉하고 땅이 기름지며 목초지가 많고 농사가 잘 되는 땅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주민들은 그 땅에서 풍요를 누리는 원인이 바람과 비를 주관하는 바알 신과 풍요를 주관하는 아스다롯 여신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그러한 사상을 흡수했으며 이제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 그들에게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는 신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그들 스스로 결단을 내리고 이방 신들을 숭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물질적인 풍요를 위해 탐심을 품었으며, 가나안의 발전된 문화를 동경하여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받아들이는 우상 숭배의 길을 스스로 선택한 것입니다.

17절, “속히 치우쳐 떠나”: 이 문구의 히브리어 “싸루 마헤루”의 의미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순종하였던 길을 따라 계속해서 걷지 않고, 그 길 밖으로 ‘빠르고 급속도록 벗어나다’라는 의미입니다.

18절,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 한글 개역 성경에는 한 사람의 사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시간적 의미로 오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원문의 직역은 “그 사사의 모든 날”이라는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어떤 한 사사를 세우시고 사사로 부름 받아 활동하던 모든 날을 가리킵니다. 즉 사사의 직분을 감당하는 기간을 뜻합니다.

18절,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거늘”: 이 문구의 히브리어 표현은 한 단어로 “네아카”라는 말로 성경에 단 4번만 사용된 단어입니다. 2회는 애굽의 압제하에서 고통에 신음했던 이스라엘 백성이 냈던 신음으로 출 2:24, 출 6:5에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겔 30:24에 죽음을 눈앞에 두고 고통이 심해 낼 수밖에 없는 ‘고통의 소리’를 묘사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으며, 그리고 마지막은 오늘 본문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용례들을 볼 때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대적자들의 견디기 힘든 핍박과 압제에 직면하여 고통과 신음이 범벅이 된 소리로 울부짖는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절박한 심정이 담긴 고통에 징계의 뜻을 돌이키시사 구원해 주시는 자비로운 성품을 가지신 분임을 저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곧 본문은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은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분이 아니라, 도리어 징계의 목적이 오직 이스라엘로 하여금 악에서 떠나도록 하기 위함이므로 그 뜻이 이루어지면 뜻을 돌이키셔서 마음을 거두어 구원을 베푸시는 분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20-23, 가나안 족속의 일부를 남겨 이스라엘을 시험하시는 여호와]
진노하신 여호와께서 불순종한 이스라엘 앞에서 가나안 족속을 모두 쫓아내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밝히십니다. 이것이 또한 여호수아로 하여금 가나안 족속을 신속하게 다 멸망시키도록 하지 않으신 이유라고 밝히십니다.

20절, “명령한 언약”: 언약을 번역된 히브리어 “베리티”은 1인칭 단수 접미어가 붙어서 그 의미를 직역하면 “나의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자신의 언약이라고 칭하십니다. 왜냐하면 언약의 제안자도 하나님이요, 지키며 성취하시는 분도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언약은 쌍방간에 맺어진 것이지만, 그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언약을 설명하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었다’라는 뉘앙스의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명령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그 당시 백성들에게 출 34:11-17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절대로 가나안 족속들과 언약을 맺지 말고, 그 신들에게도 절하지 말며, 그들의 문화를 따라 살지도 말라고 엄히 명령하셨습니다.

21절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이 문구에는 하나님이 가나안 주민들과 족속들을 쫓아내지 않겠다는 의미와 더불어 그 땅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온전히 소유하여 상속케 하지 않겠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경고대로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래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 땅 모두를 상속받지 못하고 일부만을 정복합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의 지경은 다윗 왕 때에 가서야 완전히 정복하게 됩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21세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나안 땅은 여전히 가나안 부족들의 남아 있는 후예들과 외부로부터 유입된 민족들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그 땅을 차지한듯 보일뿐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채 분쟁의 씨앗이 남아 있는 땅이 되고 맙니다.

22절,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신다는 표현이 죄악을 행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람이 시험에 들어 죄를 범하는 것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과 욕심에 끌여 미혹되기 때문입니다(약 1:4). 그러므로 본문에서 하나님이 시험하신다는 것은 마치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두고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셨던 것처럼, 사사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사람들을 따라 우상을 숭배하는지, 아니면 사방에 우상이 넘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만을 향한 믿음과 충절을 지키는지 두고 보신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로 적용하면 우리 환경 가운데에서 죄악을 근절하지 않으시고 남겨 두신 이유가 그런 환경 속에서 우리가 주를 향한 믿음의 절개를 지키는지 아니하는지 두고 보시는 것과 같은 것이며, 이를 통하여 자기 백성을 연단 시키시고 성숙하게 하시기 위함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묵상 및 적용]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 우상을 섬겼다고 본문 11-13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게 되었다는 점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의 민족으로서 존립하게 된 원인이 여호와 하나님께 있었으며, 또한 그들의 민족적 자존심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근거도 바로 천지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주관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이라는 사실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이처럼 그들의 존재 원인이며, 민족적 자부심의 근거하 되시는 하나님을 마치 헌신짝 버리듯이 버리고 사람이 만든 우상에 불과한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긴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을 오늘날 약간 상황을 바꾸어 적용해 보면, 때때로 사이비 종교나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회적 엘리트 그룹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에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배울만큼 배우고, 가질 만큼 가지고 있으며, 누릴 수 있을 만큼 누리는 사람들이 뭐가 부족하다고 상식적으로 도덕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사이비 교주의 말에 현혹되고, 이단에 빠지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그 이유는 거짓 종교일수록 사람에게 매혹적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종교에는 사람을 유혹하는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알은 가나안 땅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신으로 비와 폭풍우를 주관하는 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스다롯은 바알신의 여성 파트너로서 사랑과 전쟁의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사람들은 이 신들이 서로 교합할 때 농토가 비옥해지고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위하여 제사를 지낼 때 그 신들을 서로 교합시키기 위하여 자신들이 먼저 그 앞에서 성적 행위를 자행하였습니다. 인간의 모습을 보고 신들이 성적 충동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가나안 신들의 제사라는 것이 어떠했겠습니까?

이처럼 가나안의 신들인 바알과 아스다롯 숭배는 육체적인 쾌락과 함께 현세적인 축복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매혹적으로 다가왔으며, 한 두번 경험하면 육체적 타락과 함께 벗어나기 힘든 중독과 같은 수렁에 빠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또한 거짓 종교는 기독교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지 않고, 우상을 통해서 혹은 마술과 속임수를 통해서 직접 자기들의 신을 보여주는가 하면, 미래의 영원한 축복이 아니라 현세의 기쁨과 쾌락과 축복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육체적 쾌락을 우상과 함께 누리는 것을 추구하기에 기독교처럼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부패한 인간의 부도덕한 삶을 장려하고, 변호하므로 적당히 죄를 묵인하며 종교 생활을 한다는 점에서 유혹의 매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거짓 종교와 우상 숭배가 사람들에게 매혹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믿음과 현세적, 육체적 쾌락을 단호히 거절하는 결단력이 없는 사람들은 쉽게 거짓 종교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미혹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는 사사시대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은밀하게 또는 공공연하게 드러내 놓고 활개를 치는 사이비 종교들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성도는 골로새서 3:1-2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라고 말했듯이 땅의 것을 바라보지 말고 하늘의 것을 바라보며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호세아 선지자는 호 4:11-12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라고 말하며 현세적인 축복은 언제가는 반드시 소멸되며 정도를 벗어난 육체적인 쾌락은 결국 우리를 멸망에 이르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쉽고 편안 것이 아니라, 옳고 바른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은 옳은 것 보다는 편안 것, 자신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는 것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쉽게 편하다고 해서 모두 진리는 아니며, 우리 눈에 그럴듯하게 보인다고 해서 모두가 옳은 것은 아닙니다. 일찍이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다고 하여 이를 먹음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죄의 길에 들어서고 말았었습니다.

그러므로 날이 갈수록 쉽고 편안 것, 눈에 그럴싸하게 보이는 것들을 추구하는 이 세상 속에서 성도는 항상 무엇이 옳고 무엇이 의로운 것인가를 질문하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답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진리와 공의를 증거하시며 빛과 소금으로서 이 땅에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 그리고 그 분을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공의로운 길에 생명의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잠 12:28)라고 말씀하고 있음을 믿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쉽게 편하고 보기에 좋은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비록 좁은 길이라 할지라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어도 참 구원의 길을 가는 결단과 믿음의 용기가 있기를 바랍니다(마 7:13-14).

[기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도록 역사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로우심과 은혜에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있는 죄악의 성향과 악의 유혹에 흔들려서 죄의 길을 택하는 악함을 주님!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로 하여금 세속에 물들어 영육간의 쾌락에 물들지 않게 하시며, 영육간에 좋은 것과 편안한 것을 추구하다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길에서 떠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하옵소서. 좁은 길이지만 공의로운 생명의 길을 우리에게 허락하셔서 사망에서 영생으로 인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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