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QT나눔

오늘의 말씀묵상 4/2/2021 금요일 [마태복음 27:45-56]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4-02 09:04
조회
17

4. 2. 금요일. 오늘의 말씀묵상

[본문: 마태복음27:45-56]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55.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본문이해]
(45-50,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
제 육시(정오 12시)로부터 구시(오후 3시)까지 어둠이 임하였습니다. 주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자 어떤 이들은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이 엘리야를 부른다고 오해를 하기도 합니다. 이 말의 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입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이 예수님께 신 포도주를 해면에 적셔 마시도록 시도하자 다른 사람들이 가만히 두어 예수님이 스스로를 구하나 보자고 하며 제지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크게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십니다.

46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씀에서 헬라어 성경에 마태는 앞부분의 “엘리 엘리”(Eli)는 히브리어로 번역하여 표현하였으며(아람어는 “엘로이Eloi”) 입니다. 하지만 “라마 사박다니”는 아람어 그대로 표현했습니다. 아람어의 “엘로이”를 히브리어식으로 표현한 것은 이 문구 전체가 시편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의 본문과 일치시킴으로 유대인 독자들에게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드러내고자 하여 예언의 성취를 선포하고자 함입니다. 한편 마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일곱 개의 말씀(가상칠언) 중에서 오직 네번째에 해당하는 이 말씀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48절, “해면”(헬, 스퐁고스)으로 기록된 표현은 후생동물에 속하는 해면을 가리키고 있는지, 또는 해면과 같이 물을 빨아들일 수 있는 스펀지와 같은 특성을 지닌 물건을 가리키는지 논란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해면이 실생활에서 쓰이고 있으므로 잠깐 소개하면, 해면은 동물의 분류상 가장 하위에 있는 후생동물에 속하여 감각세포나 신경세포를 가지고 있지 않고, 몸이 주머니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시리아 근해에서는 잠수부들이 직접 기구를 가지고 채취합니다. 지중해에서 잡히는 해면은 세계에서 가장 질이 좋다고 알려져 있으며, 욕실에서 사용되는 상품의 해면과 부엌에서 도구를 씻는데 사용되는 하품의 해면도 있습니다.

48절,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에서 신 포도주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일상적으로 널리 사용된 발효가 많이 된 포두주로서 식초와 같은 기능을 합니다. 신 포도주는 물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신속하게 갈증을 해소해 주는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지만 요한복음 19:30의 기록에 의하면 신 포도주를 마신 것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헬라어에서 “마시게 하거늘”라는 동사의 시제는 미완료 과거시제로 직역하면 “그가 계속해서 그에게 마시게 하고 있었다”라는 표현으로 신 포도주를 준 자가 예수께서 그 포도주를 마실 수 있도록 계속 시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거의 기력이 탈진한 상태의 예수님이 쉽게 마실 수 없기 때문에 신 포도주를 마시게 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요한복음의 표현을 참고하자만 조금 받아 마셨을 수도 있지만 입만 조금 축이는 정도에 그쳤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 포도주를 마시는 표현은 시편 69:21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라는 말씀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48절과 49절 사이에 헬라어 성경에는 “그러나”를 의미하는 단어 “데(De)”가 들어가 있습니다. 접속사를 넣어서 48절과 49절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갈증을 해소해 주려고 노력했던 ‘신 포도주를 마시게 하려는 사람’과 ‘이 행위를 저지하는 사람’으로 극명하게 대조되는 문장 구조입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표현은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을 구별하여 대조함으로 독자들에게 생각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50절, “영혼이 떠나시니라”라는 표현의 헬라어 직역은 “그가 그의 영혼을 자기에서부터 보냈다”라는 뜻입니다. 한글 개역성경의 표현은 주어가 ‘영혼’으로 되어 있으나, 원문의 주어는 ‘예수’ 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원문의 의미를 담아서 “he gave up his spirit”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성경은 예수께서 자기의 자발적 의지로 자신의 영혼을 포기한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인간의 죽음은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상태의 죽음인 반면에, 예수님의 죽음은 오히려 능동적으로 자기의 영혼을 내어 주시는 죽음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은 단지 한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스스로 내어 주신 희생적 죽음임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51-53,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 나타난 이적들)
본 단락의 이적들은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내용들입니다. 주님이 운명하시자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로 나뉘고, 지진이 일어나 바위들이 갈라지고, 무덤이 열리며 죽은 성도들이 살아나는 일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후에 다시 살아난 성도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보였습니다.

51절, ‘성소 휘장’은 출애굽기 26:31-35에 의하면 성전 안에서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는 휘장을 가리킵니다. 일년 중 속죄 제사를 드리는 대속죄일에 대제사장만이 단 한차례 열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단 한 번에 초자연적으로 완전히 찢어진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이것은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당시의 외식적인 종교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상징이며, 또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지성소가 개방됨을 의미하며, 더 근본적으로는 예수님의 몸이 찢기시는 대속의 죽음으로 인하여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막힌 담이 허물어지므로 더 이상 동물 제사를 통하지 않고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온전한 길이 열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52절,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에서 “성도”라는 표현은 신약 교회에 성립된 ‘교인으로서의 성도’ 개념은 압니다. 그 당시는 신약 교회가 성립되기 이전이므로 예수 시대 이전의 의로운 ‘유대인들, 거룩한 자들, 존경받을 만한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도’로 번역된 ‘하기온(Hagion)’라는 단어는 ‘존경할 만한,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는’이라는 뜻입니다. 마태는 자던 자들이 어떤 몸의 형태로 다시 살아났는지, 그리고 살아난 후에 얼마나 생존했는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들이 예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살아 났으며, 이러한 죽은 자들의 부활이 3일 후에 있을 예수님의 부활과 더불어 장차 온 성도들의 부활을 예표하는 실례가 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53절, “보이니라”라는 말은 본문에서는 사람들 앞에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을 사용되고 있지만, 법정에서 사용되는 다른 뜻은 “고소하다(행 24:1)”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즉 공적으로 사람들 앞에 증거하거나 드러내 보이는 것을 가리키고 있으므로 성도들이 살아나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보이므로 자신들을 포함해서 예수의 부활의 증거자들이 되었음을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54-56, 사형을 집행했던 백부장의 고백 및 목격자들)
사형을 집행했던 백부장과 예수님을 지킨 군병들이 지진 등의 발생한 일들을 보고 두려워하며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마태는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좇아온 여인들 중 몇 명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54절,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백부장과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이적의 현상들을 보고 난 후에 말한 이 표현은 마태복음 14:33에서 제자들이 물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을 목격한 사건 후에 고백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는 표현과 똑같이 일치하는 표현입니다.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23:47에서는 백부장의 고백을 “이 사람은 정년 의인이었도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두 성경의 표현을 빌면 이 백부장이 정말로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했는지에 대하여 의문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 문화에서는 황제나 사제, 또는 뛰어난 사람에게 ‘신의 아들’로 호칭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마태가 본문에 표현한 기록을 통해서 백부장이 어떤 의미에서 고백하였든지 상관없이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에게 예수님이야말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임을 밝히는 것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묵상 및 적용]
오늘은 금요일! 그리스도인들은 이 날을 ‘성금요일(Good Friday)’라고 부르곤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날의 시간대로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6시간 동안 물과 피를 쏟아 주시고, 오후 3시에 운명하신 날이기에 주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 하루를 경건하기 지내도록 더욱 힘쓰는 날이며, 금식을 하시는 분들도 많은 날이기도 합니다.

성금요일! 독어로는 ‘Karfreitag’(애도 금요일)라고 표현하고, 불어로는 ‘Le Vendredi saint’(성금요일)라고 표현하며, 영어권에서는 ‘Good Friday’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표현된 ‘Good’의 단어의 어원에는 ‘Pious’(경건한), ‘Holy’(거룩한)라는 있으므로 ‘Good Friday’는 ‘좋은 금요일’의 번역보다는 ‘성금요일, 경건한 금요일, 거룩한 금요일’라고 번역하여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까요? 매년 돌아오는 성금요일에 종종 생각나는 고민이기도 합니다. 가정과 직장과 삶의 바쁜 일상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주의 은혜와 사랑을 마음에 담고 거룩한 성도의 하루를 보내는 것은 중요한 이슈이기에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 첫번째 스텝은 ‘행동’이기 전에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루의 일상 속에 ‘묵상’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중요합니다. 생각에서부터 우리의 삶의 방향이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침에 그 시간을 갖는다면 하루의 생활의 방향이 정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의 기독교 철학자이며 저술가인 Dallas Willard는 “Salvation is not just forgiveness, but a new order of life.”라고 말하며, 구원이 우리의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새로운 명령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죄의 용서라는 측면에서 머물러 있지 않고, 새로운 삶을 향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강하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 애도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할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의 시간을 갖을 수도 있고, 찬양의 시간을 가질 수도 있고, 금식할 수도 있고, 수난에 관계된 말씀을 깊이 정독하며 묵상할 수도 있고, 일하면서 선하고 바른 생각과 행동을 힘쓰도록 다른 때보다 더욱 주의를 기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 우리 자신을 향한 하루의 삶의 문제에서 벗어나 ‘하나님은 어떻게 2000년 전에 오늘 하루를 보내셨을까?’를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이라는 오랜 역사의 시간을 걸쳐서 지속된 구원사의 과정 속에서 십자가라는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오늘 본문의 현장 속에서 무엇을 하셨을까요?

그것을 알 수 있는 본문의 단 한 마디가 있다면 바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입니다. 마태는 복음서 중에서 28장에 걸쳐서 가장 긴 분량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남기신 7마디의 말씀이라고 알려진 “가상칠언(架上七言)” 가운데 단 한 말씀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나 누가, 요한 보다도 더 많은 내용을 남길 법한데 한 마디 만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개가 갸웃거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한 마디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마음은 오늘 하루를 숙연하게 지낼 수밖에 없게 하는 엄숙함이 깃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시편 기자는 22편 1절에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My God, my God, why have you forsaken me? Why are you so far from saving me, so far from the words of my groaning?)라고 기록하면서 왜 하나님께서 낮에도, 밤에도 응답하지 않는지를 절규하고 있습니다. 이 절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절규이며 구원을 호소하는 소리입니다.

마태는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언의 성취로서의 그리스도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으며, 동시에 시편 기자의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상태를 예수님의 말씀 속에 그대로 감정이입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고, 단절되는” 고통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시 면류관에 머리가 찔리고 십자가 상에서 두 손과 두 발이 못박히는 육체적 고난, 그리고 주님의 메시야 되심을 불신하는 사람들로부터의 조롱과 멸시, 모욕을 당하는 정신적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씀은 죄의 결과인 죽음으로부터 오는 하나님과의 단절, 영적 고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죽음이란 단순하게 육체의 호흡이 멈추는 현상이 아닙니다. 진정한 죽음의 의미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이며, 단절’ 입니다. 지옥에 결코 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고통의 장소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 곳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는 곳, ‘영원한 소외와 단절’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말씀 속에는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죄를 범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 상에서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전인격적인 고난을 겪으시면서 하나님과의 소외와 단절로 인한 죽음을 절규하며 호소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평생 동안, 아니 창세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셨던 분이 ‘소외와 단절’을 절감하고 있으니 예수님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는 상상조차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똑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사랑하는 독생자를 외면해야 했고, 절규에 고개를 돌리셔야 했던 하나님의 마음을 과연 우리가 모두 이해할 수 있을까요?

비록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사랑이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라는 사도 요한의 고백처럼 “하나님이 나를, 우리를 사랑하셨구나”라는 사실만은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절규는 우리가 부르짖어야 할 절망의 절규를 대신 부르짖어 주신 것입니다. 성경에 표현되어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주님이 십자가에 있는 그 순간에 고개를 돌려 외면할 수밖에 없으셨고, 귀를 닫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녀를 먼저 보내야 하는 부모의 심정을 어떻게 글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마음을 생각하며 주의 고난을 묵상하며 어떻게 오늘 하루를 지낼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
예수님!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시고, 간고를 겪으시고, 멸시를 당하시고, 질고를 지신 주님! 그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나였음을 고백합니다.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십자가에서 주님을 조롱하고 희롱하거나 도망한 자가 바로 나였음을 고백하오니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감히 주 앞에 다시 설 수 없는 죄인을 향해 두 팔을 벌리시며 안아 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은혜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오늘 하루 주님과 동행하는 시간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과의 단절이 아니라, 하나님과 깊이 만나는 순간 순간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구원을 위해 어둠의 사망을 경험하시고 죽음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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