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QT나눔

오늘의 말씀묵상 06/17/2021 목요일 [출애굽기 27:1-21]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6-17 09:24
조회
101

6. 17. 목요일. 오늘의 말씀묵상 찬양링크 “생명과 바꾼 주의 사랑을”: https://youtu.be/HMEGu5tODqc

[본문: 출애굽기 27:1-21]
1.너는 조각목으로 길이가 다섯 규빗, 너비가 다섯 규빗의 제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 하며 높이는 삼 규빗으로 하고
2.그 네 모퉁이 위에 뿔을 만들되 그 뿔이 그것에 이어지게 하고 그 제단을 놋으로 싸고
3.재를 담는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 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을 만들되 제단의 그릇을 다 놋으로 만들지며
4.제단을 위하여 놋으로 그물을 만들고 그 위 네 모퉁이에 놋 고리 넷을 만들고
5.그물은 제단 주위 가장자리 아래 곧 제단 절반에 오르게 할지며
6.또 그 제단을 위하여 채를 만들되 조각목으로 만들고 놋으로 쌀지며
7.제단 양쪽 고리에 그 채를 꿰어 제단을 메게 할지며
8.제단은 널판으로 속이 비게 만들되 산에서 네게 보인 대로 그들이 만들게 하라
9.너는 성막의 뜰을 만들지니 남쪽을 향하여 뜰 남쪽에 너비가 백 규빗의 세마포 휘장을 쳐서 그 한 쪽을 당하게 할지니
10.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받침 스물은 놋으로 하고 그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할지며
11.그 북쪽에도 너비가 백 규빗의 포장을 치되 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기둥의 받침 스물은 놋으로 하고 그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할지며
12.뜰의 옆 곧 서쪽에 너비 쉰 규빗의 포장을 치되 그 기둥이 열이요 받침이 열이며
13.동쪽을 향하여 뜰 동쪽의 너비도 쉰 규빗이 될지며
14.문 이쪽을 위하여 포장이 열다섯 규빗이며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요
15.문 저쪽을 위하여도 포장이 열다섯 규빗이며 그 기둥이 셋이요 받침이 셋이며
16.뜰 문을 위하여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수 놓아 짠 스무 규빗의 휘장이 있게 할지니 그 기둥이 넷이요 받침이 넷이며
17.뜰 주위 모든 기둥의 가름대와 갈고리는 은이요 그 받침은 놋이며
18.뜰의 길이는 백 규빗이요 너비는 쉰 규빗이요 세마포 휘장의 높이는 다섯 규빗이요 그 받침은 놋이며
19.성막에서 쓰는 모든 기구와 그 말뚝과 뜰의 포장 말뚝을 다 놋으로 할지니라
20.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21.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본문이해]
[1-8, 놋으로 만든 번제단]
가로 세로 각각 오 규빗, 높이 삼 규빗으로 조각목을 번제단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단이 네 모퉁이에는 뿔을 연결해 만들고 단을 놋으로 쌉니다. 번제단에서의 제사를 위해 재를 담는 통, 부삽, 대야, 고기 갈고리, 불 옮기는 그릇 등의 부속 기구를 놋으로 만들고, 제물을 올려 놓을 놋그물을 만들어 그물을 제단에 놓았을 때에 단 중간에 위치하도록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번제단을 옮길 수 있도록 놋으로 싼 조각목의 채를 만들라 하십니다.

1절, “제단”: 이 단어의 히브리어 “함미즈뻬아흐”는 “(동물을) 죽이다, (짐승을) 잡다, 희생하다”라는 뜻의 동사 “자바흐에서 유래된 말로 성경에는 “단, 제단, 번제단” 등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직역하면 ‘죽인 희생 제물을 바치는 제단”이란 뜻이 됩니다. 번제단의 크기는 다른 이방 신전의 제단들보다 결코 크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당시 이방 신전들의 제단들은 이보다 훨씬 큰 제단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구약 제사의 가장 기초가 되고 핵심이 되는 희생 짐승을 죽여 불태워 드리는 제단에 대한 규례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자아를 죽여 스스로 겸손하게 겸비하지 않고서는 결코 산제사의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2절, “뿔”: 제단의 뿔의 사용 용례에 대해서 성경에 표현된 기록을 잠깐 살펴 보면 시 118:27에 의하면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그가 우리에게 빛을 비추셨으니 밧줄로 절기 제물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라고 기록되어 짐승이 도살되기 전에 잠깐 동안 매여 있던 곳으로 추정되며, 왕상 1:50에 의하면 죄인들이 급히 도주하여 이 제단 뿔을 잡을 경우 그 죄인은 죽임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3절,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 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 재를 담는 통은 내다 버릴 재와 짐승의 기름 찌꺼기 등을 담아 성막 바깥 재 버리는 장소에 버리기 위한 도구입니다. 부삽은 번제단을 깨끗하게 청소하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대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우미즈레코타이후”의 원형은 ‘자라크’로서 성경에서 ‘대접, 물동이’등으로 번역되고 있는 것을 참조하여 제단에서 흘러내리는 희생 짐승의 피를 받는 물동이(KJV, RSV: basins)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기 갈고리는 번제단 그물 위에 올려진 각뜬 고기를 가지런하게 배열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삼상 2:13에 등장하는 갈고리의 표현을 참조하면 세 개의 살로 갈라진 것으로 묘사되었고 번제단 외에 제사장에게 줄 삶은 고기를 건질 때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 옮기는 그릇은 번제단의 불씨를 성막 안의 향단에 분향하기 위해 옮길 때 사용된 그릇입니다. 성소 안의 향단의 반드시 번제단의 불씨로 분향되어야 하는데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이런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여호와의 불에 의해 죽임을 당한 기록이 레위기 10:1에 있습니다. 위의 모든 기구들은 한글 성경에 단수로 표현되어서 각각 하나씩만 만든 것처럼 보이지만, 히브리어 성경은 모두 복수로 되어 있으므로 두 개 이상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4절, “놋으로 그물을”: 이 문구의 히브리어 성경에는 한글성경에 번역이 안된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쇠격자 덮개”를 뜻하는 “미크빠르”라는 히브리어 단어로 그 뜻은 넣어서 직역하면 “놋 그물 세공 격자 덮개”로 영어성경 KJV는 히브리어를 직역하고 있어서 “a grate of network of brass”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을 참조하면 그물은 희생 짐승을 얹어 좋고 불에 태우기 위해 마련된 기구로서 일종의 석쇠처럼 희생 제물의 고기를 잘 태우기 위해 그물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번제단의 기구들이 ‘놋’으로 만들어진 이유는 놋의 녹는점이 섭씨 1,083도로 매우 높은 온도에서 견딜 수 있기 때문입니다.

7절, “채를 꿰어 단을 메게 할지며”: 채란 번제단을 운반하는데 사용된 긴 막대기를 가리킵니다. 성막의 성물들 중에서 법궤, 진설병상, 번데단 등은 운반용 채로 들어 운반하였습니다. 그런데 본 절의 “메게”라는 단어는 한글성경의 표현으로 추정해 보면 어깨에 메어서 옮기는 것처럼 번역되었습니다. “메게”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삐스에트”는 ‘들어올리다, 옮기다’라는 뜻의 “나사”가 동사원형으로 ‘어깨에 메다’라는 뜻 보다는 단순히 ‘들다’라는 의미입니다. 공동번역은 ‘들 수 있게’라고 번역하고 있고 영어성경들은 “carry”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깨에 메어 옮기기 보다는 실제로 단지 손으로 들어 움직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9-19, 성막 뜰의 동서남북의 세마 포장들의 설치 규례]
성막의 남쪽과 북쪽의 포장의 길이는 백 규빗이며 각각 스무 개의 기둥과 스무 개의 놋받침, 그리고 은으로 만든 가름대, 갈고리로 되어 있습니다. 서쪽의 포장의 길이는 오십 규빗으로 기둥 열 개와 받침으로 되어 있으며, 동쪽의 포장은 오십 규빗이되, 출입문 좌우의 포장 길이는 십오 규빗이며 각각 기둥 셋과 받침 셋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막의 출입문은 이십 규빗의 길이로 청색 자색 홍색 실과 베실로 수 놓아 짜서 포장을 만들고, 기둥 네 개와 받침으로 되어 있습니다. 모든 기둥의 가름대와 갈고리는 은으로 만들고, 받침은 놋으로 만듭니다.

9절, “세마포 휘장을 쳐서 그 한쪽을 당하게 할지니”: “세마포 휘장”의 히브리어 “켈라임”은 “휘장, 포장” 등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세마포 휘장은 가는 베로 짜서 만든 포장(curtain)으로 성소와 지성소 입구의 휘장들은 삼색실와 가는 베를 꼰 실로 만들었기 때문에 다릅니다. “그 한쪽을 당하게 하다”라는 말은 “당기다”라는 뜻이 아니라, 히브리어 직역은 “그 한쪽 면을 위하여(KJV, for one side)”라는 의미로서 남쪽 한 면을 100규빗의 길이의 세마포장으로 치라는 뜻이 됩니다.

10절, “가름대”: 이 단어의 히브리어는 “와하슈케헴”인데 그 의미는 ‘결합하다, 모으다’라는 뜻으로 영어성경이나 몇몇 한글 번역성경은 “띠, 가름대” 등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출 26:26의 “띠”(히, 베리힘)라고 번역된 것과 히브리 단어는 다르지만 용도는 같습니다. 출 26장에 등장하는 “띠”를 현대인의 성경은 ‘가로대’로, 공동번역은 ‘가로지른 물건’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본절의 ‘가름대’와 같은 역할입니다. 가름대의 용도는 성막의 뜰(마당)의 기둥들을 서로서로 연결시켜 넘어지지 않고 하나로 단단하게 결합시켜 주는 용도입니다.

13절, “동쪽”: 이 단어의 히브리어 “케뎀”의 다른 의미는 “앞면”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히브리인들이 해가 뜨는 동쪽을 앞쪽으로 부르는 관습은 해가 뜨는 방향을 정면으로 보는 방위의 기준으로 삼았던 근동 사람들의 전통입니다. 이런 전통에 따라 히브리인들은 동쪽을 ‘앞면’, 서쪽을 ‘뒷면’, 남쪽을 ‘오른쪽’, 북쪽을 ‘왼쪽’으로 생각하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18절, “세마포 휘장의 높이는 다섯 규빗”: 성막 바깥쪽 세마포 포장들의 높이는 다섯 규빗(2.28m) 입니다. 다섯 규빗의 높이는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보면 높이 10규빗에 이르는 성막이 보이지만, 웬만한 거리에서 볼 때 성막 안을 쉽게 들여다 볼 수 없을 정도의 높이입니다.

19절, “그 말뚝과 뜰의 포장 말뚝”: 앞의 “그 말뚝”은 성막 본체를 덮고 있는 덮개와 웃덮개를 텐트 모양으로 고정시키는데 사용되는 말뚝들이고, 뒤에 나오는 “뜰의 포장 말뚝”은 성막 마당 뜰을 둘러 치고 있는 포장을 든든하게 고정시키는데 사용된 말뚝들입니다.

[20-21, 감람유로 밝히는 성소 안의 등불에 관한 규례]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으로 성소안의 등불을 꺼뜨리지 않고 켜 두어야 하며,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의 등불을 관리하도록 명하십니다.

20절, “순수한 기름”: 감람에서 채취한 감람유를 짤 때에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성소 등대에 사용되는 감람유는 압착기를 사용하지 않고 돌로 찧은 뒤에 그 찧어 낸 기름을 다시 바구니에 흘러내리게 하여 세미한 불순물까지 걸러내는 방식을 사용해서 추출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기름은 향품을 섞은 관유와는 다릅니다. 그 이유는 향품이 섞일 경우 기름이 잘 타지도 않고 독한 냄새를 유발할 수도 있기 때문에 관유와는 달리 어떤 향품도 섞지 않은 100% 맑고 깨끗한 감람 기름입니다.

20-21절,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저녁부터 아침까지”: 혹자는 등불을 24시간 꺼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볼 때에 저녁에 등불을 켜서 어두운 성소를 밝히고 아침에 등불을 소등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21절, “보살피게 하라”: 옛 한글성경에는 이 문구가 “간검하게 하라”라고 번역되어 있으며, 이 문구의 히브리어는 “야아로크”로서 ‘정리하다, 질서있게 정렬시키다, 베풀다, 벌여놓다’란 뜻이며, 영어성경들은 “order, keep…in order”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옛 한글성경의 번역인 “간검하다”는 ‘살펴서 검사하다’(현대인의 성경, 공동번역)라는 뜻인데 원어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등불을 보살피는 사역은 하루도 빠지지 말고 항상 등불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켜져 있도록 등불을 잘 정리 정돈해 두라는 의미입니다.

[묵상 및 적용]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예배에 대해서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성막과 성막의 여러 기구들에 대한 말씀들을 읽고 있습니다. 구약의 예배의 가장 기초가 되고 핵심이 되는 제단과 성막에 대한 규례들을 읽으면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그 분을 예배의 유일한 대상으로 알기 위해서 자신의 자아를 죽여 스스로 겸비하지 않고서는 결코 산 제사를 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바울은 로마서 12:1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우리 자신을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또한 갈라디아서 5:24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받았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의 모든 욕정과 죄와 허물을 완전한 희생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지 않는 자는 결코 산 제물이 될 수 없으며, 살아 계신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규례와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물론 성경이 예배의 방식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말씀에 비추어 반드시 따라야 할 규례들은 아무리 작게 보이고 하찮게 보이더라고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레위기 10:1에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막이 건축된 이후에 아론의 제사장 위임식을 치루 직후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분향하다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 때때로 목적을 중요시할 것인가? 아니면 과정을 중요시할 것인가?라는 주제가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목적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분향한다는 것의 목적은 향을 피우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 목적을 성취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번제단의 불씨가 아닌 다른 불로 분향하는 아답과 아비후의 과정을 악하다고 보신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악 또는 죄악”으로 규정되는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하신 대로” 했는가? 아닌가?에 있습니다.

예배와 그 예배의 의식에 관한 규례와 법도는 철저하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가 그 기준입니다. 나의 기준이나, 우리의 기준은 철저하게 배제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막과 성물들의 제작을 명하시는 말씀들 속에 오늘의 본문 출 27:8의 말씀처럼 “네게 보인 대로 만들게 하라”라는 말씀을 반복하곤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기준을 사람의 편의와 사람의 마음과 감정에 맞출 수 없습니다. 예배는 첫번째 그 기본 전제가 나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며, 두번째 이후가 나와 우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구원의 주체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자는 얼마든지 제한없이 다 나아갈 수 있습니다.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거기에는 빈부의 차이나 신분의 격차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이의 많고 적음이나 민족이나 혈통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눅 12:8의 말씀처럼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자”는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서 구원의 은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배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우리 마음대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함으로 죄악된 세상으로부터 거룩히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예배에 대해서는 선택의 여지를 주시지 않고, 명령으로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20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가져오게 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전에 하나님께서는 성막을 짓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품들과 예물들을 가져오라고 명하실 때에 조건을 내세우셨습니다. 그 조건은 출 25:2 “기쁜 마음으로 내는 자”입니다. 즉 예물의 조건은 즐거운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는 예물입니다. 히브리 단어로 살펴보면 출 25:2에서도 “명하다”라는 한글번역이 표현되어 있지만, 그 때의 ‘명하다’(히, 따바르)라는 말은 강제성이 없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출 27:20에서 ‘감람유를 가져오게 하라’라는 말씀의 “명령하다”라는 말의 히브리어 “차와”라는 말은 강력한 명령을 나타내는 강제성이 들어가 있는 의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감람유’를 가져오게 하는 말에 매우 강력한 강제성을 부여하셨을까요? 성막을 짓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오는 다른 예물들과 감람유는 성질이 달랐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막의 다른 기구들은 일회적으로 걷어서 일단 그 성물들과 기구들을 만들게 되면 거의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람 기름은 그렇지 못합니다. 기름은 다 차서 떨어지지 않도록 계속적으로 백성들이 보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처음에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름을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감람유를 채취하기 어려운 상황이 생기거나, 또는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성전의 등불이 영원토록 끊이지 않고 밝힐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명령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곧 감람유는 강제성을 두고 하나님께 헌납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산 제물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나의 상황이나, 우리의 상황에 따라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변칙적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것들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것들이 무엇일지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1년 3개월 동안 교회는 제한적 상황 속에서 온라인 예배를 드려 왔습니다. 그리고 세계의 어떤 나라들은 아직 꿈도 꾸지 못하지만, 미국 땅의 우리들은 다시 모여서 대면예배를 드릴 수 있는 감사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배의 자리로 다시 나갈 수 있다는 감사와 은혜를 마음에 담으면서 반드시 “그 예배의 자리에 가지고 나가야 할 것들”을 묵상하면 어떨까요?

예배에 참석하는 각 성도님들의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식어진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는 복음의 능력들을 재 확인하는 믿음의 결단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그 동안 오랫동안 대면하여 만나지 못했던 성도들 간의 배려의 마음과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느슨했던 마음을 일으켜서 행동으로 옮기는 부지런함과 열심과 사모함 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올 해 우리 교회의 주제처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레 11:45)라는 말씀처럼 예배자의 필수 요건 중의 하나는 “거룩함” 입니다. 모든 성막의 성물들과 기구들에 담겨있는 기본 속성에 “거룩함”이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예배자는 거룩해야 합니다.

생명과 바꾼 주의 사랑을 잊지 않고, 나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주님의 눈물을 잊지 않으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복된 예배자들이 모두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우리들도 거룩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스스로 거룩할 수 없고, 우리의 능력으로 거룩할 수 없사오니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거룩함을 덧입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들이 이제 다시 모여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예배의 자리로 나오기전에 우리의 삶과 마음을 성령께서 준비시켜 주옵소서. 그 동안 열심히 믿음으로 살았지만, 조금 더 나의 모습 가운데 있는 불경건함과 깨끗하지 못함을 정화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주님! 우리에게는 은혜가 있지만, 아직도 전 세계에 예배드릴 수 없는 수많은 지역과 민족들이 있사오니 저들의 형편과 상황을 긍휼히 여기셔서 회복시켜 주시고 주의 선하심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당신의 생명을 던져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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