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QT나눔

오늘의 말씀묵상 4/1/2021 목요일 [마태복음 27:27-44]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4-01 09:10
조회
18

4. 1. 목요일. 오늘의 말씀묵상

[본문: 마태복음27:27-44]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본문이해]
(27-31, 사형이 언도된 예수님께 대한 로마 군병들의 조롱)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님을 관정으로 끌고가서 군대를 불러 모았습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갈대를 손에 들리워 왕의 행색을 갖추게 한 후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하고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치며 비웃습니다. 희롱을 마친 후에 다시 원래의 옷으로 갈아 입힌 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예수님을 끌고 갑니다.

28절 “홍포”란 ‘붉은 색의 겉옷’을 뜻하며, 당시에 붉은 옷은 왕들만이 입었기 때문에 군인들이 붉은 색의 옷을 입힌 행위는 왕의 차림으로 만들어 희롱하기 위함입니다.

29절, “가시 면류관”의 헬라어 ‘스테파노스’는 “머리를 둘러 에워 씌우는 것”이란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고전 9:25에서는 운동 경기에서 승자가 차지한 월계관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고, 계4:4과 10에서는 왕이나 통치자가 권위의 상징으로 쓰는 왕관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왕관의 의미로 군병들이 조롱하기 위해 가시 면류관을 씌운 것이며, 참기 어려운 극심한 고통을 주었을 것입니다.

31절 “도로 그의 옷을 입혀”라는 표현은 당시에 이루어졌던 십자가형의 관례에 비해 특이한 점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십자가형을 받게 되는 죄수들은 형장까지 벗긴 채로 끌려갔다는 점을 감안할 때 군인들이 다시 옷을 입힌 것은 매우 예외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본다면, 나중에 군인들이 예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게 됨으로 시편 22:18의 구약성경의 예언이 성취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참고로 십자가형은 고대 근동 여러 나라에서도 있었으나 로마 시대에 더 자주 시행되었습니다. 이는 너무나 잔인한 형벌이기에 주로 노예나 반역자들에게 시행되었고, 전시 효과가 크기 때문에 로마의 속국에서는 강도 등과 같은 범죄자도 십자가형을 받았습니다. 로마는 범죄 방지와 공권력 과시를 위해서 십자가형을 왕래가 빈번한 길 옆에서 시행하였으며, 또한 죄수로 하여금 십자가를 메고 가게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볼 수밖에 없도록 하였습니다.

(32-44, 골고다 언덕으로의 이동 및 십자가형 집행과 십자가상에서의 수욕)
사형수로서 골고다로 끌려가시는 길에 군병들이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합니다. 처형장인 골고다 언덕에 도착한 후에 십자가에 못박기 전에 마취제 역할을 하는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제공하지만 맛보신 후 마시기를 거절합니다. 군병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세운 후에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고 머리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 쓴 죄패를 붙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의 좌, 우편에 한 명씩 두명의 강도들이 함께 못박혔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예수님을 향해 지나가는 자들, 종교지도자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이 모욕을 하고 조롱을 합니다.

32절 “구레네”라는 지명은 북아프리카의 리비아 위쪽에 있던 성읍으로 추정되어 지금의 트리폴리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하지만 북부 아프리카 지명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이 구레네에서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신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구레네에서 유월절을 보내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왔을 정도로 경건했던 사람이라 추정됩니다. 병행구절인 마가복음 15장 21절에는 “알렉산더”와 “루포”라는 그의 아들들의 이름까지 등장합니다. 이런 이름의 등장으로 인해서 학자들은 구레네 시몬이 후에 기독교로 개종하여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도 잘 알려진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33절 “골고다 곧 해골의 곳”은 헬라어로 각각 대문자로 쓰였습니다. 즉 ‘골로다’란 이름과 ‘해골의 곳’이라는 이름이 모두 고유명사처럼 사용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골고다’는 아람어를 헬라어로 음역한 단어이며, 영어로는 갈보리(Calvary)이다. 오늘날 골고다의 위치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2곳이 추정되고 있습니다.

한 곳은 예루살렘 성벽 내부에 있는 오늘날의 “성묘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가 위치하고 있는 장소로서 전통적으로 갈보리라고 추정하고 있는 장소입니다. AD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에 유대인들은 전세계로 흩어지고, 로마 정부는 박해를 하면서 한때 예루살렘은 이방식 이름인 “알리아 카피톨리 나”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불리우기도 했습니다. 로마는 비너스 신전을 지으면서 유대교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려고 힘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과 함께 신앙이 독실한 그의 어머니 헬레나는 예루살렘을 직접 방문하여 골고다를 찾으라는 명령을 내려서 찾아낸 장소로 비너스 신전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이 곳에 황제는 AD335년에 성묘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묘교회는 역사의 전쟁의 상처 속에서 수차례의 붕괴와 재건을 반복하면서 현재는 카톨릭, 그리스정교회, 알메니안교회, 시리아정교회, 콥틱교회, 이디오피아 교회 등의 6개 종파가 각각 분할하여 사용하여 별도로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특이하게도 십자군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관리는 이슬람이 맡아서 해서 교회의 유일한 출입구는 이슬람교도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다른 곳은 당시의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기 위해 온 영국의 찰스 고든 장군이 예루살렘 성 밖을 거닐다가 해골의 모양과 닮은 바위와 정원을 발견하고 영감을 얻어 발굴 작업을 해 보니 거대한 빈 무덤들과 유골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무덤들이 신약의 무덤 묘사와 일치하여 고든 장군은 골고다가 예루살렘 성 밖이라는 것이 성경의 기록과 더 맞을 것이라고 주장하여 성묘교회의 위치보다 더 정확한 골고다의 위치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현재 개신교는 성묘교회를 골고다의 위치로 전면 부정하지는 않지만 후자쪽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위치는 예루살렘 성 밖 다메섹(다마스커스) 문의 동북쪽 230m에 있는 “고든의 갈보리(Gorden’s Calvary)”라고 이름이 불리우는 지역입니다.

34절의 “쓸개 탄 포도주”와 병행구절인 마가복음 15:23절의 “몰약을 탄 포두주”는 서로 차이가 있지만, 두 개의 재료를 탄 포도주가 모두 마취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 주어진 것이 쓸개를 탄 것인지, 몰약을 탄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시편 69:21”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라는 시편의 예언의 성취라는 의미에서 본다면, 마태의 표현이 매우 구약배경의 언약의 성취라는 측면이 강조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5절 “그 옷을 제비뽑아”라는 기록은 시편 22편 18절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에 나타난 말씀의 예언 성취입니다. 마태복음 27:25절의 표현이 구약의 예언의 성취임을 나타내기 위해 어떤 헬라어 사본에는 시편 22:19절을 의역하여 인용하는 사본도 있으며, King James Version 성경도 이를 반영하여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그들이 그들 중에서 나의 옷을 나누고 또 나의 속옷을 놓고 제비뽑았나이다(that it might be fulfilled which was spoken by the prophet, They parted my garments among them, and upon my vesture did they cast lots.)”라고 내용을 삽입하였습니다.

38절 “강도”로 번역된 헬라어는 “레스타이(lestai)”인데 정확한 번역은 단순한 도둑(robbers, thieves)들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헬라어의 의미는 폭력을 동반하여 물건을 약탈하는 자, 또는 정치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는 폭력을 동반하는 반란 선동자, 반역자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당시의 극형 십자가에 처해질 정도의 죄목이므로 단순 강도나 도둑보다는 후자의 경우가 더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4절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라고 기록된 말씀은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23:39-40과 차이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마태는 두 강도 모두 욕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요한은 한 명은 욕하고, 다른 한 명은 오히려 이를 꾸짖고 있는 것으로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이에 대해 학자들은 아마도 처음에는 두 강도 모두 예수님을 비난한 것으로 보이지만, 한 강도는 회개한 것으로 추측합니다. 눅 23:34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조롱하는 이들과 원수들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의 모습을 보고 회개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태가 두 강도가 욕하는 것으로 기록한 것은 예수님이 당하시는 모욕에 더 강조점을 두기 위함이 아닐까라고 학자들은 주장합니다.

[묵상 및 적용]
고난 주간! 그리고 오늘은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하루 전 날입니다. 주님과 제자들의 마지막 식탁의 교제, 제자의 길을 가르치시는 세족식,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의 자리. 주님은 최후의 시간을 앞두고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숨가쁘게 달려 왔던 공생애 시간들… 혹자는 죽는 순간에 일생이 빠르게 지나가는 필름처럼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다고 하던데… 주님도 십자가에서 그렇게 시간의 흐름이 필름처럼 지나갔을까요?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의 구원의 삶은 짧은 33년의 생이 전부가 아니라, 인간의 죄로 인한 타락의 시간 때부터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의 경륜 가운데 시작된 것임을 감안한다면 필름처럼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기에는 너무나 많은 스토리들이 쌓여 있어서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삶은 결코 짧지도 않았으며, 일분 일초의 순간도 허투로 보낼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은 최후의 순간까지도 치열한 전투의 현장에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동원하여 사탄의 공세를 맞아 싸우셔야 했던 분이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9절에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라고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에게 모욕과 조롱을 당하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언대로 그대로 성취되는 것을 오늘의 본문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놀라운 “역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멸시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역설적으로 “유대인의 왕”으로 왕권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때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기대했던 무리들의 기대처럼 주님은 무력으로 왕권을 행사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오히려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선포한 메시아는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의 왕권은 세상의 관점과 다르게 고난을 통하여 은밀하게 행사되는 역설적인 왕권이기 때문입니다.

이 역설적인 주님의 왕되심을 마태는 색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과 병행구절은 마가복음 15:21-32, 누가복음 23:26-43, 요한복음 19:17-27 입니다. 그런데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 누가, 요한은 기록하고 있지 않은 내용을 마태만 기록하고 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40절과 43절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표현입니다. 다른 복음서들과는 다르게 특히 유대인들을 독자층으로 염두에 두고 기록된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표현한 것은 매우 도전적이고 파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오늘 본문 외에 또 다른 장면에서 똑같이 두번이나 등장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마태복음 4:3-6에서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시는 본문입니다.

문제는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사용했는가? 입니다. 마태복음 4:3과 4:6에서 사탄이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라고 말하면서 주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지나가는 행인들과 종교지도자들(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이 똑같은 표현을 사용하면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라고 희롱하면서 ‘스스로를 구원해 보라’고 시험하고 있습니다.

저자 마태는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시험의 기록처럼 십자가에 달려 있는 상태를 동일한 ‘시험의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예수님을 광야에서 시험하였던 사탄의 시험은 십자가 상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시는 것이지 살리시는 것이 아니었음을 어느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도리어 그 반대로 사탄의 최종적인 시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조롱과 모욕, 그리고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려와 보라”라는 말을 따라 십자가를 박차고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는 것이 참된 왕으로서의 모습이요, 진정한 구원의 능력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에도 사탄의 유혹과 그의 세력을 완벽하게 패배시키는 방법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비록 그 길이 고난의 십자가이며, 사망의 골짜기에 생명을 던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사탄을 이기는 길임을 아셨던 것입니다.

만약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희롱하던 사람들의 요구처럼 ‘만약 주님이 십자가에서 내려 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랬다면, 골고다의 현장에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 즉 지나가는 행인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아마 깜짝 놀라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그들에게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 메시야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랬다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실상은 예수님의 실패요, 사탄의 결정적인 승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머물러 있는 것만이 그가 메시아로서 숨겨진 왕권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길이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메시아로서의 사명은 십자가 위에서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신비롭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성의 한계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승리와 부활이다”라는 명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명제를 그대로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로마 군병들이 예수에게 준 마취제의 성분을 함유하고 있는 쓸개 탄 포도주를 혀 끝으로 맛보신 다음에 거부하셨습니다. 어쩌면 그것을 취하면 고통을 줄일 수 있음을 아셨을 것입니다. 큰 못에 박힌 손과 발을 짓누르는 고통, 그리고 싶이 박힌 가시 면류관에서 전달되는 찢어지는 머리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음을 아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작은 고통의 경감마저도 거부하셨습니다. 인류를 위한 대속제물로 죽어가는 자기 자신의 사명을 이루는 데 있어 자신이 겪어야만 하는 고통을 회피하지 않으시고 적극적으로 받아 들이시고 친히 다 감당하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 모든 인류가 겪어야 했던 고난을 친히 감당하신 주님의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의 깊은 곳에 담긴 사랑과 은혜! 십자가 수난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사랑과 은혜, 그리고 수난의 깊은 아픔을 묵상하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십자가를 참으신”이라는 찬양의 가사가 오늘의 기도의 내용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참으신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예수님! 내 죄를 씻어 주시고 구속하시고, 어둠을 물리시치고 세상의 빛이 되신 예수님! 영광의 빛을 비추셔서 나에게 자유를 주신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드립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완전하신 사랑을 보여 주시고,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와 놀라운 지혜를 보여 주신 아름다운 그 이름! 예수님을 찬양하며 감히 ‘사랑한다’ 고백합니다. 십자가를 참으신 나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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