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QT나눔

오늘의 말씀묵상 2/28/2021 주일 [마태복음 18:21-35]

작성자
Hojoon Song
작성일
2021-02-28 09:30
조회
90

2. 28. 주일. 오늘의 말씀묵상

찬양링크 “보좌를 울리네(스데반의 용서)”: https://youtu.be/cqrCc_2C1Rg

[본문: 마태복음18:21-35]
21.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본문이해]
(21-22절, 용서에 관한 베드로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
베드로가 예수님께 죄를 범한 형제에 대한 용서의 한계를 묻자 주님께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즉 끝까지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답변하십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용서는 칭의와 관계된 용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구원하시는 자를 용서해 주시는 칭의와 관계된 용서는 단 한 번으로 영원한 효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용서에 관한 주님의 답변은 생활과 관계된 용서입니다.

앞에 있는 실족케 하는 일과 권징의 가르침에 이어서 본문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 랍비들은 3회까지는 용서해 주되 4회는 절대 용서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일곱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고 질문하였을 때에, 어쩌면 용서에 대해 아주 너그러운 입장을 가지고 말한 자신을 주님이 칭찬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당시 히브리인들은 ‘7’이라는 숫자에 ‘완전, 거룩’이라는 의미를 부여했으므로 베드로가 일곱 번 용서한다는 의미는 훨씬 더 큰 관용의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일곱 번 정도면 최고로 많이 용서한 것이 되지 않을까라고 베드로는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답변은 뜻 밖이었습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고 말씀하신 것이며, 이것은 거의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다(헬, 아페소)’란 말은 원래의 상태에서 완전히 떠나 다른 상태로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본문에서 상대가 자신에 대하여 잘못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잘못에 더 이상 개의치 않고 잘못을 하지 않았을 때와 똑같이 대한다는 의미이며, 형벌을 유보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용서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23-35,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해 진정한 용서에 관하여 교훈하심)
23절에서 “천국은~과 같으니”라고 표현하면서 천국에 대한 비유이지만, 비유의 목적은 진정한 용서에 관한 교훈이며, 또한 천국의 임금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린 자가 받는 형벌에 대한 교훈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일만 달란트가 얼마나 큰 액수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재미난 계산을 한 신학자가 있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입니다. 1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주 6일 일하는 노동자인 경우에는 거의 20년치의 수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반 달란트는 2십만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노동자의 수입이며, 하루 동안 6천만명이 일해야 벌 수 있는 품삯입니다. 또한 1세기 당시 노예의 최고가가 2,000 데나리온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일반 달란트를 빛져서 노예로 팔려가야 한다면, 가족 30,000명을 노예로 넘겨야 하는 엄청난 거액입니다. 당시 로마가 사마리아 땅 전체에서 거둔 세금이 600달란트, 갈릴리와 베뢰아에서 거둔 세금이 200달란트,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거둔 세금이 800달란트였으니 유대지역 전체에서 거둔 세금 총액의 6배가 넘는 엄청난 양이 일만 달란트입니다. 또한 무게로 환산하면 100데나리온의 빚은 장정 한 명이 주머니에 넣어서 등에 짊어질 수 있는 무게이며, 일만 달란트는 장정 8천 6백명이 짊어져야 하는 무게입니다. 8천 6백명이 한 걸음씩 떨어져 옮긴다면 길이로 약5마일의 줄을 서야 하는 길이라고 합니다.

즉 비유에 등장하는 엄청난 액수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임금으로 비유되고 있는 하나님 앞에서 온 인류는 도저히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큰 부채, 즉 죄라는 빚을 짊어진 자임을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빚을 다 갚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해야 함을 의도하고 있는 비유입니다.

26절에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라는 표현은 종의 과장된 표현이며, 도저히 이룰 수 없기에 거짓말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종은 주인의 화를 누그러뜨리고 직면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하여 마치 한 번만 기회를 더 주면 모든 빚을 갚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일만 달란트라는 빚은 웬만한 사람이 단기간에 갚기 불가능한 액수입니다. 그러므로 종이 말한 이 말은 거짓이요, 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다는 무능력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종의 태도에 비해서 27절에 주인의 심정을 “불쌍히 여겨”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다(헬, 스플랑크니스세이스”란 말은 ‘측은히 여기다’라는 의미인데, 이 단어는 ‘내장, 창자’란 뜻의 ‘스플렌’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그래서 ‘불쌍히 여기다”라는 말을 좀 더 깊이 번역하면 “내장, 창자까지 움직이는 듯한 격려한 감정이 일어나도록 측은히 여기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도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에게 “측은히 여기다”라는 말에도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견딜 수 없는 죄의 짐을 지고 허덕이는 우리를 굽어 보시며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기에 독장자를 희생하면서까지 구원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28절에 자기에게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라는 표현에서 ‘붙들다(헬, 크라테사스)’라는 표현은 ‘힘으로 억제하다, 체포하다’라는 뜻을 지닌 단어로 힘을 써서 붙들은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목을 잡다(헬, 에프니겐)’라는 표현은 ‘숨을 막히게 하다(헬, 프니고)’라는 뜻으로 거라사에서 돼지 2천마리가 모두 바다에 빠져 ‘몰사하거늘’라는 표현에도 사용된 말입니다. 즉 빚을 탕감받은 종이 자기 동료를 만나자 마치 물에 빠졌을 때 숨이 막히는 것처럼 거의 죽을 정도로 심하게 동료의 목을 졸랐던 것을 표현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못하는 파렴치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묵상 및 적용]
오늘의 말씀묵상은 참으로 어려운 주제를 두서없이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용서에 관한 문제가 있을때 옆에서 조언하는 사람들이 흔히 ‘그냥 용서해 버리고 잊어버려~’라고 말하곤 합니다. 이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용서할 때는 일단 반드시 잊어야 한다는 것이며, 반대로 잊혀지지 못할 때는 용서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말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을까요? 어려운 문제이지만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저장실)와 같은 우리의 뇌는 중요하지 않은 것과 중요한 것을 분류하여 중요한 것은 장기 저장실에 보관해 두고 오랫동안 기억하지만, 사소한 것은 잊어 버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용서해야 할 항목들이나 그것에 관한 기억들은 중요한 기억일까요? 아니면 중요하지 않은 기억에 해당할까요? 그런데 심리학자들은 용서가 필요한 내용들은 용서하고 나서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전혀 없었던 것처럼 완전히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용서가 인간 심리적으로, 뇌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므로 포기해야 할까요? 아니면 용서한 후에 기억에 남아 있다고 해서 용서하지 않은 것이 아니므로 괴로워 할 필요가 없으며, 그냥 무시하고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그래도 용서는 일단 하고 보아야 할까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 용서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용서는 하라고 하니 해야 하는데, 마음은 웬지 껄끄러운 것이 용서입니다. 사람들은 용서에 인색한 편입니다. 열 번 잘 하다가도 한 번 잘 못하면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라고 말하며 따돌리기도 합니다. 수년 전에 들었던 섭섭한 말 한 마디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다가 걸린 생선 가시처럼 계속 목에 걸려 있듯이’ 여전히 마음 속에 남아 있기도 합니다. 재미난 전승을 하나 소개할까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유명한 그림 ‘최후의 만찬’ 작품에 얽힌 전승들이 여러 개 있지만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합니다. 어느 날 다 빈치가 ‘최후의 만찬’ 작품을 그리기 전에 동료 화가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분하고 노하여 가룟 유다의 얼굴을 그릴 때 그 동료 화가의 얼굴을 그려서 복수를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려 넣은 후에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려고 하니 아무리 애를 써도, 시간이 흘러도 주님의 얼굴을 그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료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가룟 유다의 얼굴을 지우고 다시 시작해서 작품을 완성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승이기 때문에 사실 유무 보다는 왜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왔는지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용서하지 못하면 무언가 꼬이게 되고, 막히게 되고, 닫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용서해야 하며, 마음이 풀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든 것을 잊고 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은 이유는 용서의 기본적인 원리가 사람의 본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용서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깨달은 바를 내 마음에 담았을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의 말씀이 가르쳐 주는 교훈처럼 용서를 경험한 사람이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용서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 그 은혜를 잊어 버리고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지 않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파렴치한 짓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들 스스로 세워 놓은 견고한 진, 곧 우리 안에 있는 ‘용서하지 못하는 원한과 분노의 강력한 진지’를 구축해 놓은 굳은 마음을 부서뜨리는 선언을 하십니다. 바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삶으로 그 용서를 실천하셨습니다. 자신을 세번 부인한 베드로를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인생에서 수없이 많은 횟수를 반복하며 주님을 떠났던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시기에 그렇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들도 가능할까요? 우리는 주님이 아닌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니 일만 달란트라는 엄청난 금액을 탕감 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사람의 빚을 왜 탕감해 주지 못했을까요? 엄청난 혜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세계관이 바뀌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가치관이 바뀌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이 은혜를 받을 때에 자기가 받은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깨닫지 못하니 다른 사람을 보는 눈이 바뀌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탕감 받은 사람은 은혜는 받았으나 자신의 세계관, 가치관, 주위를 바라보는 시각은 변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볼 수 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으니, 용서를 하려면 나 스스로가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내 가치관, 내 세계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전환되어야 나도 주님처럼 용서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35절은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의 질문에 의하여 시작된 용서에 관한 교훈의 최종 결론 부분입니다. 이 말씀은 형식적으로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으로 부터 용서해야 함을 밝히고 있습니다. 입으로의 용서도 아니며, 행동으로 용서했음을 보이는 것도 아니라, 마음으로 부터의 용서입니다.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하면 마음으로 부터 상대방의 죄를 완전히 잊어 버리는 것, 즉 죄를 짓지 않았을 때와 같이 여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사람의 용서의 수준으로는 닿을 수 없는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이것이 가능할까요? 아니요!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하나님처럼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방법이 단 한가지 있습니다. 나는 못하지만 죄를 지은 상대방이 내가 믿는 하나님을 믿으면 상황이 급변합니다. 나도 하나님을 믿고, 그 사람도 하나님을 믿으면 관계가 새롭게 정립됩니다. 내가 용서하지 못한 그 사람이 나와 무관한 8촌 이상의 외부인, 나와 싸웠던 사람, 나와 원수되었던 사람, 내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람,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이라는 관계가 아니라, “내 형제”로 촌수가 달라지고 관계가 달라집니다.

관계가 달라지면 세계관,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바로 “가족”, 가족끼리는 용서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고, 품어야 하는 관계, 미운털이 있어도 끝까지 사랑해야 하는 관계로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죄를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듯이, 나의 본성과 능력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내 형제와 자매가 되면 가능해 집니다. 이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이루어진 세계관과 가치관의 변화로 가능해진 “용서의 가능성”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처럼 도무지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하나님께 졌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인 된 우리들, 심지어 원수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물로 삼으시고 십자가에 죽이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시편 103편 12-13절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죄를 용서해 주신 분이십니다.

이 놀라운 용서의 은혜를 경험한 그리스도인들! 용서가 필요한 자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기를 구합시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간구하셨듯이, 비록 지금의 나는 용서할 자신감이 없지만, 최소한의 용기를 내서 용서가 필요한 자들이나 나에게 쓴뿌리로 남아있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서 깊이 알게 되도록 주님의 기도를 따라서 해 보면 어떨까요? 이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는 날, 그 날에 놀랍게도 나 자신도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는 경이로운 역사가 분명히 일어날 것입니다.

[기도]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예수님! 이 부족한 죄인을 안아 주시고, 감싸 주시고, 용서해 주시옵소서.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님의 긍휼하심으로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주린 자를 배부르게 먹여 주시고, 죽은 자를 일으켜 주신 것처럼 이 죄인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죄악의 본성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여 주옵소서. 씻어 주시고 정결케 하여 거룩하게 하옵소서. 베푸신 은혜가 끝이 없는데 은혜를 깨닫지 못하여 어리석은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 안에 거하는 풍성함과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나의 삶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이 세상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송호준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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