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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2/20/2021 토요일 [본문: 마태복음 15장 21~28절]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2-20 08:55
조회
510

2. 20. 토요일. 오늘의 말씀묵상

찬양링크 “주의 옷자락 만지며”: https://youtu.be/_OEPhLROVq0

[본문: 마태복음 15:21-28]
21.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본문이해]
오늘의 본문은 가나안 여인의 믿음과 그 딸의 치유 사건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땅으로 들어 가셨는데 귀신 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하는 가나안 여인을 만납니다. 하지만 주님은 가나안 여인의 간청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요청까지 거절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여인의 끈질기고도 겸손하고 지혜로운 간청으로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딸을 고쳐 주시는 본문의 내용입니다.

두로는 ‘바위’란 뜻의 히브리어 ‘초르’라는 말에서 유래된 말이며, 시돈은 ‘고기 잡는다’라는 의미가 있는 히브리어 ‘치론’에서 유래된 말로서 당시에 흥왕했던 베니게의 주요 도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곳으로 가신 이유는 본문과 마가복음 7장의 병행하는 내용들을 살펴보면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때이른 충동을 피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사건과 동일한 이야기를 다루는 마가복음에는 이 여인을 ‘헬라인’,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헬라인이란 말은 혈통이 헬라인이라는 의미보다는 일반적으로 헬라어를 사용하는 이방인임을 의미합니다. 수로보니게 사람이란 민족적으로 ‘페니키아인(Phoenician)’을 가리키며 고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전에 페니키아인들도 가나안 땅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마태복음에서는 그냥 ‘가나안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 22절에 “그 지경에서 나와서”라는 표현은 이 여인이 자기 딸을 고치고자 하는 열심과 예수를 향한 신앙의 열심을 가지고 멀리서 왔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그녀는 딸을 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예수님을 의지하는 길 밖에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던 곳을 떠나 먼 길을 걸어 예수님께 나아왔던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이 용어를 사용할 때는 사용자가 예수님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면서 동시에 이 용어의 주인공인 예수님이 구약 성경에서 예언된 오실 메시아임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이 용어를 사용한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특히 당시에 유대인들이 본 15장을 읽는다면 묘한 대조법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요 성경을 잘 알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호칭도 붙이지 않고 오히려 반감을 가진 자들로 표현되고 있는 반면에 이방여인은 등장하자 마자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은 율법주의자들의 태도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이습니다.

26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라는 표현에서 자녀는 이스라엘 사람을 가리키고, 개들은 이방인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을 ‘개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심한 모멸적인 언사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예수님의 언사에 대해서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신학자들이 이런 의문에 대한 답변을 소개하면, 일반적으로 ‘개’를 뜻하는 헬라어는 ‘퀴온(kuon)’을 사용하며, 성경에 등장하는 용례를 보면 불결한 개를 가리키거나(잠 26:11), 무가치하며(삼하 9:8), 탐욕스럽고(사 56:11), 대적으로 묘사되거나(시 22:16, 20), 행악자를 가리키는(빌 3:2) 비유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퀴온’ 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대신 ‘퀴나리온(kunarion)’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개 가운데서 ‘작은 것, 귀여운 것, 사랑스러운 것’을 나타내는 단어로 우리말로 번역하면 ‘강아지’ 또는 요즘 말로 하면 ‘애완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당시에 이 단어를 선택하신 것은 지나친 모멸감을 주는 단어를 피하기 위해서라고 유추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28절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라는 표현에서 영어나 한글성경의 번역에는 빠져 있고, 대신 느낌표를 붙이는 표현으로 대신하고 있지만, 원어에는 맨 앞에 감탄사 “Oh”가 대문자로 붙어 있습니다. 즉 감탄사가 붙어 있는 헬라어 성경의 느낌은 기대를 훨씬 넘어서는 가나안 여인의 큰 믿음에 대하여 너무나 감격한 예수님의 감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묵상 및 적용]
상대방의 말 속에서 의중을 파악하여 말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 대화입니다. 대화를 할 때에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면서 말을 이어 나가야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신뢰를 쌓을 수 있으며, 서로 뜻이 통하니 오해가 생기지 않는 것이 좋은 대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예수님의 침묵을 볼 수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간청에 주님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침묵하신 대표적인 상황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이 쏟아질 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신 경우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있었던 오늘의 본문의 상황과 같은 경우에 침묵하신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즉 주님의 이러한 반응은 평소와는 다른 반응이었습니다. 평소에 주님은 대적자들인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악의적인 질문에 대해서도 대답을 하시고 질문을 하셨던 분입니다. 또한 불쌍한 사람들이나 환자들의 요청에도 걸음을 멈추시고 고쳐 주시거나 반드시 반응을 보이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이 가나안 여인에게는 침묵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그 이유를 생각하기 전에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전도자로 파송하실 때에 이방인의 길로는 가지 말 것을 명하셨고(마 10:5), 오늘 본문 24절에서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의 땅이라고 알려진 두로와 시돈, 데가볼리에 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지 말라고 하신 지역에 주님이 먼저 가셨다는 것은 매우 의도적이며, 목적한 바가 있으셔서 갔던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매우 의도적이고 목적한 바가 있다고 짐작되는 예수님의 행보가 담긴 본문의 내용이 앞선 1-20절의 내용과 묘하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앞선 1-20절에서는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라 할 수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이르러서는 유대인들에 의하여 천대받았으며 구속사의 흐름에 있어서 구약 선민 이스라엘과 대립되는 위치에 있었던 가나안 여인이 예수께 나아와 메시야 되심을 고백하고,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말하면서 도움을 요청한 것은 실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놀라운 사건인 것입니다. 메시아를 알아 보아야 하는 유대인을 몰라 볼 뿐만 아니라 배척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집의 잃어 버린 양이 아닌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메시아로 알아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리 질러 ‘주 다윗의 자손이여!’를 외친 그 여인의 부르짖음에 주님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셨습니다. 아마 가나안 여인에게 주님의 침묵은 지극히 답답하고 두려운 침묵이며, 길게 느껴진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안타깝지만 저도 모릅니다. 이 다음에 천국에서 주님을 만나면 “주님, 왜 가나안 여인에게 침묵하셨습니까?”라고 묻고 싶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을 보면 여인의 끈질긴 간청과 자신을 내려놓는 겸손의 믿음에 주님께서 치료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결과를 통해서 묵상해 본다면 저는 두 가지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첫번째는 이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함입니다. ‘믿음의 시험’이란 이 여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심심치 않게 다가오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주님! 왜 우리를 시험하셔야만 했습니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그 ‘믿음의 시험’을 지난 후에는 우리의 믿음이 단련되고 강화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의 딸을 단순히 고쳐 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인의 믿음을 확실히 하고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이 가나안 여인의 이름은 ‘유스타(Justa)’ 였고 병들었던 딸의 이름은 ‘베레니케(Berenice)’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전승이기 때문에 기록된 이름이 100% 정확한 이름이라는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여인의 딸이 치료받은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지만, 전승에는 이 여인과 딸이 주님을 믿었다는 것은 확실하며, 더 나아가서 가족과 친지,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증거자가 되는 사람으로 쓰임을 받았으므로 주님께서 ‘믿음의 시험’을 통해서 믿음을 더 굳건히 하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음을 보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두번째 이유를 더 깊이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유대인의 입장이 되어서 유대인의 감정을 공감해야 합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방인을 바라 보는 시건을 결코 곱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나 구원의 은혜가 없다라고 생각할 지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오래된 인종적 장벽, 신앙적 장벽, 그리고 지역적인 장벽을 주님이 깨뜨리시고 새로운 길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이 새로운 길은 주님과 여인과의 대화 속에서 시작되고 마무리 됩니다. 그런데 첫번째 여인의 간청에 침묵하신 후에 제자들이 여인의 ‘소리 지름’에 불편하게 느꼈는지 주님께 여인의 상황을 말했을 때에 주님의 대답은 상상을 초월하는 답변이었습니다. 바로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두번째 여인이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말하여 간청하자 더 심하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라고 답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 여인에게 언어폭력이 아닐까요? 영국의 철학자 존 오스틴은 “거친 말은 주먹을 날리는 행위와 같다”라고 말하여 언어가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말하였습니다. 지난 2016년에 중앙일보에 “거친 말, 뇌 망가뜨려 ‘생각의 감옥’에 가둔다”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언어폭력에 대한 글에 의하면 “언어폭력이 듣는 사람에게 모욕감이나 분노, 불안감, 모멸감을 일으켜 우울증, 불안장애, 인격장애 같은 정신질환을 초래하기도 하며, 급기야 자살로 내모는 사례마저 있다”라고 기사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기억에 남는 폭력은 물리적인 폭력보다 언어폭력이 감정적으로 훨씬 더 오래 남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언어폭력은 감정이 동반된 기억으로 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말을 하는 사람은 그런 뜻으로 말하지 않았는데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나쁜 감정으로 오해하여 받아들이면 그것 또한 언어폭력과 같은 해를 끼친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험한 말, 거친 말, 나쁜 말뿐만이 아니라, 말을 듣는 사람이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언어폭력이 결정되는 셈입니다. 과학자가 연구한 것에 의하면 잔소리를 계속 들어온 뇌를 MRI로 찍어서 연구해 보니 잔소리도 반복되면 받아들이는 자는 언어폭력으로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당신에게 언어폭력을 했다면 어떻게 대처하시겠습니까? 화를 내거나, 분을 삭히거나, 싸움을 하거나, 울고 상처를 받거나 할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오늘날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언어폭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을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가나안 여인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의 대답은 자기 인정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바로 “주여 옳소이다”라는 ‘주님 앞에서의 인정’입니다. ‘주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안다는 것은 마음에 담을 수 있는 여유 공간이 있는 것입니다. 밀어내고 배척하고 부인하여 스스로를 추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배울 수 있고, 오뚝이처럼 설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어지는 이 여인의 두 번째 대답인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는 답변은 ‘나는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리는 구원과 축복에 어느 정도 참여할 수 있지 않을까요?’라는 의미로 이 말에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 뿐만 아니라, 동시에 주님께서 고쳐 주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담고 있는 답변이기도 합니다. 가나안 여인이요, 이방인에게도 구원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이 여인이 메시아이신 예수님께 강력하게 당당하게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분개하고 욕을 하면서 떠나갔을 상황에 가나안 여인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대답으로 예수님께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칭찬을 받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비천한 처지를 인정하고 겸손과 하나님의 은혜를 강청했던 여인의 믿음이 구원의 문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는 이 짤막한 사건을 통해서 믿는 자에게 있는 ‘믿음의 시험’에 대해서 말했을 뿐마 아니라, 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얻게 되는지를 이야기 하면서 인종, 지역을 떠나서 이방인의 구원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당시의 유대인들이 이 본문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성경말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지울 수 없는 생각은 우리들도 이 가나안 여인과 같은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며, 이 여인처럼 우리에게도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고, 육체이든 마음이든 질병이 있으며, 이 여인이 간구했던 것처럼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는 간청을 우리도 주님께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의 믿음의 모습을 본 받기를 바랍니다. 끈질기게, 인내하면서, 주님이 우리의 상황을 바라 보시고 발걸음을 멈추시고 돌아 보실 때까지, 그리고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주의 손길을 바라는 간절함을 본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믿음의 간절함! 그리고 주 앞에서의 겸손과 도움을 확신하는 믿음의 당당함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주를 바라보는 연약한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냥 지나가시지 마시고, 주의 발걸음을 멈추시고 우리를 바라보아 주옵소서. 가나안 여인의 고백처럼 주여 우리를 도와 주옵소서. 상한 심령을 회복시켜 주시고, 육체의 상처들을 치유하여 주시고, 삶의 의식주의 염려들을 주께 맡기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믿음으로 강하게 일어서게 하옵소서. 간절히 주를 찾는 오늘의 하루가 되게 하시고, 삶이 되게 하옵소서. 죄인을 돌아보시며 구원을 베푸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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